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5화 〉탐식마(貪食魔) (385/429)



〈 385화 〉탐식마(貪食魔)

첫날은 이러지 않았다.

화련의 예상과 달리  현은 굳은 결심을 표정에 드러내며 세아에게 찾아갔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세아도 동생이 무슨  결심을 하고 온  같자, 그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느 부분을 좀 완곡하게 다듬어서 말할지 정하지도 못한 채로 승하의 말에 떠밀려 온 류 현은 어물거리다가 선수를 인내심이 바닥난 세아에게 빼앗겼다.
세아가 포문을  말을 그의 예상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

“현아, 화나더라도 일단 누나 묻는 거에 대답해주고 화내줬으면 좋겠어. 요 며칠 동안, ‘비아트리체’를 잡고 나서 혹시 중간부터 필름이 끊기고 그러는 거 없니? 아주 잠깐이라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거나.”


화내더라도 대답해주고 화내라는 말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런 말부터 하나 싶었던 류 현은 말의 말미에서는 아예 할 말을 잊어버렸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세아와 눈을 한  마주치고 나서는 자신이 이상행동을 했나 되짚어보게 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일이 떠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금세 그만두게 되었지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게?”
“...보이니까.”
“뭐?”
“그 때  봤으니까 하는 소리야. ‘비아트리체’랑 싸우던 중간에 분명히 너였는데 네가 아니게 바뀌는 걸...”

류 현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세아는 그 날 봤던 것을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나도 갑자기 눈속임 마법이라고 생각했었어. 몸은 분명히 너인데 갑자기 내용물이 바뀐 것처럼 움직이고, 그 빛이 너무 작았으니까.”
“빛? 빛이라니?”

 현이 엘더 리치와 ‘페릭스’의 기억이 공명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한  때 그 현상이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 세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처음으로 그 빛을 인식했을 때는 그냥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얇았어. 완전히  전체를  채운 게 아니라, 작은 혈관들이 온 몸으로 뻗쳐있는 그런 상태였는데 가면 갈수록 굵어지면서...너 정말 아무 느낌도 못 받았니?”


무슨 느낌이든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시  현의 의식은 제멋대로 움직이던 몸과  그대로 유리되어있었으니까.
꼼짝 못하고 관전자 입장을 강요당했는데 눈으로  수 있는 사태 파악 이상의 뭔가를 할  있을 리가 있나.


‘비아트리체’ 전 이후,
아주 조심스럽게 에둘러서 그 때 그 상태에 대해서 물어오는 동료들의 대답을 계속 물리쳐온  스스로도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그 현상 이후 일어난 자신 내부의 ‘격리공간’을 건드려서 어떻게 된 일인지 유추해보려고도 했지만,
시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민만 더 커졌다.

라비 라자가 엑스칼리버를 빌미로 인도로 불러들였을 때,
던전에서 실험을 감행한 것 마저 실패.

류 현은 전생에서 ‘강림’에 대해 체념했던 것과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눈에 띄는 이상 증상이 없을 뿐, 막막하기는 그 때보다 더 막막했으니 그도 별 수 없었다.

“거기까지면 모르겠는데 마지막에는 그게 살아있는 것처럼 의지를 가지는 것 같...”
“뭐? 누나 뭐라고?”
“아, 그...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아니, 그 부분 설명을 해줄 건 없는데 마지막에 의식을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는 거야?”

세아는 류 현이 의지를 가졌다는 말 자체에 의문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류 현에게는 말이 안 되는 것도, 낯설지도 않은 말이었다.
전생에 지겨울 정도로 고민하고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문제니까.


자신 안에서 점점 커지는 충동.
그것이 ‘강림’을 사용한 싸움을 거듭할수록 덩치를 불리는 건 물론, 방향성과 그 악의가 짙어지는 악몽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회귀 이후 해방되었음에도 계속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을 넘어 그의 뇌리에 각인된 공포의 그림자.

“으응...”
“하...”


 공포가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하나 뿐인 혈육에게 듣는 기분은 더 이상 대범한 척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류 현이 이마를 짚고 한 숨을 푸욱 내쉬자 세아가 어깨를 움츠리고 눈치를 보았지만, 그걸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간신히 심란한 마음을 추스른 류 현은 피로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 한 적 없지? 우리 팀원이라든가.”
“...련이한테도 말  했어. 어떻게 그런 걸 말을 하니. 현이 네가...”
“잘 했어. 어차피 이건 당장 해결도 안 되는 거니까 말해봐야 괜히 서로...”
“잠깐만, 해결이  된다니? 현이 너 이번이 처음 이런 거 아니야?”

심경이 복잡한 와중에 내뱉은 말이 제대로 걸러졌을 리가 없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는 아차 했으나, 세아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이었다.


‘그래, 어차피 말하기로 한 건데...누나가 볼  있는 거면 들어두는  맞긴 하지. 어차피 못 보게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처음은 아닌데...완전히 똑같은 경험이 있는 건 아니고...이건 말하기 시작하면 오늘 안으로는 못 끝내. 그러니까 일단 이것부터 마무리하고 나서 이야기 하자. 오늘 그 얘기 하려고 온 거니까. 누나가 궁금해 하던  이야기들 말이야.”
“무슨 이야...알았어.”

무슨 이야기냐고 따지려던 세아는 류 현이 손을  잡으며 눈을 마주쳐오자 더 채근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 ‘눈’을 뜬 뒤로 언제나 뒤로 빼기만 하던 동생의 눈에 서린 굳은 결심을 읽어서였다.


당장 속은 좀 탔지만 닦달할 수도 없었기에 세아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전부터 준비해온 말들을 가다듬었다. 동생에게 너무 두루뭉술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플레이어나 마법에 대해서 아는  없지만, 최대한 내가 보이는 대로 이야기 하자면...‘비아트리체’ 전 이후로 현이 네 안에 생긴 다른 공간은 그  네 몸을 움직인 의지를 위한 공간 같아.”
“같다고?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은 안 보여. 현이 네가 다시 주도권을 찾자마자 소멸한 것처럼 더는 안 보이게 됐거든. 대신 조금이지만 비슷한 느낌 나는 빛이 두 개 거기 들어가긴 했는데...그걸 위해서라기에는 공간이 너무 커.”
“공간이 너무 크다고? 어, 그럼 너무 넓어서 누나가 못 찾았을 확률은? 원래 못  정도로 작은 빛이었다며. 내 몸을 움직이면서 계속 커졌고. 그럼 내가  자리를 찾을 때 줄어들었을 수도 있잖아. 누나가 찾지 못할 정도로 작게.”
“그건 아닐 거야. 의지를 보이던 마지막 순간에는 빛의 밝기가 아니라 아예 본질? 격이 달라진 느낌이었어. 마치  ‘살바토르’가 보낸 편지처럼...이전이랑 완전히 다른 수준의 뭔가가 된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까. 크기가 줄었다고 해도 못 찾지는 않을 거야. 존재감이 너무 확고해서.”
“그럼 소멸했다고 보는  맞는 건가...”
“...그것도 잘 모르겠어. 그런 걸 본 건 처음인데다가 그냥 빛으로 보인 것도, 그것뿐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엄청나게 복잡한 것 때문인  같아서...의지를 가지게 됐다고 하긴 했는데 생명체랑은 거리가 멀어서 분해돼서 흩어졌어도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거 같기도...미안해, 괜히 기분만 심란하게 만든 거 같...”
“아냐, 누나 아니었으면 아무 단서도 없이 무작정 들이박아 보는 식으로 해결했어야 했을 거고...솔직히 몇 가지 시도해보고 반쯤 포기하려는 차였어. 그럼 거기에 대한 건 이게 끝?”
“으응,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용량이 엄청 크다는 거. 그게 다야. 그 빛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게 용량이 엄청 커서였거든. 그 때는 몰랐는데 며칠 간 현이 너를 보고 있으니까 알겠더라. 그 빛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커다랗다는 거.”
“어...그거 마력 얘기지?”
“조금 달라.”


말을 마치고 살짝 고개를 숙인 세아의 눈에 새하얀 빛이 어렸다. 고개 숙인 모습만 볼 수 있는 류 현의 눈에 그 빛이 보일정도로 강렬하게.
처음 보는 현상에 류 현은 그녀를 붙잡을까 싶었지만,
별 다른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아 기다리기로 했다. 마주 잡은 손이 안심하라는 듯이 살살 쓰다듬어 오는 것이 가장 컸지만.


마침내 고개를 든 세아의 눈은 동공을 다 잡아먹을 정도의 빛이 홍채를 찢어발기는 모습이었다.
눈을 마주친  현을 흠칫하게 만든 건  형태가 아니라, 세아에게서 느껴지는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현이 네 안의 공간에 비하면 마력은 상대적으로 적어. 마력양 자체가 적은 건 아닌데 워낙 공간이 넓다보니...차지하는 공간이 1푼 정도? 내가 처음부터 보질 못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비아트리체’ 이후로도 마력이 늘어난 폭보다 공간이 늘어난 폭이 훨씬 커. 마력은 그냥 있어도 늘어나는 게 보이는데, 공간은 그냥은 안 늘어나는 걸 보면 이쪽이 더 늘리기 힘든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계속 넓어지고 틀은 단단해지고 있어. 마치 내가 아까 말한 ‘빛’과 격리공간 얘기랑 같아. 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걸 담을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강해지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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