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3화 〉탐식마(貪食魔) (393/429)



〈 393화 〉탐식마(貪食魔)

라비 라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차례 전투가 마무리 된 후였다.


엉거주춤한 포위망은 안내자가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케 했다.


빠르게 주변을 훑은 그는  짧은 시간에 세 명이 당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 가까운 거리에 저런 것이 나타났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인도의 던전 방어 체계가 개판인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기지 주변은 철저하게 던전을 처리하고 다녔다.


‘파슈파타’를 얻은 뒤로는 라비 라자 본인이 조금 떨어져있는 곳도 빠르게 다녀오는 식으로 처리를 해왔다.
칼리프 클랜이 마람 압둘아지드를 보낸 뒤로는 후방으로 물러나서 재정비의 시간도 마음대로 갖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조금이라도 전력을 강화를 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 봤자 이 산간지대 중에서도 하루거리 것들만 직접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상위 괴수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수색대원 하나가 그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서 고개를 푹 숙였다.
가만 두면 땅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라,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대장.”
“당한  셋이 전부인가?”
“아닙니다. 발견한 둘은 먼저 호송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둘이 팔 다리 중 하나를 절단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됐다. 그건 협회에 재생뿌리를 받으면 돼. 너는 부상자들을 챙겨서 기지로 돌아가있거라. 여긴 내가 정리하도록 하마. 특이사항이 있는가?”
“...이쪽이 공격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않습니다. 실려  둘도 반격 당해서 당한 겁니다. 반격 방법은...제가 부족해 제대로 보지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참고하지.”

한 번  고개를 숙이곤 수색대원들을 수습해서 떠나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라비 라자는,
마음속으로 세던 숫자가 200을 넘자 자신이 끌고 온 병력들이 인계받아 포위한 공터 중앙을 슥 돌아봤다.

그곳에는 타원형의 타르덩어리 같은 것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보다는 약간 더 반질반질하고 유연해 보였지만 이상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라비 라자는 저것에서 어떠한 생기도 느낄 수가 없으니까.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정도 되는 플레이어라면 핵이 전투를 수행하는 의체와 분리되어 있는 식의  환수형 괴수를 보고 이런 감상을 품진 않겠지만,
라비 라자는 달랐다.

그는 눈보숭이를 시작으로  근래에 발견된 사막 귀신에 이르는 반 환수형 괴수의 본체를 느낌만으로 찾아낼 수 있는 자였다.
그 정확도는 백발백중.


여태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반 환수형 괴수의 핵을 찾아내는,
 정확히는 괴수의 생기를 느끼는 그의 재주는 쟁쟁한 최상위권 플레이어 자리를 지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지금이야 심하게 굴러 떨어진 느낌이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에게는 공략 난이도만 더럽게 높은  환수형 괴수는 그에겐 손쉬운 사냥감이었으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그 재주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은 물론 사지 멀쩡하게 연명할  있는 구명줄이기도 했다.

군을 대동하고 대규모로 속 편하게 괴수 토벌을 해 본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포위된 상태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필사적으로 활로를 뚫어낸 경험이 월등하게 많았다.
그 무수한 사선을 오가면서도 그의 감은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라비 라자가  기묘한 부정형 괴수로 추정되는 무언가에게서 위화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핵이 의체 밖에 있다면 외부에서, 핵이 안에 깃든 형태라면 저 검은 덩어리에게서 느껴져야할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으니까.
부상자들을 호송해 간 수색대원들을 보지 못했다면 저것이 괴수라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어떤 도로 포장업자가 흘리고 간 것이라고 생각 했겠지.

무엇보다 ‘저것’의 반응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침묵.
수  명의 인간을 앞두고 있는 괴수가 보일 수 있는 반응으로 이 보다 이상한 것이 있을까.

세상이 미쳐 돌아가서 ‘인간 노예’를 부리는 괴수가 나타날 지경이었지만,
그마저도 괴수가 가진 인간에 대한 적개심의 연장선상 안에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듣자하니 노동력으로 좀 굴리다가 툭하면 잡아먹어버리는 게 일상이었던  같으니까.


말을 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괴수가 관제탑으로서 억제했다면 정말 그렇게 까지 말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니긴 했다.
어디까지나 실제 사례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저것’은 어떤 것도 아니었다.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핍박하는 것이나,
인지 범위 내의 인간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고 무인지대로 떠나는 것도,
더 많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시체를 일으키는 일 같은 것에 더 집중한 것도 아니었다.

인간에게 포위된 상황임에도 무정물처럼 그 자리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하면 반격은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겪고 있지만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현실.


“물러나라.”

그리고  현실을 확인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라비 라자는 영 꺼림칙 주변을 뒤로 물리며 앞으로 나섰다.


꺼림칙한 것이니 ‘파슈파타’를 쥐고 있는 자신이 나서는 것이 맞았다.
마람 압둘아지드도 두려워한 이 검의 검기라면 대부분의 일은 어떻게든 될 테니까.


이곳으로 달려오기 직전에 네임드 몹의 존재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었기에 오는 내내 긴장도를 높여왔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주하게 된 저 타르 덩어리 같은 것의 위로는 어떤 문자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신의 방패’에 대한 정보는 빼냈지만,
미국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극비 정보인 두 마리의 네임드 몹 드래곤들에 대한 정보는 알지 못하는 라비 라자는 천천히 검은 덩어리를 향해 접근했다.


검의 범위 안에 들어오자 그는 한 번 숨을 고를 시간을 가진 후에,

쉭! 살의 같은 걸 내비치는 일 없이 무감정하고 빠르게 ‘파슈파타’를 내질렀다.
찌르는 것과 동시에 검신 위로 타오르기 시작한 마력검이 뻔한 결말을 보여줄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러나,

카앙! 쩌어- 그의 시야 밖에서 채찍처럼 휘둘러져 온 검은 촉수가 ‘파슈파타’를 튕겨내자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놀람보다는 자신의 찌르기를 튕겨낸 검은 뭔가를 쫓기 위해서였다.
순식간에 수축한 그것을 찾아내는데 실패한 그는 뒤로 펄쩍 뛰며 뒤늦게 반응해 달려들려던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끼어들지 마라! 포위를 뒤로 더 물려라!”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두 번째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끼어들 기세 던 인원들이 이를 악물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비 라자는 아려오는 손아귀 감각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블랙...아니다. 무조건 화이트이다. 화이트의 던전 보스도 저런 놈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밴쉬도 존재하는 판에...분명히 파고드는 느낌이 있었는데 저리 멀쩡한 걸 보면...무생물 계통인건가? 핵이 있나?  감각에도 안 걸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멀리서도...’

 때였다.
여태 침묵하고 있었던 게 거짓말처럼 검은 덩어리가 움직였다.

라비 라자가 그것에 반응한 건 정말 행운이 겹친 덕분이었다.
물방울 같은 형상이 살짝 일그러지며 돌기 같은 것이 돌출되는가 싶더니,

그대로 음속의 벽을 뚫고 내찔러 들어왔다.
라비 라자는 오른발목의 힘만으로 제 거구를 휙 돌렸다.


쒹! 뒤늦게 쫓아온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그는  힘을 다 해 검을 올려 그었다.
내뻗어지기 무섭게 수축하려던 촉수가 이번에는 검기를 버티지 못하고 손바닥 정도 길이가 툭 끊어졌다.


‘먹힌다! 물리적인 공격만 할 줄 아는 놈이다!’

 판단이 서자마자 라비 라자는 땅을 박찼다. 끊어진 촉수를 회수하려고 다시 촉수를 내뻗고 있던 검은 덩어리는 반박자 늦게 반응했다.

콰득! 쒸링! 정면에서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들어왔어도 위협이 될 만한 쾌속의 사선 베기가 이번에는 땅을 뚫고 올라왔다.
온 신경을 주변 공기의 움직임에 쏟고 있던 라비 라자는 정말 한 끝 차이로 그것을 피해 가슴피부가 살짝 갈라지는데 그쳤다.

상처에 피가 맺히기도 전에 그는  공격에 대한 보답을 내어주었다.


콰긱! 예상한 손맛은 아니었다.

‘파슈파타’의 도움을 받은 마력검이 블랙이고, 화이트고 던전 보스들을 두부 자르듯이 갈라버리던 것을 생각하면,
손에 전해지는 감각만으로도 이 놈이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칼끝이라도 들어간 순간 그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라비 라자는  눈에 광망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마력검에 마력을 쏟아 부으며 검을 당겼다.

츠으- 그가 힘주어 당기는 대로 검은 덩어리가 서서히 갈라졌다.
무생물 계통 의체가 아닐까 하는 예측이 무색하게,
갈라진 단면에서 피처럼 검은 물이 울컥울컥 솟아났다.


검은 동체와 너무 똑같은 색이라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괴수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실제로 타격이 심대한 지 놈은 촉수를 뻗으려다 말고 부르르 떨다가 돌출된 부위가 다시 오므라들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라비 라자는 더 이상 파고들질 않는 검을 뽑아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비명조차 없이 톱질을 받아들이고 있던 검은 덩어리를 향해 결정타를 내려치려는 순간,


푸확! 퓨웅!
검은 덩어리가 몸으로 흐르고 있던 피같은 액체를 훅 뿜어내 연막을 쳤다.

콰직! 뒤늦게 내려친 검이 도달했지만 이미 10미터는 물러난 것에게 닿게  재주는 라비 라자에겐 없었다.

라비 라자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마법사들이 위치한 곳을 돌아봤으나,
파캉! “끄윽...”

검은 덩어리가 그저 부딪히는 것만으로 쳐둔 결계가 무너지자 가슴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마법사들은 그의 기대를 아주 빠르게 배신했다.

검은 덩어리는 그를 공격했을 때처럼 촉수를 고속으로 내쏘았다가 수축하는 식으로 벌써 저만치 달아난 상태였다.

“...방심한  나였나.”

후회에 찬 말을 내뱉은 그는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달아난 검은 덩어리 체적의 1/3가량은 되어 보이는 덩어리가 그의 행동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증명해주고 있었으나 입맛이 썼다.

‘이라니 일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저것까지 추적해야할 판이군. 그래도 손상이  보이니 연방 정부에서 처리해주면 좋겠지만...’


그럴  있을  같지가 않았다.
라비 라자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하들을 느끼고는 한 숨을 애써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