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갑작스럽게 세아를 대동하겠다는 선언을 해서 연방 공무원들의 비탄에 몰아넣고 있던 그 순간,
저 멀리 인도 - 파키스탄의 국경에 인접한 달후지라는 곳에서 라비 라자는 새벽을 불사 지르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도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고위 플레이어가 거의 인간을 초월한 체력과 집중력을 가진 것은 맞았지만,
인간을 완전히 초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더욱이,
라비 라자 같은 처지라면 휴식을 취하는데도 신경을 써야하는 게 맞았다.
그는 벌써 반 년 가량 이 곳에 발이 묶여 계속해서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국경 분쟁에 끼어든 칼리프 클랜 때문이었다.
보급이 충분한 플레이어가 활약 못할 전장이 어디있겠냐만은,
기갑전력의 기동과 시야가 한정되는 산간에서 플레이어 전력의 위력은 극대화 되었고,
질은 물론이고 그 숫자에서도 칼리프 클랜의 도움을 받는 파키스탄 측에 밀리는 인도 입장에서는 꺼내들 카드가 극히 제한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라비 라자는 이곳을 탈환하러 왔다가 완전히 발이 묶인 처지가 되었다.
전에도 한 번 뚫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우면 정부는 물론이고 반 정부파까지 아주 난리를 쳤으니까.
이젠 그들의 말을 무시하더라도 나갈 수 없는 처지였지만.
칼리프 클랜 측에서 마람 압둘아지드를 파견한 뒤로는 놈들이 뒤로 물러나도 마음 편히 쉴수도 없게 된 것이다.
마람 그 괴물 같은 여자는 숙련된 팀이든, 막 구성된 신참팀이든 신경 쓰지 않고 마구 찢어발겼으니까.
라비 라자 본인 말고는 그 괴물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것이 대검을 휘두르며 지금 새벽을 불사르고 있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가 새벽 수련을 일과로 껴 넣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신의 방패’ 협상을 위해서 용잡이 팀의 세 명이 인도를 방문한 이후,
라비 라자는 기량을 수면시간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기량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해오던 수련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수면 시간도 줄였다.
그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우려를 표했으나,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꼬일 때로 꼬인 조국의 상황과 그것을 타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체념에 찌들어 있던 정신이,
충격적인 무위를 목도하고 확 깬 것이다.
라비 라자는 줄어든 수면 시간 때문에 쌓인 약간의 피로감도 기껍게 생각하며 무겁게 내려치던 ‘파슈파타’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의장용 검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가 쥐어본 어떤 검보다도 실전에 적합한 검.
자신의 왼팔과 왼팔보다 더 소중한 동료를 희생해서 얻은 아티펙트.
야속하게도 놈은 검성의 손에서 훨씬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검성과 드래곤 슬레이어 간의 대화로 유추하자면, 그것이 검성이 낼 수 있는 한계치도 아닌 것 같았다.
허세로 치부하기에는 그들이 보여준 업적들이 차원이 달랐다.
정말로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터다.
그 이전에 그 날 본 마력검도 재현해내지 못하는 처지에서는 따라가기 급급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그 너머를 봤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드는 것은 별 수 없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라비 라자의 생각을 끊고 들어온 건 노크소리와 익숙한 여자 목소리였다.
“그래.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여자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문만 연 채로 문턱에서 제 용건을 전했다.
“지금 이 시간까지 불이 들어와 있기에 와 본 것인데...이라니가 과장한 게 아니었군요. 수면은 취하고 계신 겁니까?”
“최소 3시간씩은 자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자지 않고서 그 마녀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하고.”
마람 압둘아지드가 언급되자 여자는 치부를 찔린 것처럼 움찔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이내 무례를 범했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며 표정을 수습했다.
“내가 자지 않고 있을까 들여다 본 것이라면, 마무리 운동이 끝나는 대로 잠자리에 들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르가왈, 이건 무리 축에도 들지 않아. 그 때를 생각하면 호사라고 해도 될 정도지.”
과장도 없이 정말 사실만을 담은 말이었다.
스스로 체념한 탓에 시간의 흐름에 뒤처지게 되었지만,
라비 라자는 2차 ‘대소환’ 초기부터 활동한 플레이어였으며,
전장을 골라 다닌 것이 아니라 인도 곳곳에 펼쳐진 지상의 연옥 같은 곳에 파견되곤 했다.
안심할 만한 잠자리는 고사하고, 식량과 물, 고립을 걱정해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연옥을 매번 해쳐 나온 역전의 용사 출신인 것이다.
요 2,3년간 체념에 찌들어 느슨해진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 때의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마람 압둘아지드 때문에 컨디션에 문제가 생길 정도의 수련을 자제해도 이 정도는 문제가 없었다. 측근들의 걱정과는 달리.
하지만 저렇게 두 손을 끊임없이 조물거리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 정도로 걱정하는 건 좀 이상했다.
“...단순히 내가 어쩌고 있나 보러온 게 아닌 거 같군. 무슨 일이 생겼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 마녀가 움직인 건가? 경계팀 연락이라도 끊어졌나?”
“아닙니다. 하산한 이라니가...”
“이라니? 내려간 지 3일은 되지 않았나. 마람 압둘아지드는 어제 막 돌아왔고. 그 사이 행적이 너무 분명해. 잠깐 연락이 안 되는 거라면 이라니가 노느라 못 받은 것일...”
“하, 하산한 이후로 줄곧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럼 하산한 당일에 도착 보고도 없었다는 건가?”
“예...죄송합니다. 이라니가 그런 것이 처음일 있는 일이 아니다보니 어련히 알아서 연락해 오지 않을까 싶어...”
직각을 넘어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인 여자를 앞에 두고 라비 라자는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틀린 판단이라고 꾸짖기도 뭣했다.
연락 두절된 녀석이 노느라 정기 보고를 까먹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고,
무엇보다 마람 압둘아지드 정도의 괴물이 아니면 단독으로 해를 끼칠 수 있는 자가 근처에는 없다시피 할 정도로 친위대 내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강자였으니까.
설마하니 마람 압둘아지드도 자리를 비웠고, 국내에서 그런 일이 있을까 하고 넘기는 게 있을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라비 라자 본인이 직접 보고를 들었어도 충분히 그랬을 터였다.
‘...짐작 가는 곳이 너무 많아서 문제로군.’
그렇다고 위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혼란한 자국 내 상황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 강국으로 불리는 것이 인도였고,
그 수많은 인도 플레이어 중에는 외적과 맞서 싸우는 자신의 휘하를 공격할 미친놈들도 아주 많았다.
국경을 지키고 있는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반 카스트를 기치로 내건 놈들까지 공격해온 경험이 있었다.
그 시도는 대부분 공격 측의 피해만 난 채로 흐지부지 되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모먼 이라니가 해를 입을 거라는 가정을 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혼자서 그런 놈들 백을 맞이하더라도 도망은 치고도 남을 기량이 이라니에게는 있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라비 라자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고,
“근무 중인 경계조를 모두 소집한다. 이라니의 하산 루트를 중심으로 훑어내릴 테니. 아르가왈, 네가 수색 라인을 조율하거라.”
대답을 듣기도 전에 대검을 걸머지고 단련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지만 라비 라자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반 카스트 연합과 해방 연대, 대표적인 반 정부 단체들의 전력 상황이 빠르게 더 해졌다 빠졌다가를 반복했다.
‘...살아만 있어라 이라니. 팔이든 다리든 다시 붙여줄 테니.’
잘려나간 자신의 왼팔도 재생시킬 엄두를 못내고 있긴 했으나, 라비 라자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
“죄송합니다. 이 외의 흔적은 무엇도...”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친위대 일원의 사죄에도 시선은 돌아가지 않았다.
라비 라자는 그대로 굳어버린 양,
검조각을 포함한 아티펙트 조각이 널브러져 있는 흙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는 그 주변에서 핏자국이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친위대와 경계병력 중 몇몇이, 계속된 침묵을 견디다 못해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을 때 그의 입이 열렸다.
“그 마녀의 소행은 아니군.”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누군가는 아쉬워하는 것처럼 이를 갈았으나,
라비 라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는 그를 존경하는 자들이 대부분이긴 하나,
그렇다고 모두가 사상마저 같은 건 아니었기에 이미 감수한 부분이었다.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말 사소한 그런 문제를 대충 넘겨주기만 하면,
그들은 그에게 충분한 충정으로 보답했으니 넘치는 거래였다.
“지금부터는 이라니 살해범을 추적한다는 생각으로 움직인다.”
“예?”
“살해...범 말입니까?”
“그놈이 죽었을 리가...”
여기저기서 의구심 가득한 신음소리와 물음이 터져 나왔지만,
라비 라자는 제 할 말만 짤막하게 내뱉었다.
“갈 텐가, 가지 않은 텐가?”
대답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각자의 병장기를 쳐들고 고개를 숙인 모습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