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탐식마(貪食魔)
‘검술이라고? 기술을 따라잡아?’
류 현도 선뜻 반응하기 어려운,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괴수는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스펙으로 인간을 짓누르는 쪽이니까.
예외 중 하나인 리치도 그 압도적인 마법실력과 마력, 내구력을 바탕으로 인간은 꿈도 못 꿀 우악스러운 행사를 일삼는다.
마법 실력에 비해서 전술자체는 단순한 것이다.
현실에 오래 나와 있던 리치라면 마법사들을 저격해서 원정대의 발을 묶는 식의 전술을 구사하긴 한다.
오래 나와 있었던 덕에 어느 정도 판단력이 돌아온 놈에 한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력이 돌아온 놈들도 저런 짓을 하진 못 했다.
괴수가 검술을 쓰고, 그것에 대항하는 인간의 기술을 흡수했다?
그것도 모두 흡수할 때까지 적당히 봐주다가 끝나자마자 쓰러뜨리고 그냥 갔다고?
주변에 있던 다른 팀원들은 건드리지도 않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행보였다.
상황의 유불리를 파악하고 도망가는 것도 서슴치 않는 네임드 몹들조차 약한 인간들을 그냥 두고 간 경우는 없었다.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놈들은 그 살의를 마구 표출하고 다녔다.
류 현에게 거래를 제의한 ‘살바토르’나 ‘비아트리체’마저도 그랬다.
세뇌가 깨지기 전까지는 그 정도 지성을 가진 존재들도 살의를 억누르지 못했으니,
‘정말 네임드 몹인 건가? 이름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건 ‘페릭스’때 이미 증명됐었고. 다른 놈들을 건드리지도 않고 잽싸게 튀었다는 거 보면 세뇌가 깨졌거나...영향을 덜 받아서 판단력이 재기능을 한다는 뜻.’
자연히 범인을 네임드 몹 쪽으로 기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놈이 이동하는 모습이라도 찍힌 cctv영상이 없습니까?”
“아쉽게도 없소. 정확히는 놈의 이동경로로 예상되는 지점에 위치한 cctv영상이 그 시점에 완전히 중단되었지. 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면 접근하는 장면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갑옷에는 방호력 말고도 cctv 마비시키는 능력도 있었다는 의미요.”
윈스턴은 남자의 시체 사진 옆에 사진을 하나 더 쓱 밀어놓았다.
사진 속에는 황금사슬로 이루어진 사슬 갑옷이 세워져있었다.
어깨 부근에 주먹만한 보석이 양 쪽에 하나씩 달려있었는데,
그럼에도 균형이 깨진 듯한 느낌은 어디어도 없었다.
“그 보석들은 방호력과 별 개로 다른 능력을 가진 듯 했소. 하나를 밝혔을 때 촬영 중이던 장비들이 모조리 먹통이 되었지. 그마저 그리 오래 가진 못했지만 말이오.”
“그렇다면...”
“놈이 갑옷을 입고 도망갈 때 오른쪽에 달린 보석이 발광했다더군. 이동 루트로 추측되는 곳의 cctv들이 그 때 동시에 먹통이 된 건 아마 갑옷의 능력 때문 일거요. 확실한 건 그 일대 cctv들을 다 뒤져봐야 하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이게 가장 그럴싸한 설명이지.”
“하지만 그것이 자체적으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 ‘비아트리체’가 그런 능력을 가졌었다고 들었소만은...”
“예, 꽤 광범위하고 스스로 조절도 되는 듯 해서 꼬리를 잡기 전까지는 꽤나 혼란을 겪었었죠. 하지만 그건 아예 전자기기들을 망가뜨리는 쪽이었습니다. cctv고 뭐고 가리질 않았죠.”
“하긴 네임드 몹이 망가뜨리고 말고는 상관할 거 같진 않군. 그럼 네임드 몹일 가능성은 조금 낮춰잡아도 되려나...”
“아뇨, 소집령까지는 아니어도 자체 경계레벨은 최고로 올려놓고 대비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네임드 몹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저도 아니었으면 합니다만...아무래도 증언들만 봐도 보통 괴수는 진작 이탈한 거 같으니 그에 준하는 대비 정도는 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힘의 크기는 솔직히 화이트를 좀 넘어서는 게 최대치 같습니다만...”
“그런데?”
“놈의 행동이 좀 많이 걸리는군요. 마치 저 혼자 정신을 차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신을 차렸다...?”
“증언상으로도 그 팀이 ‘그것’을 당해내지 못할 건 확실해보이지 않습니까? 괴수는 저보다 약한 인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거 알고 계실 텐데요.”
포지션 균형이 무너진 플레이어 팀은 상상 이상으로 무력해진다.
이탈한 전력이 리더와 함께 전열을 맡던 스트라이커라면?
그 순간부터 플레이어 팀은 팀이 아니라 서로를 미끼로 도망치는 패잔병이 된다.
그런 놈들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지나친 놈이니 보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맞았다.
네임드 몹이든 아니든, 한 번에 잡지 못한다면 꽤 큰 피해를 강요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괴수가 인간을 향한 살의를 조절할 수 있다면 플레이어는 괴수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라가 챔피언급만 되도 저보다 두 단계는 놈은 플레이어와 드잡이질이 될 테니까요.”
인간을 향해서 살의를 활활 불태우며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놈도 위협적이긴 하나,
인간이 흉내조차 못 낼 그 날카로운 감각으로 앞뒤를 재면서 싸움을 걸어오는 놈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인간을 향한 맹목적인 살의에 눈이 멀었음에도 사냥꾼 소리를 듣는 놈들도 있었으니까.
“그게 오우거 정도가 되면 아마 헌팅 레벨 300대라도 일대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어지겠죠. 놈들은 지능이 부족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저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다 알지 못하지만...”
류 현은 제 옆머리를 툭툭 쳐보였다.
“여기에 광기에 가까운 살의가 강제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죠. 이미 아시겠지만 놈들 중 일부는 우리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며, 그것이 놈들의 한계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놈들이 더 그 살의 때문에 제약당한 게 많은 듯 하더군요.”
윈스턴은 저도 모르게 빈 컵을 기울였다가 흠칫하고 내려놓았다.
옆에 자리한 웨인은 물을 받아주려다가 윈스턴이 손을 내젖자 그만두었다.
그는 이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류 현이 여태 상대해온 네임드 몹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이는 추론과 결론들을 어디서 듣겠는가?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늘...’
뜻하지 않게 네임드 몹과의 전투라는 사지를 따라다니게 된 웨인 크로이츠에게 들은 바가 없진 않았다.
괴수가 아니라 또 다른 지성체로 보이는 차분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들을 ‘지도’했다던 ‘살바토르’.
죽기 직전,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그리 먼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듣지는 못했지만,
그 태도만 봐도 적이 아니라 뭔가를 타이르듯이 평화로운 분위기로 류 현과 대화를 좀 나누다가 평온하게 소멸한 ‘비아트리체’.
협회도, 윈스턴 본인도 받아들이기 힘든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곤 있었으나,
그에 대한 대처 노선은 정해지지 않은 채 더 급한 일들에 밀려 흐지부지 되었다.
웨인 또한 그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결론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증언 외의 다른 증거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습니다만...현 시점에 모인 정황만 보더라도 놈의 특수성이 거의 네임드 몹에 준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 팀이 어떤 상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협회에 도움을 청할 때 자신들의 공을 높이면 높였지 낮출 일은 없어 보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다른 걸 노릴 정도로 여유로운 상태도 아니었으니, 아마 놀라서 과장된 부분은 있어도 아주 없는 일은 없을 것이오.”
“예, 그러니 더 확실하게 해야 하지요. 정도가 덜하더라도 인간의 기술을 따라하고,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눈앞의 인간을 두고 다른 위협이 없었음에도 도주를 택하는 건 놈이 보통은 아니라는 증겁니다.”
보통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류 현은 네임드 몹이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당장 확실하지도 않은 추론을 가지고 전력을 소모하게 할 수는 없으니 이 정도에 그칠 뿐.
“될 수 있는 한, 두 번째를 만들지 말고 한 번에 잡아야 합니다. 다음번에는 놈이 뭘 배울지 알 수 없으니까요. 검술을 배웠다는 게 거짓이더라도 놈이 그 갑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건 협회에 좋지 못할 테고요.”
“으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류 현이 찌르고 들어오자 윈스턴은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저희가 포위망을 펼치는 걸 도와드리죠. 협회의 전력을 소집만 끝내주시면 한 시간 이내로 포위망을 펼치는 게 가능합니다.”
류 현은 그렇게 말하며 화련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그를 빤히 보고 있던 화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동의를 얻어두었지만, 류 현은 화련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를 본 것이다.
“그리 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그런데...우리가 뭘로 보답해드리면 되겠소? 아무래도 그 갑옷의 지분이 가장 나을 것 같은데...아무래도 당장 빠르게는 힘들고 점진적인 방법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혹시...”
윈스턴의 말에 류 현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저희도 그렇게 급하게 닦달하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여론도 시끄럽고 하니, 상황에 따라 최대 3할 정도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3할이라. 적절하군. 우리가 잘 말해 보리다. 그들도 아주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을 찾아줬는데 그 정도도 내주지 못 하겠다고 버티지는 못할 게요. 그리 되도록 할 거고.”
윈스턴은 그리 말하곤 손을 슥 내밀었다.
류 현은 빼지 않고 바로 그 손을 마주 쥐었다.
‘그리 되도록 할 거다. 라, 생각보다 시원하게 내주는군. 하긴, 기동 실험을 해봤다고 하니 직접 굴리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달았겠지. 그 인간들이 다른 곳이 아니라 협회에 연락을 해서 다행이군. 영국에 신고했었으면 정말로 ‘그걸’ 잡아 죽이고 갑옷 챙겨서 튀었어야 했을 텐데.’
‘그런데 대체 그건 뭐지? 네임드 몹이면 정말로 미국으로 튀어야 하는데...제발 아니어라. 당장은 때려죽여도 삼 주간은 못 싸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