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탐식마(貪食魔)
칼리프 클랜은 원래도 폐쇄적인 것으로 유명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그 폐쇄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파키스탄 국경 분쟁지역 외에는 외부활동을 거의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갔을 정도였다.
그 행보를 보고 수많은 해석이 나왔다.
아라비아 반도 내에 괴수 등장 빈도가 상상이상이라고 하더라,
이집트에 토벌된 라가로드 같은 개체가 다시 생성돼서 자파르 알 사디크가 큰 부상을 당했다더라,
그래서 아프리카 봉쇄선에 문제가 생겼다더라,
현 국왕이 건강이 나빠져서 본격적으로 승계 절차를 밟고 있다더라 등.
묘하게 현실감 넘치지만 정황을 끼워 맞춘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추론들이 난무했다.
아마 용잡이 팀이 연이어 사고(?)를 치고 다니지 않았다면 가장 뜨거운 이슈는 칼리프 클랜이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UN권고를 줄기차게 무시하며 대놓고 파키스탄을 지원해주다가,
근래에 들어서야 파견 용병이라고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시작한,
호전성은 차고 넘치는 작자들이 외부에 뻗친 힘도 회수하고 있다는 건 이야깃거리가 되기 충분한 것이었으니까.
사우디아라비아 당국도 입을 꾹 다물고 외교선도 대부분 차단한 판국이니 의혹이 증폭되기도 충분했고.
현재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신의 방패’ 건으로 협상 중인 미국 정도였다.
‘그게 유니크 아티펙트 때문이었다니...사실대로 말해도 아무도 안 믿겠군.’
초대받아 온 칼리프 클랜의 본부 궁 중 하나는 손님맞이를 위해 꾸며졌음에도 그 삼엄함을 완전히 덜어내진 못했다.
정확히는 직접 초대 받은 게 아니라,
칼리프 클랜에 초대를 받은 협회의 조사단에 끼워도 되냐는 물음에 긍정을 한 것이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본부 내 분위기는 꽤 경직되어 있었다.
‘대체 뭐길래 이렇게 경계에 힘을 쓰는 거지? 이렇게 경계하면 뭔가 대단한 게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라는 걸 모르진 않을 테고. 위치도 특정될 텐데, 그걸 전부 감수할만한 물건?’
예상이 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류 현이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전생에 가진 입지에 비해서 아는 게 적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류 현이 전면에 떠올라서 대륙별 전선 유지에 참가 요구를 받은 건 인류가 쌓아올린 인프라가 상당부분 파괴된 이후였으니까.
운 좋게 손실되지 않은 종이 문서 같은 경우에는 기회가 닿아서 접할 수 있었으나,
서버에 저장된 정보 같은 경우에는 말 그대로 얄짤 없었다.
칼리프 클랜에서 추측 거리를 줄 리도 없으니 정말 시간만 죽이다 가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럴 거면 왜 와도 된다고 했데?”
“맞아요. 아주 대놓고 경계하려면 대체 왜 오랬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류 현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경계였다.
그의 힘을 다른 이들보다 더 빨리 알게 된 칼리프 클랜 입장에서야 당연한 대응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같이 와도 된다고 수락한 것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협회 조사단과 용잡이 팀 셋 사이를 가르고 있는 인원들은 척 봐도 최정예에 속하는 이들.
‘분위기가 좀 많이 미묘하긴 하네. 설마 이쪽도 수뇌부 내분이라도 있나?’
칼리프 클랜의 성향을 생각하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 호전성을 감안하면 아예 보지 않고 뒤에서 공작을 펼칠지언정,
이런 식으로 들여놓고는 경계한다는 건 내부에서 반발을 사기에도 딱 좋은 일이었다.
호위랍시고 붙어있는 작자들의 태도를 봐도 전혀 수긍한 눈치가 아니었고 말이다.
어떻게 봐도 호위 임무를 이해하고 붙은 자들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적을 대놓고 염탐하는 듯한 모습.
류 현과 그녀들은 그런 호위들의 시선을 무시했지만,
그들은 대놓고 염탐하는 티를 내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 기묘한 대치 아닌 대치는 협회 조사단 중 지휘부가 불려나간 30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 기싸움을 계속 하려는 걸로 봐선 명령이 내려온 수뇌부에 불만이 적잖아 보였다.
‘칼리프 클랜놈들이 고만고만한 놈들도 저 정도 되는 놈들을, 장악도 덜 된 상태에서 이런 자리에 보낼 리가 없는데.’
장악에 가장 신경써야할 인원들이 현장에서 저렇게 대놓고 티를 낸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미 일터.
‘수뇌부 대부분은 우리가 오는데 반대한 건가? 그런데 찬성할 놈이...있긴 한가?’
추론을 쌓아올리려고 해도 이 부분에서 계속 막혔다.
그가 아는 칼리프 클랜은 외부에 거대한 힘이 있다고 살살 웃으면서 협력을 요청해올 놈들이 아니었다.
‘페릭스’와 ‘업화의 아이들’ 때 불려온 것이 정말로 이례적인 일.
그마저도 알 라시드가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성사된 일 아닌가.
알 라시드 본인은 별 티를 안 냈지만 류 현에게도 눈치가 있었다.
‘잠깐만, 알 라시드? 이번에도 그 치 짓인가?’
원흉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속이 편해지진 않았다.
알 라시드는 그에게 있어서도 종잡기 힘든 괴짜중 하나였으니까.
아는 거라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자파르 알 사디크를 대신해서 목숨을 던질 정도로 충성심이 있다는 것 정도.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요 전에 불려왔을 때도 협회의 중재가 있었음에도 의외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괜히 응했나. 마음만 급해서는. 쯧.’
스스로의 판단력에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야야, 너희는 왜 손님 올 때마다 얼굴이 그 모양이 되냐? 가, 가. 이제부턴 내가 맡을 테니까. 어, 핫산 아재한테도 말해뒀으니 걱정 마라.”
호위라고 부르고 인간 벽이라고 불러도 될 이들을 해치고 알 라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위 인력을 흩어놓듯 물려버린 그는 넉살 좋게 류 현이 앉아있던 소파에 털썩 주져앉았다.
류 현은 자리를 비켜주는 것도 잊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기에 충분한 몰골이기도 했다.
알 라시드의 오른쪽 광대에서 왼쪽으로 턱 끝까지 가로지르는 상처와 머리에 감긴 붕대는 아직도 핏물이 조금씩 배어나오고 있었다.
“응? 아, 이거? 생각보다 잘 안 낫네. 일주일 째던가?”
‘일주일?’
류 현은 표정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날짜 계산을 해보았다.
일주일 전이라면 마람 압둘아지드가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물러나 귀국길에 오르기 바로 전날이다.
칼리프 클랜 내에서 이인자를 자칭해도 문제없을 알 라시드가 저런 부상을 입을 정도의 사건이라면 충분히 귀국의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의문이라면 왜 이런 정보를 외부인인 자신에게 나불거리고 있냐는 것.
“자리를 좀 옮겼으면 하는데...괜찮겠어?”
“그러지요.”
“좋아, 여기보단 훨씬 나을 거야. 쟤들은 영 손님 맞이하는데 소질이 없거든. 하잘, 준비 끝난 거 맞지?”
“두 분이 쉬실 공간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뒤늦게 알 라시드를 따라 들어온 구릿빛 피부의 부관은 승하와 화련을 한 번 슥 돌아보곤 준비해 온 말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승하는 뚱한 표정으로 화련을 슥 돌아봤고, 화련은 고개를 내저었다.
드물게도 승하가 입 역할을 맡았다.
“우린 됐어. 여기서 받는 대접이 편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갈 거 같지도 않고.”
“그래? 그럼 그러든가. 가자고. 하잘, 넌 쟤들 입단속 좀 하고 와. 꼴 보니까 또 핫산 아저씨한테 쪼르르 달려갈 거 같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알 라시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일행을 선도했다.
손님맞이용 응접실 같은 궁의 뒤뜰로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니 1층짜리 둥근 돔 같은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겉보기와는 조금 괴리가 있어 보이는 첨단 보안 장치에 인증을 마친 알 라시드는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원래는 창고였는데 웬만한 곳보다 여기 방음이 더 훌륭해.”
창고였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안은 꽤 아늑하게 꾸며진 모습이었다.
양탄자가 사방에 걸쳐져있고 쿠션들도 여기저기 놓여있는 모습은 회의용 밀실보다는 휴게실 같은 모습이었다.
알 라시드는 저부터 중간지점에 반쯤 드러누워 셋에게 자리를 권했다.
승하는 좀 떨어진 자리에 발랑 드러누웠고,
화련은 발을 몇 번 굴러보고도 만족 못했는지 돔형 천장을 이리저리 뜯어봤다.
그리곤 이내 류 현을 따라서 자리를 잡았다.
“도청장치는 없던가 보지?”
자신이 초대해놓고 도청 장치의 유무를 묻는 알 라시드에게 화련이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비꼬는 말을 그대로 내뱉진 않았다.
류 현이 그 말을 대신해 주었으니까.
“도청 장치가 달릴 걸 걱정하셔야 할 정돕니까?”
“뭐 대놓고 날 괄시하지는 못하는데, 형씨 불러오는데 꽤 말이 많았었거든.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하고 달았을 확률도 무시 못 하는 거라. 하잘이 일은 잘 해놨나 보네.”
“역시 우리를 불러들이는 건 알 라시드 씨 독단이었군요.”
“독단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우리 영감님이 동의 안했으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외부인을 마음대로 들이겠어? 대놓고 동의를 못 했을 뿐이지.”
“어쨌거나 우리 담당은 알 라시드 씨라는 뜻 아닙니까. 아니면 알 사디크 씨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까?”
“아니, 형씨가 이해하고 있는 게 맞아. 영감님 입장상 그럴 수도 없고. 이것도 정말 한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거라...영감님이라도 외부인한테 이런 소리를 했다는 게 알려주면 좀 많이 곤란해질 테니까. 협상 담당도, 최종 책임자도 내가 맞아.”
“대체 뭐 때문에?”
“우리가 협회한테 헬프 쳤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을 거 아냐? 유니크 아티펙트 때문이야.”
류 현은 기쁨보다는 곤란함을 먼저 느꼈다.
‘그것’이 류 현이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네임드 몹일 가능성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알 라시드는 류 현이 깊이 생각할 시간을 주기 싫은 사람처럼 몰아붙이듯이 계속 했다.
“임시로 붙여놓은 이름은 ‘드라우프니르’. 우리가 아니, 내가 형씨를 불러들인 이유야. 이 물건을 지켜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