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2화 〉탐식마(貪食魔) (392/429)



〈 392화 〉탐식마(貪食魔)

“...오늘도 허탕인가.”
“죄송합니다.”


시선을 올리지 않아도 정수리가 보이게 허리를 숙인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비 라자는 손에 쥔 보고서들을 내려놓고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지금까지 수색이 끊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할 만하다. 아르가왈,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
“허나...”
“계속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느라 지친 것 같구나. 내일까지는 아무  말고  쉬고 오거라. 내 때가 되면 다시 부를 테니.”


손수 몸을 일으켜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라비 라자에게 거역할 수 없었던 라자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보이곤 방을 떠났다.


여자의 기척이 방안의 소리를 못 들을 정도로 멀어져가자 라비 라자는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죽은 겐가? 이라니?’


무심한 손길로 보고서를 들춰보지만 그것들에게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수색 현황 보고서 사이사이 끼어있는 연방 정부나 지역지주들의 항의 서한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고.


‘네가 그토록 지키고 하고 싶었던 자들은 네가 어찌됐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아는 자들은 우리를 견제하기 바쁘구나.’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다시 보고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항의서한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만약 흉수가 국내에 있다면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때에 플레이어 전력에 손실이 왔다면 무슨 움직임이든 보일 수밖에 없다.

그가 아는 모먼 이라니라는 사내는 자신을 치우려고 드는 자들에게 그 정도의 타격은 줄 수 있는 자였으니까.

“.....”


불행히도,
라비 라자가 모든 문서를 훑어보는 동안 단서 비슷한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항의 서한은 여전히 자기네들의, 코앞의 이익만 쫓는 멍청한 논리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모먼 이라니라는,
조국을 위해서 칼리프 클랜과의 끝없는 싸움에 몸을 던지지만 않았다면 끝없는 영광을 쟁취했을 사내 자체를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적어도 이 근처 연방정부가 건드린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그렇다면 정말로  마녀가 대역을 꾸미고 이곳까지 침투해온 것인가? 이라니가 하산하는 시점을 알아내고?’


자신이 생각해도 비약이 심각한 추리였으나,
단서라고는 부서진 아티펙트 조각이 전부인 마당에 이렇게라도 추리를 해야만 뭐라도 붙잡을 수 있을 터였다.

그 조차도 금방 스스로 부정하게 되었지만.

‘...아니야, 이라니의 하산 시점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깊숙이 간자를 심었다면 그것으로 그칠 리가 없지.’

라비 라자의 시선은 뒤편에 세워둔 대검, ‘파슈파타’로 향했다.
어떻게  굴려도 정성껏 손질한  마냥 최상의 상태가 유지되는 대검은 처음 얻었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깊숙이 간자를 심었다면 ‘파슈파타’를 노렸어야 정상이다. 그 마녀도 저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심상찮은 물건임은 알테니.’


마녀, 마람 압둘아지드의 반응만 봐도 그랬다.
 앞을 가로막는 국경 수비대를 닥치는 대로  손으로 찢어발기던  마녀도 ‘파슈파타’의 검기 앞에서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람의 손가락  개를 잘라내고,
더 나아가 치명상을 입힐  있는 있는 기회를 놓친 뼈아픈 실책이었지만,
그 뒤로 마람 압둘아지드가 라비 라자가 있는 전장에서는 예전처럼 마구 날뛰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주 성과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칼리프 클랜이 심어놓은 간자가 전한 정보로 모먼 이라니가 당했다는 추리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 간자가 있다면,


모먼 이라니 보다 훨씬, 아니 라비 라자 본인도 그보다 무게감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물건을 빼낼 궁리를 하는 게 더 맞았으니까.

그런 정보를 빼돌릴  있다면 간부에 준하는 자리를 꿰찼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파슈파타’로 드래곤 슬레이어와 거래 시도를 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터였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미련 없다는 듯이 돌아갔지만 아주 부정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도.


언제 지분이 팔릴지도 모르고,
궁지에 몰면 아예 팔아 치워버릴 지도 모르는 보물의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이라니부터 치워서 경계심을 심어주는 건 어떻게 봐도 악수였다.


라비 라자가 아는 칼리프 클랜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멍청하게 굴어서 이득이 되는 경우에만 멍청한 척으로 상대를 몰아넣는 영악한 놈들이었지.

‘칼리프 클랜도 아니라면...결국 원점인가. 그래도 연방정부는 빼놓는 게 맞겠어. 그놈들이 이라니를 치고 이렇게까지 티가  날수는 없으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연방 정부뿐만 아니라, 해방 연대나 반 카스트 연합도 이라니를 이렇게 조용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라니보다 약간 쳐지는 놈들이 다수로 덤벼들어서 그를 처리했다기에는 현장이 너무 깔끔했다.


수색 인원들은 그 때문에 이라니의 생존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라비 라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이라니가 살아있다면 지난 일주일 내로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운신이 여의치 않다면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신호를 보냈을 것이고, 아니면 직접 찾아왔을 터.


‘마람 압둘아지드의 명으로 병력을 물린 것을 보면 그쪽도 ‘신의 방패’의 존재를 알았거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은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는 명을 받았겠지.’

이라니의 수색이 시작될 무렵 칼리프 클랜과 파키스탄 측의 플레이어로 구성된 유격대가 스리슬쩍 뒤로 물러났으니 움직이기 더 용이 할 터였다.


소식을 접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국경 수비대가 경계 병력을 빼서 수색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람 압둘아지드가 이 국경지대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모든 지휘관들이 경계 병력 유지에 편집증적일 정도로 집착했으니까.

여태 수색 작업을 지속할  있었던 것도 저들이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한을 통해서 계속 헛소리나 하고 있는 연방 정부에 손을 벌렸어야 했을 테지.


여태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살아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의미없는 희망고문에 불과했다.

‘마람 압둘아지드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중국은 한창 내부 힘 싸움으로 시끄럽고, 러시아는 이라니 수준의 플레이어가 좀 있지만 그를 찍어 누를 수준은 없다.’


다른 주변 국가들은 더 엉망이다.


서북쪽은 아프가니스탄이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리게 해준 그 지형 때문에 파악되지 못한 던전에서 튀어나온 상위 괴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 쳐대는 통에 멀쩡한 나라가 없을 지경이다.
동쪽의 아세안 연합도 멀쩡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
첫 네임드 몹인 본 드래곤에게 도시 하나가 날아간 필리핀이 도움은커녕, 이권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된 동맹들에게 절연 선언하기 직전이라 분위기가 흉흉하기 그지없다.


이 상황에서 굳이 인도 내에서 애매한 지지를 받으며 국경을 지키고 있는 라비 라자의 휘하를 건드릴 만한 국가는 없다.
세상이 ‘파슈파타’를 모르고 있는  시점에서 보면 건드려봐야  얻을 것도 딱히 없으니까.


‘조건만 따지면 굳이 이라니를 건드릴 놈은 없다. 하지만 이라니가 살해당한 건 현실이다. 그것도 아주 압도적으로 눌린 탓에 저항조차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겠지.’

순위에서 지운 마람 압둘아지드가 다시 떠오를 정도로 조건에 맞는 인간이 없었다.

아주 잠깐,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프 클랜이 물러난 타이밍이 수색을 시작한 때와 맞물렸다는 사실을 의심도 해보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만에 하나 칼리프 클랜이 간부급 간자를 박아놓았음에도 ‘파슈파타’가 아니라 이라니를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면 저렇게 입을 다물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이유가 없다.
사방으로 떠들어대며 수비대를 몰아치는 게 훨씬 그들다웠다.
수비대 내에서 이라니의 비중을 생각하면,
그렇게 떠들어대며 전력을 집중해 몰아친다고 가정했을 때,
스스로도 제대로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으니까.

수비대가 무너지고 마람 압둘아지드가 저를 받쳐줄 인원을 끌고 닥쳐든다면,
라비 라자는 ‘파슈파타’를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마람 압둘아지드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파슈파타’의 힘이었지,
일신의 기량으로만 따지면  마녀보다 쳐지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해방전선이나 연합도 이라니를 처리한 걸 떠들어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놈들은 내 존재 때문에 자신들이 가려져서 대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놈들이니. 내 평판을 깎을 수 있는 일을 마다할 리가 없는데...그렇지 않아도 드래곤 슬레이어와 접촉한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내게 항의해오지 않았나.’
‘잠깐, 드래곤 슬레이어?’
‘...내가 멍청했군. 멍청했어!  인간으로 흉수를 한정 지은 것이지?’


인도는 빈말로도  괴수 방어체계가 좋은 편에 속하진 않았다.
내분으로 플레이어 전력을 여기저기 낭비하는데다가,
중앙정부는 이제 뉴델리 밖으로는 힘을 투사하기도 어려워졌으니까.

실제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맞이했던 정글지대같은 곳은 블랙던전에서 뛰쳐나온 괴수들이 활보해서 무인지대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 말은 갑자기 어마어마한 놈이 등장해도 피해 규모가 갑자기 도시 하나 정도로 뛰지 않는 이상 존재 자체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뜻도 되었다.
작은 마을 같은 경우는 괴수 피해가 일상이니, 연방 정부에서도 사후 조사관을 파견할 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까.


‘네임드 몹인가? 그렇다면 이건 수비대의 문제가 아니라 인도 전역의...아니야, 미국의 화룡 같은 것이 등장한 것일 수도 있다. 괜히 벌써부터 혼란을 일으킬 필요는...’

“대장!”

그의 고뇌를 끊은 것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 간부였다.
방금 막 수색대의 현장 지위를 하러 떠난 이.

라비 라자의 시선에 자신을 향하자 남자는 헐떡거리는 호흡보다 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어조로 외쳤다.

“와 보셔야 할  같습니다. 저희로는 역부족입니다!”
“마녀가 돌아왔나?”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마람 압둘아지드의 존재였다. 이 지역의 플레이어라면 만날  있는 최악의 재앙이  여자였으니까.


“아닙니다! 마녀는 아니고 괴수 같은데...”
“괴수?”

되물어 봐도 간부는 우물쭈물할  다른 정보를 내놓지 못했다.
라비 라자는 한숨을 삼키며 대검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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