〈 405화 〉탐식마(貪食魔)
알 라시드는 답답한 마음에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한 숨만 푸욱 내쉬었다.
인간 수준을 벗어난 그의 시력은 이 불야성 속에도 밤하늘의 별의 반짝임을 잡아내었으나,
그에게 위안이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알 라시드는 돔형 건출물로 시선을 돌렸다.
주변의 조명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파묻힌 그 건물은 주변 광경처럼 죽음 같은 침묵에 잠겨있었다.
알 라시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젠장, 저쪽 감지 범위 생각하면 들여다 볼 수도 없고.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뻔히 알 텐데.’
어쭙잖게 살피자니 저쪽 심기가 뒤틀릴 것 같고,
그냥 있자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는 제 왼쪽 손목을 내려다 봤다.
손부터 시작해서 어깨를 지나 견갑골까지 커버하는 건틀릿 위에 끼워진 청동빛 팔찌.
그냥 언뜻 보기에는 골동품 가게나 박물관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보였지만,
알 라시드가 완전 무장 중인 아티펙트 전부를 합쳐도 비길 수 없는 물건이었다.
‘드라우프니르.’
그 이름에 걸 맞는 이적을 행하는 유니크 아티펙트.
당당하게 그 전문가라고 칭할 만한 알 라시드였지만,
그는 지금 이 ‘드라우프니르’를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이걸 맡고 있는 건 알 사디크의 부상 때문이었으니까.
아직 이름도 붙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칼리프 클랜 내에서 네임드 몹에 근접한 ‘그것’은 류 현이 난입하기 전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칼리프 클랜의 수장 자파르 알 사디크의 왼팔을 거의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단순히 개방 골절 같은 걸로 인대가 찢어진 게 아니라,
안쪽 근육이 뭉개져서 찢어지고 신경이 걸레짝이 되는 부상은 재생 뿌리와 살살이 점토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복귀는 고사하고,
평범한 생활에도 지장을 초래할만한 중상이었다.
잔존한 마력을 제해도 그럴 진데,
놈의 기묘한 존재감과 반대로 놈의 남긴 마력은 아주 묵직하게 환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재생 뿌리와 살살이 점토 같은 것의 도움을 받아도 적어도 석달 가량은 왼팔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알 라시드는 주치의의 진단을 듣고 자신의 판단에 후회를 했다.
알 사디크가 ‘드라우프니르’를 착용하고 있었던 건 그가 그것을 주력으로 사용할 예정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유로 인한 것이었으니까.
현 시점에서 ‘드라우프니르’의 최고 전문가인 알 라시드가 보기에 ‘드라우프니르’는 도망을 치는데 최적화된 물건이었기에 그는 연습을 권했다.
전력 뻥튀기도 꽤 매력적이긴 했지만,
단기 결전용으로 밖에 쓰지 못하는 그 능력은 알 라시드가 보기에 칼리프 클랜으로서는 그리 매력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전 같으면 최정예이자 충성도 높은 친위대에게 사용법을 숙지시켜서 단기결전으로 위험요소들을 제거시키는데 써먹을 수 있었겠지만,
칼리프 클랜은 이제 밖으로 눈을 돌리기에는 아프리카에서 몰려든 재앙들을 상대하기에도 바쁜 상황이었다.
사용 후 일단위로 무방비가 되고 내상도 입게 되는 아티펙트를 막 굴리긴 힘들어 진 것이다.
자연히 전투 부문에서는 목소리가 큰 편이며 가장 전문가라고 할 만한 알 라시드는 분신체를 만드는 능력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고,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위약해진 칼리프를 보호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탈출용 연막으로 써먹으려면 분신체를 제어하는 감각에 익숙해져야 했기에 알 사디크가 차고 있는 기간이었는데,
‘드라우프니르’의 존재를 감지한 ‘그것’이 습격해 온 것.
첫 습격이 ‘드라우프니르’를 사용한 첫 실전 무대인 던전을 나온 직후,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기에 들어온 것이라서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았던 것이다.
그 많은 친위대가 있는데 어떻게든 시간을 끌 수 있겠지.
당장 오지도 않은 놈을 걱정하면서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자.
그 해결책과 접촉하고 있던 잠깐을 비집고 들어온 ‘그것’에게 알 사디크의 목숨과 ‘드라우프니르’까지 빼앗길 뻔 했다는 사실은,
어지간한 알 라시드조차 자책을 금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한 것이 온전히 외부인의 조력이라는 사실도 크게 한몫했고 말이다.
그 때문에 알 라시드는 들끓는 속을 애써 달래가며 침묵에 잠긴 저 돔형 건물을 바라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힘의 차이 이전에 전투 감각도 차원이 달랐다. 그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던 틈을 그냥 비집고 들어갔어.’
왼팔을 잃을 위기에 몰렸던 알 사디크와 친위대가 끼어들 틈을 내주지 않으며 물고 늘어지던 ‘그것’의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비집고 들어가서,
알 사디크를 뒤로 빼돌린 일련의 움직임은 알 라시드나 그 아래의 친위대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한 것이었다.
구명 받은 알 사디크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지금 ‘드라우프니르’를 찬 알 라시드가 혼자 밖에 나와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
‘...잡아야 해. 근데 대체 뭘 줘야 할지 모르겠네.’
괜히 지분 관계없이 실소유를 넘기겠다고 질렀나 싶었다.
‘그것’을 겪기 전에 그렇게 질러놨으니 한 번 붙어본 후인 지금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놈의 성장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성장이 아니라 복구라고 해야 하나?’
알 라시드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의 도주 후 화련이 쫓을 수 없다고 하자,
두 여자를 끌고 의논할게 있다며 저 돔 안에 틀어박히던 류 현의 움직임에서 고민을 읽어냈기에 더욱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더 내줄만한 유효한 카드가 칼리프 클랜 입장에서도 딱히 없다는 것.
‘‘드라우프니르’를 더 부각시켜야하나? 아니야...주기로 한 걸 가지고 자꾸 물고 늘어지기도 좀 그렇지.’
‘젠장, 저놈들은 왜 물욕이 없어서 사람을 이렇게 피곤하게 해?’
아니,
정확히는 칼리프 클랜이 유수의 클랜 중 가장 크게 제시할 수 있는 부분이 그들에게는 전혀 안 먹히는 게 문제였다.
알 라시드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푸념을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목숨 걸고 괴수를 때려잡는 이들이 유명세도 관심 없고, 돈은 저들끼리 번 것 이상은 쳐다도 보질 않으니 어떻게 협상을 하라는 것인가?
그나마 관심 있는 부분은 저들끼리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고,
칼리프 클랜이 보유하고 있는 유니크 아티펙트는 개입을 요청하기 위해서 이미 팔아넘긴 상태다.
대가가 작다고 그러진 않겠지만,
오늘 본 ‘그것’의 상태나 류 현의 반응을 볼 때 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까 보니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 거 같았고.’
‘이상할 건 없지. 그런 괴물들이랑 뱃가죽이 수십 번 찢어지면서 싸웠는데 벌써 다 회복됐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본인도 수 없이 상위 괴수와 부딪혀봤고,
부상이 없어도 전투 그 자체가 상당한 소모를 강요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알 라시드는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몸도 성치 않은,
이곳에 바랄 게 별로 없는 것을 넘어 그리 좋은 인상도 없을 이들에게 저런 이상한 괴수를 맡아달라고 옆에 붙어서 징징거려봐야 좋은 반응을 받아내진 못할 터.
‘영감님 부상만 아니었으면 의논이라도 해보는 건데...’
그나마 클랜 상층부 중에서 말이 통하는 편인 그의 주군은 부상 때문에 주변을 물러놓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른 이들은 강경파의 핫산까지 갈 것도 없이,
그 소동 이후에도 아무도 용잡이팀에게 감사를 표하자는 의견을 표하지 않을 정도다.
‘드라우프니르’를 통한 거래 이야기를 꺼냈다간 당장 클랜원과 칼부림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제발 완전 철수만 아니어라. 잠깐 빠졌다가 오는 것도 내가 어떻게든 커버 쳐볼 테니까..’
알 라시드는 그렇게 하면 자기 마음이 전해질 것처럼 간절한 눈빛을 돔 안쪽을 향해 보냈다가 돌아섰다.
알 사디크가 자리보전하고 있어야하는 상태라고 그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공주님이라도 끼고 밀어붙이면 당장 억누르는 것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X던전 이후,
알 사디크를 포함한 쓰리톱에서 그를 제치고 투톱이 된 마람 압둘아지드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변변한 파벌조차 없고,
굳이 따지자면 알 사디크의 추종자에 가까운 그녀라지만 그렇다고 클랜 내에 힘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클랜 내의 파벌들은 정치적으로 무지한 그녀에게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본인이 정말 관심이 없어서 무의미한 짓이 되었을 뿐.
설득이 어렵진 않겠지만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당부를 해놓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기에 알 라시드는 발을 떼자마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고민거리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인도로 날아갔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