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처음으로 회귀 사실을 고백했을 때 세아는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기나긴 투병 끝에 결국 아지다하카의 독에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느리게 눈을 세 번 깜빡이는 것으로 넘어갔으나,
류 현이 아지다하카를 쳐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모든 반응을 멈춰버렸다.
눈 깜빡임,
호흡 때문에 잘게 오르내리던 가슴의 움직임,
그 외의 산 사람이 보일 수밖에 없는 작은 움직임들을 모두 멈춰버렸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넘어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거부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볼 것도 없이 류 현은 곧바로 누이의 이상을 눈치 챘다.
동공은 허공을 향한 채로 멈춰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점을 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떨렸고,
떨림을 멈추려고 왼손을 감싸 쥔 오른손도 같이 떨렸다.
방금 전까지 빛을 뿜어내던 눈으로 류 현에게 들여다보이는 것 같은 위압감을 선사했던 것이 거짓말 같은 변화였다.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류 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그런다고 떨림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뭐라도 해주고픈 마음에서였다.
그 때 세아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하지만 류 현은 그 변화에 기뻐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끔찍해할 반응이 바로 터져 나왔으니까.
감정이 고조되는 예열단계도 없이,
세아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것을 효시로 세아의 눈물샘은 완전히 고장나버렸다.
눈에 이상이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류세아는 눈물만 쏟아내었다.
그러면서도 훌쩍거리는 소리 같은, 사람이 울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행동들이 전혀 없어서 류 현은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세아의 눈물에 잠깐 사고가 정지되었던 류 현이 내뻗다가 멈춘 팔을 다시 움직였다.
그보다 먼저,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세아의 손이 팔을 잡아끌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류 현은 그 품안으로 그대로 딸려 들어갔다.
“...누나?”
“...안해. 나는 그런 줄...로 몰랐...”
꽉꽉 틀어막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류 현은 저를 품안에 집어넣고도 벌벌 떨고 있는 세아를 보곤 깨달았다.
훌쩍거리는 소리나 목매인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류 현은 잠깐 허공을 더듬거리다가, 천천히 세아의 등을 쓸어주었다.
처음에는 흠칫흠칫 놀라던 세아도 세 번 되고, 네 번이 되자 류 현이 하는 양을 편히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울음이 멈춘 건 아니었다.
척 봐도 심상찮은 떨림이 조금 수그러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옹알이 같은 중얼거림은 계속 되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가 못 알아들을 걸 걱정한 양,
같은 말을 기본적으로 다섯 번씩 반복했기에 류 현은 세아가 느낀 죄스러움에 대해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류 현의 이해를 돕진 못했지만 어떻게 달래야 할지의 방향성 정도는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게 왜 누나가 미안해야 할 일이야.”
“난 괜찮아. 멀쩡해. 이거 봐, 팔에 흉터자국 하나 없잖아.”
“전에는 팔에 그냥 맨살 부분이 더 적었거든? 그래서 누나가 흉터자국 볼 때마다 울어서 이거 어떻게 없앨 수 없나 하고 별의 별 짓을 다했다니까. 부상은 이번이 전보다 훨씬 덜 입었지. 아무 것도 없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 때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서 몸으로 떼우느라 별의 별 죽을 고비를...”
“아니, 이제 그 일은 없는 일이 됐다니까. 왜 울고 그래? 이거 봐, 흉터자국 없잖아. 후유증이고 뭐고 다 사라진 거라니까?”
“‘비아트리체’? 그 얘긴 왜 갑자기...아니, 그 정도 부상이면 아픈 것보다 어질어질 한 게 더 크다니까. 통증을 다 느꼈으면 내가 이렇게 멀쩡하겠어?”
“진짜야, 의사쌤한테 같이 물어보러 갈까? 아니, 또 왜 울고 그래. 응?”
“내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어? 이번에는 던전도 훨씬 적게 들어간다니까. 전에는 1년에 이거에 세 배는 더 들락거렸어. 지금은 던전 피로도도 딱 한 번 밖에 안 느껴봤고. 자릿수가 다르다니까. 어? 오러 버프?...나중에 얘기 끝나면 보여줄게. 아니, 누나한테 씌우는 건 좀...그게 아니라, 누나는 훈련도 안 받았고 그렇잖아. 플레이어로 각성했다고 끝이 아니야. 누나 능력이 굉장하긴 한데 마력량 자체는 그냥 그렇거든. 오러 버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나도 정확하게 모르니까...”
“...훨씬 낫지. 애초에 승하가 등 떠밀어서 이렇게 된 거기도 하고. 응? 아니 왜 또? 아니, 이게 울 얘기야?”
그게 잘 풀렸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세아는 울음을 조금 그쳤다고 생각이 될 때면 다시 울음을 터뜨리길 반복했다.
류 현이 의도적으로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배제하려고 들어도,
기어코 울 거리는 찾으려드는 것처럼 방향을 돌리거나 류 현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류 현은 중간부터는 달래는 건 반쯤 포기하고 이야기를 빨리 끝낼 요량으로 질문을 빠르게 받아쳐내는 방향으로 선회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끊고 갈 터닝 포인트에 빨리 도달해서 조금이라도 쉬게할 생각이었다.
“...그 때는 엘릭서를 못 얻었어. 자세한 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미국이랑 손잡고 나서도 강 찬은 코빼기도 못 봤거든. 그 사람이 만든 아티펙트는 지원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점에서는 사망한 상태였지 싶어. 저렇게 정력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그렇게 조용히 박혀 있을 수가 없으니까.”
“어...뭐 그렇지? ‘터주’가 그 때처럼 군벌화 되진 못했어도 충분히 커졌다고 들었거든. 내 기억이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마 규모만 보면 전생보다는 훨씬 커진 거 같고. 2대 클랜도 전력이 멀쩡하니 한국에 있는 것보단 여기 있는 게 나은 거 같아서. 노골적으로 날뛸 구실이 아직 없는 거지 걔들이 평화주의자가 된 건 아니니까. 군인? 음...말하자면 복잡한데 경계 서는 사람들 공식적으로 군인은 아니야. 페이퍼 컴퍼니로 클랜을 세우고 협조인력을 보냈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기는 거지. 버넷 씨? 아, 그 사람은 군인 됐을 걸. 훈장 받으면서 계급이...중령이라고 했나 대령이라고 했나?”
“나? 어...자유훈장인지 뭔지 준다는데 일이 바빠서 아직...아니, 그건 아니고. 솔직히 그거 주나 안 주나 별 차이는...알았어. 그 쪽도 떼먹으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마세요.”
“...맞긴 해. 대체 남 훈장 받는 일에 시위까지 하고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훈장 더 받는다고 여기로 귀화할 리가...귀화?...누나는 하고 싶어? 아니, 뭐 나야 별 미련 없긴 한데. 지금 이 상태가 더 나은 거 같아서. 미국이 잘 해주긴 해도 네임드 몹이 벌써 두 번이나 왔다갔잖아. 하나는 잠깐 들린 수준이긴 하지만. ‘살바토르’ 때 그 편지 아니었으면 누나 안 불러들였을 거야. 어,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가 제일 낫다고 봐.”
“언론? 내가 왜 그런 걸 신경 쓰...누나! 그런 거 좀 검색해서 보지 말라고 했잖아. 아 진짜...”
“응? 갑자기 화련 씨 얘기는 왜...어...좋은 사람이긴 하지? 내가 찾아갔을 때만 해도 이모님 병 수발 든다고 그러고 있었으니까.”
“어...희란 씨는 아니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뭘 어떻게 찾겠어? 그런 능력은 숨기려고 작정하면 겉으로는 티도 안 나는데. 나도 진짜 생각도 못하게 만난 거라니까. 사고가 날 줄 알았으면 내가 왜 거길 갔겠어? 바닥부터 시작하면 재생능력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부상당하면 오히려 더 오래 걸리는데.”
“승하는...전생에서는 이미 죽은 상태였지. 어, 승하도 진짜 우연히 만난 거야. 한국 최강이 그 시간에 그런 던전 근처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솔직히 위기감은 그 때가 최절정이었지.”
“맞아, 누나말대로야. 내가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인 거지. 어디 가서 우연히 이런 팀을 만나겠어? 회귀도 그렇고. 아, 왜 그래?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왜 울고...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난 괜찮다니까. 진짜.”
세아의 눈물바다 공세를 멈춰 세운 건 배가 우는 소리였다.
점심 무렵에 시작해서 저녁때까지 5분이 될까 말까한 짧은 휴식이 끼어있었을 뿐이고,
그것도 뭘 먹거나 하는 건 생각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세아는 제 배에서 나온 소리에 멍하니 굳어버렸고 류 현은 빵 터져선 끅끅거렸다.
세아는 끅끅거리며 배를 부여잡은 류 현을 노려볼 여유도 없이 제 배를 노려보았다. 한 번 더 소리를 내면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였기에 류 현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제 누나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겠어? 얼마나 울었으면 어제보다 더 빨리 배가 꺼졌겠어?”
“......”
“그런 눈으로 배 노려보지 말고 우리 밥 먹고 하자. 밥 거르고 뭐하는 거 들키면 나 또 화련 씨한테 잔소리 들어.”
“...그래, 그러자.”
“근데 식당에는 못 내려가겠네. 누나 얼굴 좀 봐. 오늘도 좀 올려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나 세수하고 올 게.”
류 현은 돌아서자마자 귀가 벌겋게 달아오른 세아의 뒷모습을 보곤 속으로 킥킥거리며 식당으로 연락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