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화 〉탐식마(貪食魔)
후광이 보여야 할 것 같은 세아의 환한 미소에 류 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예전부터,
그러니까 회귀시점 이전부터 세아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꼼짝을 못 했다.
류 현이 말 잘 듣는 동생이 된 건 저 미소 탓이 꽤 컸다.
회귀 후 미안한 감정이 증폭된 지금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현아?”
“...차라리 안 보였으면 좋았을 걸.”
“뭐? 너 계속 그렇게 삐딱하게 굴래?”
“입장 바꿔서 생각을 해봐. 누나가 내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방금 그런 소리 했으면 기분 좋았겠어?”
“......”
동생의 의사에 반하는 짓을 할 때는 있어도 그 말을 아예 무시하진 못하는 세아는,
곧바로 그 요청을 받아들이곤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굳이 말로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거 봐.”
“그치만 그렇게 말하면 너도 누나 입장이 되면 그냥 있으라고 해도 안 들을 거잖아.”
세아의 반격에 말문이 막힌 류 현은 슬쩍 눈알을 굴려 마주친 시선을 피했다.
그에 세아는 오히려 더 바싹 붙어앉으며 류 현의 시야각을 좁혔다.
“‘비아트리체’랑 싸우는 거 보고 어떻게 여기서 빼낼 수 있을지 고민 많이 했었어.”
“...발을 빼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팀원들도 있고.”
“알아. 그래서 더 고민했었지. 아니었으면 땡깡 부려서라도 틈을 봤을 거야. 희란이도 련이도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더 이해가 안 갔지만.”
“...솔직히 이해 할 거라고 생각은 안하긴 했지만...그 정도였어?”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다 그렇게 말할 걸? 한국에 있을 때는 나 떠봐서 알아보려는 사람도 있더라. 나도 이유는 모르니까 아무것도 못 얻어갔지만.”
“그런 놈이 있었다고? 대체 누구...”
“아주 잠깐이었어. 병원 근처에서 산책하고 있는데 그 때는 내가 주변에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경호고 뭐고 다 물렸으니까.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좀 의욕 과한 신입기자 같더라. 내가 눈에 문제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어.”
“그야, 누나 시력에 문제 있는 거 모르고 그냥 하는 행동만 보면 전혀 눈치 못 챌 만 하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류 현은 세아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세아의 시력은 류 현에게는 아픈 손가락 중 하나였다.
세아 본인은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눈 얘기를 꺼낼 때마다 조금 민감해지는 동생의 심경을 모르지 않았기에 세아는 손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어쨌든 모르고 있었을 때는 그랬어. 왜 자꾸 별 이득도 안 되는 일에 그렇게 목을 매나. 아무리 향상심으로 이해를 해 보려고 노력해도 안 되더라.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정보가 모이면 가지.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그 나라에서 사정하면 그 때 가지. 제대로 쉬는 걸 본 기억이 없는데 괜찮은 걸까. 플레이어 팀이라는 거 생각보다 잘 깨지던데, 계속 저렇게 무리하다가 팀원들이랑 불화라도 일어나면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닐까.”
“미안...이제야 말해서.”
“괜찮아. 지금이라도 말해줬으니까. 못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 솔직히 도움 안 되는 누나니까...”
“아니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
정말 듣고 싶지 않았던 자책의 말이 세아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표정을 다급하게 살폈지만 우려한 우중충한 분위기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전처럼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가 있을 뿐.
조금 속은 듯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류 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좀 도울 수 있게 해달라는, 도움 안 되는 누나 탈출 좀 시켜달라는 그런 의미지?”
“아 진짜 좀...그러지 좀 마.”
배시시 웃는 세아를 슬쩍 흘겨보곤 뒷머리를 긁적거려 멋쩍음을 털어내려 했다.
“미국에 계속 있을 거면...강 찬 씨네 공방 출입 정도는 할 수 있게 해둘 게.”
“정말이니?”
“...계속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 누나가 그쪽에 가있으면 미국도 경계강화하기 편할 거고.”
어제 회귀를 고백하고 나서 나왔던 이야기였다.
세아는 자신이 회복하는데 일등 공신이라고 할 만한 강 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쪽에 관심을 보였고,
세아를 밖으로 돌리고 싶어하지 않는 류 현도 마냥 무시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 내에서 강 찬이 만들었던 주요 아티펙트 중에서 굵직한 건 다 내놓은 상태였으나,
그렇다고 이 정도까지 한 인원을 그냥 놀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용잡이 팀에 있어서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신의 방패’ 같이 그 존재만으로 부담을 줄여주는 물건을 또 만들어낼지 누가 알겠는가.
세아가 던전에서 나온 기괴한 퍼즐을 풀어 본 적은 없지만,
네임드 몹의 마법을 그냥 보는 것만으로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강 찬 씨가 허락할 때 얘기야. 보기랑 다르게 꽤 예민한 사람이라.”
“응, 그 정도면 돼.”
“...남들은 못 놀아서 안달인데 왜 이러나 몰라. 몸도 완전히 성한 것도 아니면서.”
“하나 뿐인 동생이 그 고생을 하는데 어떻게 속 편하게 백조 노릇을 하고 있니?”
“그 고생하는 동생이 보지 말라고 휴대폰 빼놨더니 직접 관전한 사람이 할 말이야?”
그 말에는 대꾸할 거리가 없었던지 세아는 갑자기 창밖을 구경하는 채 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 날 못 볼 수가 없는 마력적 파동을 보았다고 세아에게 들었던 류 현도 더는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누나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좀 곤란한데.”
“응? 뭐가?”
“이해가 안 간다고 한 거. 남들이 보면 그냥 힘 쎈 미친놈이 이상한 짓 하는 걸로 보일 거 아냐? 아니, 그 이상이겠네...아주 이상하게 안 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돈도 안 받고 위험한 곳으로 달려드는 걸로 보일 테니까. 현이 네가 말한 그 데스나이트의 위험성 같은 것도 데스나이트가 지나갔던 네 곳 빼곤 모르고 끝났고.”
“그 건은 별 수 없었어. 거기 사는 인간들 멘탈 박살나서 전력 외가 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뒀다가는 후에 데스나이트를 쳐 죽여도 계속 언데드가 기어 나오는 땅이 됐을 거라. 그렇게 되면 방어선은 고사하고 유럽 전체가 언데드 생산 공장이 됐을 거야.”
“그건 누나도 들어서 알지. 현이 네가 잘 못 판단했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였을 거야. 그러니까 저렇게 행동하는 거고. 일본만 봐도 그렇잖아?”
세아가 왼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을 슬쩍 류 현은 우크라이나 테러 이야기를 하지 않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팀원들에게도 입단속을 해두어야겠다고 속으로 메모해두고는 그는 말을 이었다.
“일본도...거기도 시간을 주면 안 되는 경우였어. 이번보다 더 약했던 전생에서도 마나맥 장악하고 사방팔방으로 언데드를 뿌려댔었으니까. 바닷길이 막혀버리고 나니까 아프리카 봉쇄선도 같이 무너지더라. 그쪽은 아무래도 그런 문제에 취약하니까. 이번 생의 엘더 리치가 그냥 마나맥 장악하게 뒀으면 아예 한국에 직접 포격 날렸을 지도 몰라. 아니면 데스나이트를 찍어냈을 수도 있지. 네임드 본 드래곤도 거느린 놈이 데스나이트 둘까지 거느렸으니까 아예 그쪽으로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게 맞고. 어느 쪽이든 간에 빨리 잡는 게 정답이었어.”
“‘페릭스’는...”
류 현에 등에 엎힌 채 쫓기며 사막을 가로지르던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세아의 손이 살짝 떨렸다.
류 현은 이롭지 못한 회상을 가로막기 위해서 재빨리 마무리 지었다.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나랑 누나를 노렸으니까. 정확히는 날 잡겠다고 내가 보호하는 누나를 물고 늘어진 거겠지만.”
“지형 자체가 변한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은 그냥 적당히 시간을 끌 수가 있는 상황자체가 안 나왔어. 데스나이트 때 잠깐 끈 것도 운이 좋았던 거고. 공략 순서가 반대였으면 잡는데 급급했을 테니까.”
“애초에 무슨 계획을 짜는 것도 힘든게 네임드 몹들의 힘의 상승폭이 너무 커. 시간을 줘버리면 힘이 왕창 늘어나진 않더라도 판단력 같은 게 돌아와 버려서 위험도가 급상승 하니 본말전도지. 팀에 직접적으로 피해가 안 오더라도 인류영역이 줄어들면 그것도 결국 우리 피해로 돌아올 거고.”
“이미 한 번 당한 놈들도 태도가 미적지근한 건 짜증나지만...미국이라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가담해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뭐.”
“...그럼 계속 이대로 갈 생각이야?”
“그건 아니고. 이번에 미국이 협상하는 거 보고 다시 정하려고. 그래서 귀화얘기도 유보한 거니까.”
“응? 무슨 협상? 현이 너 내내 여기 있었잖아. 그래도 돼?”
“아, 누나한테는 말 안했었구나. 강 찬이 만든 아티펙트 판매 협상을 미국한테 맡겨놨거든. 내가 하면 팀 명의로 돌려도 결국 개인과의 거래라서 저쪽이 깨기도 쉽고, 나도 협상하기 피곤해서.”
“음...내가 세계정세 같은 걸 잘 아는 건 아니지만...미국은 그...플레이어들 탄압한 적도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생각해뒀지요. 플레이어 탄압이랑 별개로, 미국도 결국 개인이랑 거래하는 국가가 되니까. 상대가 약속 깨기 쉬운 상황인데 완전히 믿는 바보짓은 안 해.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뭐 계약서 검토를 똑바로 했으면 헛짓거리는 못 하겠지만.”
“무슨 계약서?”
“별 건 아니고, 그냥 원천 기술 계약 몇 개 걸어놨어. 강 찬 본인도 그걸 대량 생산하려면 이쪽 협의가 필요하게 해뒀거든. ‘마탑’놈들 덕 좀 봤지. 뭐 그걸 행사하기 전에 판이 깨지면 강 찬 본인이 노발대발하면서 귀화 무를 거 같지만.”
그 시각,
류 현의 생각대로 법무부 장관의 보좌들은 류 현과 강 찬 간의 라이선스 계약서 사본을 앞에 두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