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2화 〉탐식마(貪食魔) (402/429)



〈 402화 〉탐식마(貪食魔)

알 라시드의 칭찬 아닌 칭찬이었지만 찌푸려진 류 현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오히려  우거지상이 되었다.


“제가 그런 기대에 응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요.”


별 악연이 없으면 모르되,
전생뿐만 아니라 현생에서도 악연을 한차례 쌓은 칼리프 클랜이었다.


그냥 있으면 승하가 들이박을 거 같아서 괜찮다고 하며 뜯어말렸지만,
당시 세아가 같이 있었음에도 그런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류 현으로서는 심히 불쾌한 일이었다.


막말로 칼리프 클랜이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반도로 넘어오는 괴수군단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있는 놈들  몇  정도는 제기불능에 가깝게 망가뜨렸을 것이다.

칼리프 클랜이 전면전을 감행할 정도의 피해를 내면 곤란하니 사람을 봐가면서 그랬어야 했겠지만.

어찌됐거나 류 현이  때 일을 잊은 것처럼 굴고 있어도 아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말만 잘해줘도 유니크 아티펙트를 슬쩍 빼낼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서도 날을 세울 만큼.

“...아직 화 안 풀렸었나? 불편할 자리일 거 뻔히 알면서 와 줬길래 풀린 줄 알았더니.”
“칼리프 클랜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뒀다면 좀 풀렸겠죠. 그런데 그렇게 했습니까?”

 라시드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가 개입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말리는 쪽이었지만 클랜 차원에서 언론사 여기저기 돈을 뿌려서 소문을 형성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실무에 개입을  생각도 없고, 그럴 라인도 만들어두지 않았지만 그가 앉아있는 자리가 자리였으니까.


조금 우물거리던 그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허리를 푹 숙였다.
 현이 슬쩍 외면하는 모양새였지만 알 라시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후에 공식적으로 발표하겠지만 먼저 사과하지.  때 급습시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
“......”

다시 제 집처럼 드러누우려던 승하도 슬쩍 눈치를 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당시 현장에 없어서 대충 분위기만 전해들은 화련은 화련대로 입을  수가 없었고.

류 현은 허리를 숙인 채로 멈춰선 알 라시드를 몇 번 곁눈질 하다가 콧김을  뿜었다.
플레이어, 그것도 최상위권 플레이어니 하루 종일 저 자세를 유지해도 문제 없겠지만 그렇다고 보는 사람이 속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됐습니다.  라시드 씨가 사과 할 일도 아니고요. 저도 눈치라는  있습니다.”
“영감님을 못 막은 것도 내  못이니까.”
“...알 사디크와의 관계 개선은 장담  하지만 이번일은 받지요. 대가도 나쁘지 않으니 말입니다.”
“고마워. 나도 영감님 열심히 설득해 보지.”
“설득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대가 챙겨서 갈 테니까.”


뚱한 대답에 넉살 좋은 알 라시드마저 살짝 경직된 미소를 지었지만 류 현은 대답을 철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과를 받더라도 ‘드라우프니르’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롤백 될 게 뻔하지. 아니면 더 나빠지던가.’


칼리프 클랜의 주장대로면 두 번째 유니크 아티펙트도 강탈한 게 될 테니까.


 만한 전력과의 극단적인 대립을 원하지 않는 만큼 되도록  라시드가 제시하는 절충안 쪽으로 가도록 노력은 해보겠지만,
어디 노력만으로 세상사가  좋게 굴러가던가.

‘페릭스’ 토벌 때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칼리프 클랜과의 불편한 관계만 결과로 남지 않았는가.


‘당장 전력으로 투입할 만한 물건은 아니니 굳이 극단적으로 몰아갈 필요는 없겠지만...분신 컨트롤 난이도가 문제로군.’

소모품 복제 같은 건 용잡이 팀에게 메리트가 없다시피 했다.


개인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소모품들을 강 찬이 독점 공급 중이고,
단체로서는 최고 장인 집단인 ‘마탑’은 마스터들이 찾아와 대놓고 어떻게 줄을 댈  없나 살랑거리고 있는 판이니까.


장비한 유니크 아티펙트는 실험 해보지 않아도 복제가 안 될게 뻔 하니,
분신체를 만드는 능력이  유효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컨트롤이 쉽다면 굳이 아프리카 봉쇄선을 담당할 단체와 척을 질 필요가 없다.
숙련도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적용되더라도 내가 쓰기엔 좀 부담되는 능력이기도 하고. 승하 아니면 화련 씨한테 맡기는 게 최선인데...두 사람은 아직도 성장 중이니.’

두 사람이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수련 삼매경이었으니까.


화련이야 슬슬 눈치 보면서 비상 탈출용 아티펙트 만든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승하는 옥상이나 근처 공터에서 대놓고 칼춤을 추다가 화련이 쳐놓은 결계를 깨서 혼나는 걸  번인가 본적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그녀들의 기세는,
이따금씩 류 현의 신경을 돌릴 정도로 수련에 열중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성능 좋은 유니크 아티펙트라고 해도 불순물을 섞고 싶진 않았다.
‘엑스칼리버’나 개미지옥 같이 계속 다루던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둘 모두에게 낯선 힘일 테니까.


이질적인 걸로 치면 유니크 아티펙트 중에서도 독보적이지 않은가?

알 라시드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숙련도를 올리려면  긴 시간을 통째로 갈아 넣어야 할 테니,
권하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할 터.


‘...일단 물건부터 확실히 확보하고 생각을 할까.’

그렇다고 그것을 거부할 생각은 아니었다.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둘에게 시간이 필요한 이 시점에서,
당장 칼리프 클랜과 척을 져가면서 확보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  뿐.

척을 지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팀원들의 휴식에 악영향이   뻔했으니까.
상황이 좋지 못하다면 그 모든 걸 감수하고 강행하겠지만 지금은 알 라시드라는 내부의 협력자가 있지 않은가?


그에게 칼리프 클랜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강제할  없겠지만,
어느 정도 협조를 받아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류 현은 그 협조의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서 물음을 던졌다.

“왜 이렇게 까지 하시는 겁니까? 막말로 우리가 칼리프 클랜과 전면전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협회에 압력을 가해서 이번 만남을 방해한 것도 아닌데. 알 라시드  말대로 앙금이  남은 것처럼 만남에도 응해드렸고 말입니다.”
“이런 나라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보이니까.”
“...?”
“형씨는 지금 누가 뭐래도 세계최강이야.”

너스레를 떨려는 것인지 아프지도 않을 허리를 툭툭 두드리면서 알 라시드는 그의 정면에 앉았다.

“...아직 금칠 받을만한 일은 안 해드린  같은데요.”
“금칠은 무슨. 사실을 말하는 거지. 저번에 그 중계를 보고도  생각을 못하는 건 많이 모자라거나 눈이 안 보인다는 의미지. 일반인도 아니고 플레이어라면 말이야.”
“뭐 요즘 내 귀에 들려오는 소식들을 보면 생각보다 높은 자리에 앉은 모지리들이 많은 거 같은데...뭐 어쩌겠어. 자리가 능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별 거 없어. 그런 모지리들 중에서 우리가 발 빠르게  보여야겠다는 결심? 뭐 그런 거지.”
“칼리프 클랜의 이인자가 할 소린 아니군요.”
“이인자? 누가 그래? 내 아래 있는 애들은 파벌이라고  것도 없어. 다른 파벌이 하도 갈구니까 내 밑으로 대피해 들어온 거지. 내가 힘 빠지면 바로 다른  알아볼 걸?”
“알 사디크는 그렇게 생각  하는  같은데요. 아니면 나와의 협상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아니, 아니. 그게 왜 그렇게 흘러가? 이인자가 아니어도 전령정도는 충분히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하는데.”
“전령치고는 월권이 심한 것 같은데요. 스스로 알 사디크의 의향에서 벗어난 짓을 하고 있다고 실토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령이든 뭐든 클랜에 속한 입장에서 어떻게든 클랜의 존속을 바라는 거지. 당신이랑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버텨낼 거라고 자신할 수 없으니까. 막말로 지금 당장 다 뒤엎어버리겠다고 나서면 누가 막겠어? ‘드라우프니르’를 써도 나는 당신 못 막아. 우리 공주님도 그건 별 다를 거 없을테고.”
“알 사디크는 아예 언급도 안 하는 군요.”


알 라시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내가 영감님한테 모가지 당할 각오까지 해가면서 이 자리를 만든 이유지. 당신을 따라서 X던전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우린 계속 강해졌어. 당신을 계속 따라다닌 웨인 크로이츠나 지벡 건터처럼 폭발적으로 강해지진 못 했지만, 꾸준히 둔화세 없이 말이야. 마치 한계벽이 무너진 것처럼.”
‘그야 그렇겠지. X던전에서 우리 팀 외에 그 정도 기여를 한 건 웨인 씨랑 이 둘이 끝이었으니까.’

원래 전생에서도 죽기 직전까지 최상위 플레이어에 랭크되었던  라시드다.
‘마녀’에 대항해서 알 사디크를 빼내는  성공한 것을 보면 거품보다는 저평가 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 그 재능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


거기에 남들은 접해보지 못한 최상위 던전을 경험해봤으니 직접 네임드 몹 레이드에 자잘하게나마 기여한 이들보다는 못하더라도,
성장세가 남다르게 나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잡몹만 열심히 족치다가 귀국한 아프리카 원정대도 꽤나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들었다.

“영감님도 이제 확실히 알아. 우리 둘이 일 년씩 정체되거나 영감님 본인이 네임드 몹에 준하는 경험을 쌓지 않는 이상에는 따라잡을  없다는 거. 그래서 내 설득이 먹혀든 거고.”
“네임드 몹 레이드에라도 껴달라는 겁니까?”
“아니, 그렇게 해봐야 공략 핵심인 당신을 따라잡을 수도 없을 거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우리 상황도 그다지 좋진 않아서 말이야. 당장이야 ‘드라우프니르’ 때문에 소집하긴 했지만...지금 경계 병력은 반쯤 허장성세야. 일주일 이상 유지할 수도 없지.”

 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할 건 없었다.


칼리프 클랜이 맡고 있는 아프리카 봉쇄선은 말 그대로 칼리프 클랜이라서 성립되고 있는 것이니까.


데스나이트 침공과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인간노예’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유럽이 열심히 지원하고 있긴 했지만,
결국 주체는 칼리프 클랜이었다.


거의 매일 같이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괴수들의 물량공세에 시달리고 있으니 코어 전력을 외부로 돌리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터.
여태 파키스탄에 마람 압둘아지드를 파견해 놓은 것이 더 이상한 일.


남의 클랜 일이니 이러쿵저러쿵  생각은 없었지만,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약간 떨떠름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거 같은데, 우리도 인도 쪽에 죽기 살기로 전력을 투사한 건 아니야. 클랜의 후원자들이 그쪽 문제에 관심이 많으니 한 번에 성의를 보인 후에 물릴 생각이었어.  정도 병력으로 어떻게 인도를 도모하겠어?”
‘‘엑스칼리버’에 대한 냄새를 맡아서 일수도 있겠지. 우리가 인도에 들렸다는 것도 아는  같으니 에둘러서 캐 볼수도 없겠군.’

어느 쪽이든 간에 알 라시드가 그 속사정까지 말해주진 않을 것이다.
당장 그런 정보를 줄 필요가 없기도 했고.


“확실한  누구도 당신을 따라잡을  없다는 거지. 당신의 팀 또한 마찬가지고.”


알 라시드는  여자를 슥 돌아보았다.
승하는 심드렁하게, 화련은 시선자체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확신 못하겠지만 쉽게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모두가 알지. 당장 우리 상황이 빈말로도 좋다고는  하는 수준인 것도 사실이고.”
“이 와중에 당신과 계속 불편한 관계로 남는 게 바보짓이라는 걸  정도의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반발이야 꽤 있겠지만, 뭐든 살아남아야 논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당신네 대장 몰래 ‘드라우프니르’를 넘겨주겠다고 밀약을 나눌 정도로? 우리가 그 정도로 위협적인 행보를 보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살아남는다는 게 목숨만 붙어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니까. 스스로 말하긴  그렇지만, 우린 적이 많아. 당신이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그냥 뒤처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 놈들이  손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지.”
“...비호를 바라는 거라면 번지수를 잘 못 짚은 것 같은데요.”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이 흐름에서 제외돼서 사방에서 물어뜯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우리가 해놓은 게 있으니...바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정도로는 뻔뻔하진 않아. 의도적으로 흐름에서 우리를 제외하지 않겠다는 정도로 충분해.”
“그걸 관철시킬 수는 있으시고요? 아까부터 계속 맴돌이 하는 기분인데, 아직  사디크의 보증도  받은 상황 아닙니까.”
“맞아. 사실 영감님의 제가를 받아내도 파벌이 반발하면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그럼 이 대화는 없던 것으로...”
“그래서 나도 그 파벌이라는 거 만들어보려고.”


류 현이 놀란 눈으로 바라본 알 라시드는,
한 쪽 입가만 끌어올린 그 삐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삼으려고 해. 어때, 당신한테도 나쁜 일은 아닌  같은데? 농담으로라도 우리가 당신에게  힘이 된다고는 못하겠지만. 뒤에서 엥엥거리는 날파리가 협력자가 되는 거라고? ‘드라우프니르’ 까지 얹어서.”

예상 못 한  넘어서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었지만,
류 현은 비웃어 넘기기 보다는 가라앉은 눈을  라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거 승산은 있는 겁니까?”
“이놈의 클랜은 적이 많은 만큼 내부에도 그거에 질겁하는 놈들도 많거든. 그 생중계 이후에 당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놈들도 많아졌고. 후원자들이나 원로들만 해도 입으로는 강경대응이니 어쩌니 해도 당신이랑 강화 맺으면  팔 벌려서 환영할 걸?”
“적극적인 협조는 장담 못 합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그냥 철수할 수도 있고요.”
“외부인한테 그 이상 뭔가를 바라는 것도 웃긴 일이지. 나중에 영감님이나 한 번 만나줘. 아, 우리 공주님이 검성이랑 한  보고 싶다는 데 그것도 되려나?”


류 현은 승하를  돌아보았다.
승하는 별 고민도 없이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현에게 턱짓을 했다.
알아서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그 정도는 해드리죠.”
“좋아. 이제부턴  솜씨를 보여줄 차례군.”
“급하게 하다가 뒤엎지나 마시죠. 또 그 꼴을 겪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걱정 마. 지금 떠올라서 되는대로 지껄인 게 아니라 준비한 지 좀 됐으니까.”

 라시드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고, 류 현도 가볍게 거머쥐는 것으로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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