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4화 〉탐식마(貪食魔) (394/429)



〈 394화 〉탐식마(貪食魔)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라비 라자는 손에  보고서를 대충 책상 귀퉁이에 밀어놓고는 오른손으로는 턱을 괴고,
왼손으로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미 일반적인 던전 수준은 벗어났다. 화이트? 아니야. 다른 괴수 없이 던전 안에 보스 혼자만 있어도 저것보단 못할 거다.’

최근에 자신을 제친 초신성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곤 있지만,
경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을 가질 정도로  없이 많은 경험들로 벼려진 자신의 감이,
그 타르 덩어리 같은 것이 기존 던전 체계를 벗어난 무언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감이 없더라도 이 보고서 더미만 봐도 어지간한 이들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챌 테지만.

‘점점 더 포위망을 가지고 노는  능숙해지고 있군. 어디로 향하면 어느 곳의 경계가 강화되고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다는 걸 아는 것처럼...’

포위망을 인식하면 산으로 숨어들어 북쪽으로 향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상대적으로 얇아진 남쪽방향을 뚫는다.
그 패턴을 인지하고 반대로 움직이면 아예 땅굴을 파서 포위망 밑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놈은 그런 식으로 연방정부와 지역지주들의 기적적으로 협동해서 구축한 포위망을 희롱하고 다녔다.
사망자가 아직 세 자리 수에 이르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  만 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가장 교활한 오우거나 가장 겁 많은 리치도 이렇진 못했어.’

경험의 풍부함을 자신하는 라비 라자에게는, 그의 조국 인도 입장에서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현실에서 가장 많은 상위 괴수를 상대해본 플레이어라는 타이틀이었다.

얼마 전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비롯한 용잡이 팀원들에게 순위가 밀리긴 했지만,
아직까진 가장 다양한 경우를 겪어본 건 자신이 맞다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인간을 잔뜩 잡아먹고 등급이 올라서 군락을 이룬 고리 원숭이들,
정글의 생태계에 적응해, 야생동물의 몰아 플레이어들을 교란시키고 사냥하던 오우거,
성을 지상이 아니라 연안에 지어놓고 농성하던 리치 등 협회 데이터 베이스에도 없는 기괴한 경우를 경험해봤다.


소위 현대화기의 도움조차 거의 없이 자신을 따르는 플레이어 전력만으로 말이다.


현실에 오래 노출되었거나, 인간을 너무 잡아먹어서 변질되었든 지능이 상승한 괴수들을 잡아본 경험으로 판단할 때,
 검은 덩어리는 몸뚱이 근처에 이름이 떠있지 않음에도 네임드 몹이라는 천외천의 존재가 자연히 떠오를 정도였다.

둘 간의 힘의 차이가 극명하다는 것을 알고도 말이다.
곧 떨쳐내게 되었지만.


‘힘의 차이도 그렇고...호전성이나 행동 패턴을 볼 때 네임드 몹은 아니겠지. 그보단 다른 카테고리의 괴수가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놈은 학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 추측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괴수는 인도 측 플레이어들과 부딪힐 때마다 기술적으로나, 힘적으로나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검은 덩어리에게 기술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지만,
라비 라자는 두 번째 전투에서 보았던 그 기술을 똑똑히 기억했다.


 맘대로 팽창하고 수축하는 촉수로 펼친 것이지만 그건 분명히 검술이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수 십 개의 검과 창의 날을 한 순간에 접해서 휙 뒤집어 버린 것인지는 보고도 파악이  되었지만,
고도의 검술이라는 것만큼 분명했다.

라비 라자 본인도 덤벼들었다가  합만에 ‘파슈파타’를 놓칠  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아직 ‘파슈파타’의 검기를 이겨낼 수 없었던 놈은 촉수가 갈라진 것을 보곤 기겁하고 도망갔고,
그것이 엿새  일이었다.

이레 동안 그냥 촉수를 빠르게 쏘아내는 것에서 그런 검술을 터득하기까지 한 놈이었으니,
지금은 대체 어느 정도 성장했을지 감이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파슈파타’가 없었다면 진작 역부족임을 선언하고 인도 내 전력을 끌어 모으는데 신경을 썼을 테지.

지금이라고 그러지 않고 있는  아니었지만,
정말 그랬다면 더 많은 것을 내걸고, 국경을 비워두는 한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지금 그러지 않고 있다고 해서 그들만의 힘으로 넉넉하게 해결할  있는 일이냐면,
그건 또 아니라는  문제였다.

국경 수비대 외의 힘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끌어들이기엔 댈 수 있는 핑계가 없었다.

 검은 덩어리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니 지금은 영역 다툼 같은 건 그만두고 협력하자?


아마 그의 진의를 의심하는 놈들이 더 많을 터였다.
지금 협력하고 있는 히마찰프라데시 주를 장악하고 있는 지주들과 군벌놈들이 협력하고 있는 건,
놈이 첫 날에 관사에 뛰어들어서 분탕질을 쳤기 때문이었다.
그 날 관사에 들렸던 지주, 군벌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대가로 현대 병기로 중무장한 자신의 사병들이 갈려나가는 것을 보고 아주 기겁을 하며 플레이어 병력들을 소집했다.

마침 라비 라자가 보낸 요청서가 도착한 덕에 극적으로 지역적인 포위망이 조성된 것이다.
제대로  성과는 한 번도 내지 못하고 놈의 경험치가 되어주고 있는 꼴이 되긴 했지만.

‘화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


라비 라자는 ‘그것’과 처음으로 충돌한 날 ‘파슈파타’를 통해서 느껴진 반발력을 기억했다.
화이트 급 보스몹도 두부처럼 썰어버리던 검기로도 놈을 완전히  쪽 내지 못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나를 제외한  지역의 모든 플레이어들의 화력을 때려박아도 놈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광오하다고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라비 라자의 생각은 확고했다.

지금의 화력으로는 부족하다.
당장 저지조차 제대로 하질 못해서 자신이 소식을 듣고 뛰어가면 놈이 경험치만 챙겨서 도망갔다는 소식만 듣고 있질 않는가.


말이 포위망이지이쯤 되면 피해 전파 연락망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원래도 상위 괴수를 잡는데는 그저그런 실력의 100명 보다,
상위 플레이어 한 두 명이 더 나은 법이었다.

괴수에겐 쉴드와 플레이어와는 비교를 거부하는 어마어마한 스펙이 존재했으니까.
저렇게 덩치도 작고, 지능도 높으며, 기술까지 겸비한 놈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놈을 질이 아닌 양으로 찍어 누르려면 압도적인 머릿수가 필요했다.

인도 내에도 헌팅 레벨 300대의 최상위 플레이어가 없는  아니지만,
그런 비싼 몸들이 순순히 움직여 줄 리가 없다.
그들이 원해도 그들의 주인이 보내주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기껏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아도 이런 저런 일정 핑계로 미루겠지.


그럴 바에야 조국이 자랑하는 물량이라는 힘으로 밀어버리는 게 나았다.
네임드 몹을 연상시킬 정도로 이질적인 존재긴 했지만 힘의 크기 자체가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질을 버리고 양으로 승부하는  쉽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운 좋게 지역 포위망을 펼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피를 보지 않은 인접 지역 지주들은 협력 요청에 콧방귀도  뀔게 분명했다.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연합을 꾸리면 이간질을 획책하거나, 어디서 되도 않는 헛소리로 병력을 끌어모으냐며 반역 운운하고도 남을 것이고.

‘블랙박스라도 달고 다니라고 해야 하는가.’


그런 놈들에게 변명해야할 거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암담하기까지 했지만 어쩌겠는가.


‘...유인이라도 가능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그는 책상 아래에 있는 반투명한 푸른 구체를 내려다 봤다.

‘파슈파타’를 얻은 후에 ‘마탑’에 발주를 넣었다가,
‘파슈파타’를 담고 있질 못해서 애물단지로 썩던 금고에는,
‘그것’의 일부분이 보관되어 있었다.

벌써 잘라낸 지 2주째가 되어 가는데도 썩기는커녕,
아직도 ‘파슈파타’의 검기 외에는 칼끝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당연히 분해해서 연구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분해가 가능하더라도 당장은 그래선 안 되겠지만.

라비 라자가 보기에,
놈은 자신이 버리고 내뺀 일부분을 찾으려고 이 주변을 배회하는 중이었으니까.

‘금고를 옮겼을 때 놈은 방향을 반대방향으로 틀었다. 경로의 포위를 강화하자 내빼긴 했지만 결국 다시 나타났지.’
‘계속 간을 보는 것처럼 굴고 있긴 하지만 놈은 확신이 서면 이쪽으로 온다.’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현장에 출동할 때 조각을 들고 나가보기까지 했다.
놈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지만,
라비 라자는  행동을 보고 난 뒤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인간의 강약을 가늠해서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괴수는 그도 처음이었으니까.
그것도 그렇게 찾으려고 애쓰던  일부분을 눈앞에 두고서도 말이다.

‘놈이 확신을 얻기 전에 화력을 모아야 해. 이걸 함정으로 쓰는 건 한 번뿐이어야 한다. 그 뒤로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

문제는 그 화력을 어떻게 끌어모을 것인가 하는 것.
라비 라자가 인도 플레이어들의 우상인  맞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만한 화력을 끌어모으기에는 세상이 녹록치 않았다.

만약 그의 부름에 응해주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더라도 주변의 견제가 문제다.


결국 그 욕심 많고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 못하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고깃덩이 필요했다.

‘중앙이나 연방이나 할 것 없이 ‘신의 방패’ 확보에 혈안이 되어있다고 했지.’

라비 라자는 제 손안의 대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생 제물을 탐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조차 매료시킨 이 훌륭한 검은,
그 검성에게서도 훌륭하다는 말을 뽑아내었다.

그리고  이전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이곳까지 날아오게 만들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해낼 수 있는 일 같아 보였으나,
그렇다고 요양 중이라던 이들의 엉덩이가 가벼울 리는 없었다.


아마 이것으로 ‘신의 방패’에 대한 교섭을 이끌어내고 인도 내의 독점권을 얻어내면,
이 상황을 손쉽게 타개할 수 있을 테지.

그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더러운 꼴 볼일이 확 줄어들 터였다.

“......”


‘파슈파타’를 얻는 과정에서,
형제 같은 동료를 잃고,
본인은 은퇴 정도가 아니라 좌반신에 장애가 생길지 모르는 부상을 당했었다.

당시 ‘파슈파타’의 주인이었던 구울 나이트의 검격을 받은 왼팔을 중심으로 좌반신의 마력이 말 그대로 폭주했고,
그 때문에 신경계가 찢겨나갔었다.


재생뿌리로 왼팔을 재생시키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다가대고 기력이 뭉텅 깎여나가고,
뿌리 내릴  신경계가 뒤집히는 듯한 통증을 유발하는 재생뿌리를 박았다가는 점잖은 자살소리도 듣지 못할 터.

지금은 재생뿌리 생각을 해도 될 정도로 안정되긴 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아쉬웠다.


심각한 부상을 ‘파슈파타’의 권능으로 억누른 채로 외팔만으로  마람 압둘아지드를 막을 수 있었다.

그 때 마녀가 이상할 정도로 몸을 사린 건 스스로도 알고 있으나 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기대를 품을만한 상황 아닌가.


그런데 몸이 낫자마자 이 훌륭한 검을 몸에서 떼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는 해야 한다고 외치는데 가슴은 대책 없이  더 기다려보자고 하는 내적 괴리가 일어난 것이다.


“후우...”
‘...일단 거래 조건이 무엇인지부터 확인을 하자.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것도 그렇고, ‘파슈파타’를 내민다고 무조건 거래가 성립될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교섭 방향은 그걸 듣고 나서 정해도 된다.’

라비 라자는 그대로 방문을 열고 나서서 제 비서를 자청하는 여자를 찾았다.
정신없이 달려오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발견한 의문점을 다시 되씹었다.

‘정말 왜 아무런 연락이 없었던 거지? ‘신의 방패’를 만들어 낸 자가 신검이라도 연단해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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