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화 〉탐식마(貪食魔)
첫날은 이러지 않았다.
화련의 예상과 달리 류 현은 굳은 결심을 표정에 드러내며 세아에게 찾아갔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세아도 동생이 무슨 큰 결심을 하고 온 것 같자, 그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느 부분을 좀 완곡하게 다듬어서 말할지 정하지도 못한 채로 승하의 말에 떠밀려 온 류 현은 어물거리다가 선수를 인내심이 바닥난 세아에게 빼앗겼다.
세아가 포문을 연 말을 그의 예상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
“현아, 화나더라도 일단 누나 묻는 거에 대답해주고 화내줬으면 좋겠어. 요 며칠 동안, ‘비아트리체’를 잡고 나서 혹시 중간부터 필름이 끊기고 그러는 거 없니? 아주 잠깐이라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거나.”
화내더라도 대답해주고 화내라는 말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런 말부터 하나 싶었던 류 현은 말의 말미에서는 아예 할 말을 잊어버렸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세아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나서는 자신이 이상행동을 했나 되짚어보게 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일이 떠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금세 그만두게 되었지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게?”
“...보이니까.”
“뭐?”
“그 때 다 봤으니까 하는 소리야. ‘비아트리체’랑 싸우던 중간에 분명히 너였는데 네가 아니게 바뀌는 걸...”
류 현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세아는 그 날 봤던 것을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나도 갑자기 눈속임 마법이라고 생각했었어. 몸은 분명히 너인데 갑자기 내용물이 바뀐 것처럼 움직이고, 그 빛이 너무 작았으니까.”
“빛? 빛이라니?”
류 현이 엘더 리치와 ‘페릭스’의 기억이 공명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한 그 때 그 현상이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 세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처음으로 그 빛을 인식했을 때는 그냥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얇았어. 완전히 몸 전체를 꽉 채운 게 아니라, 작은 혈관들이 온 몸으로 뻗쳐있는 그런 상태였는데 가면 갈수록 굵어지면서...너 정말 아무 느낌도 못 받았니?”
무슨 느낌이든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시 류 현의 의식은 제멋대로 움직이던 몸과 말 그대로 유리되어있었으니까.
꼼짝 못하고 관전자 입장을 강요당했는데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태 파악 이상의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비아트리체’ 전 이후,
아주 조심스럽게 에둘러서 그 때 그 상태에 대해서 물어오는 동료들의 대답을 계속 물리쳐온 건 스스로도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그 현상 이후 일어난 자신 내부의 ‘격리공간’을 건드려서 어떻게 된 일인지 유추해보려고도 했지만,
시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민만 더 커졌다.
라비 라자가 엑스칼리버를 빌미로 인도로 불러들였을 때,
던전에서 실험을 감행한 것 마저 실패.
류 현은 전생에서 ‘강림’에 대해 체념했던 것과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눈에 띄는 이상 증상이 없을 뿐, 막막하기는 그 때보다 더 막막했으니 그도 별 수 없었다.
“거기까지면 모르겠는데 마지막에는 그게 살아있는 것처럼 의지를 가지는 것 같...”
“뭐? 누나 뭐라고?”
“아, 그...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아니, 그 부분 설명을 해줄 건 없는데 마지막에 의식을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는 거야?”
세아는 류 현이 의지를 가졌다는 말 자체에 의문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류 현에게는 말이 안 되는 것도, 낯설지도 않은 말이었다.
전생에 지겨울 정도로 고민하고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문제니까.
자신 안에서 점점 커지는 충동.
그것이 ‘강림’을 사용한 싸움을 거듭할수록 덩치를 불리는 건 물론, 방향성과 그 악의가 짙어지는 악몽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회귀 이후 해방되었음에도 계속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을 넘어 그의 뇌리에 각인된 공포의 그림자.
“으응...”
“하...”
그 공포가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하나 뿐인 혈육에게 듣는 기분은 더 이상 대범한 척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류 현이 이마를 짚고 한 숨을 푸욱 내쉬자 세아가 어깨를 움츠리고 눈치를 보았지만, 그걸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간신히 심란한 마음을 추스른 류 현은 피로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 한 적 없지? 우리 팀원이라든가.”
“...련이한테도 말 안 했어. 어떻게 그런 걸 말을 하니. 현이 네가...”
“잘 했어. 어차피 이건 당장 해결도 안 되는 거니까 말해봐야 괜히 서로...”
“잠깐만, 해결이 안 된다니? 현이 너 이번이 처음 이런 거 아니야?”
심경이 복잡한 와중에 내뱉은 말이 제대로 걸러졌을 리가 없었다.
뒤늦게 말 실수를 깨닫고는 아차 했으나, 세아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이었다.
‘그래, 어차피 말하기로 한 건데...누나가 볼 수 있는 거면 들어두는 게 맞긴 하지. 어차피 못 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처음은 아닌데...완전히 똑같은 경험이 있는 건 아니고...이건 말하기 시작하면 오늘 안으로는 못 끝내. 그러니까 일단 이것부터 마무리하고 나서 이야기 하자. 오늘 그 얘기 하려고 온 거니까. 누나가 궁금해 하던 그 이야기들 말이야.”
“무슨 이야...알았어.”
무슨 이야기냐고 따지려던 세아는 류 현이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마주쳐오자 더 채근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 ‘눈’을 뜬 뒤로 언제나 뒤로 빼기만 하던 동생의 눈에 서린 굳은 결심을 읽어서였다.
당장 속은 좀 탔지만 닦달할 수도 없었기에 세아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전부터 준비해온 말들을 가다듬었다. 동생에게 너무 두루뭉술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플레이어나 마법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최대한 내가 보이는 대로 이야기 하자면...‘비아트리체’ 전 이후로 현이 네 안에 생긴 다른 공간은 그 때 네 몸을 움직인 의지를 위한 공간 같아.”
“같다고?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은 안 보여. 현이 네가 다시 주도권을 찾자마자 소멸한 것처럼 더는 안 보이게 됐거든. 대신 조금이지만 비슷한 느낌 나는 빛이 두 개 거기 들어가긴 했는데...그걸 위해서라기에는 공간이 너무 커.”
“공간이 너무 크다고? 어, 그럼 너무 넓어서 누나가 못 찾았을 확률은? 원래 못 볼 정도로 작은 빛이었다며. 내 몸을 움직이면서 계속 커졌고. 그럼 내가 제 자리를 찾을 때 줄어들었을 수도 있잖아. 누나가 찾지 못할 정도로 작게.”
“그건 아닐 거야. 의지를 보이던 마지막 순간에는 빛의 밝기가 아니라 아예 본질? 격이 달라진 느낌이었어. 마치 그 ‘살바토르’가 보낸 편지처럼...이전이랑 완전히 다른 수준의 뭔가가 된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까. 크기가 줄었다고 해도 못 찾지는 않을 거야. 존재감이 너무 확고해서.”
“그럼 소멸했다고 보는 게 맞는 건가...”
“...그것도 잘 모르겠어. 그런 걸 본 건 처음인데다가 그냥 빛으로 보인 것도, 그것뿐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엄청나게 복잡한 것 때문인 거 같아서...의지를 가지게 됐다고 하긴 했는데 생명체랑은 거리가 멀어서 분해돼서 흩어졌어도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거 같기도...미안해, 괜히 기분만 심란하게 만든 거 같...”
“아냐, 누나 아니었으면 아무 단서도 없이 무작정 들이박아 보는 식으로 해결했어야 했을 거고...솔직히 몇 가지 시도해보고 반쯤 포기하려는 차였어. 그럼 거기에 대한 건 이게 끝?”
“으응,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용량이 엄청 크다는 거. 그게 다야. 그 빛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게 용량이 엄청 커서였거든. 그 때는 몰랐는데 며칠 간 현이 너를 보고 있으니까 알겠더라. 그 빛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커다랗다는 거.”
“어...그거 마력 얘기지?”
“조금 달라.”
말을 마치고 살짝 고개를 숙인 세아의 눈에 새하얀 빛이 어렸다. 고개 숙인 모습만 볼 수 있는 류 현의 눈에 그 빛이 보일정도로 강렬하게.
처음 보는 현상에 류 현은 그녀를 붙잡을까 싶었지만,
별 다른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아 기다리기로 했다. 마주 잡은 손이 안심하라는 듯이 살살 쓰다듬어 오는 것이 가장 컸지만.
마침내 고개를 든 세아의 눈은 동공을 다 잡아먹을 정도의 빛이 홍채를 찢어발기는 모습이었다.
눈을 마주친 류 현을 흠칫하게 만든 건 그 형태가 아니라, 세아에게서 느껴지는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현이 네 안의 공간에 비하면 마력은 상대적으로 적어. 마력양 자체가 적은 건 아닌데 워낙 공간이 넓다보니...차지하는 공간이 1푼 정도? 내가 처음부터 보질 못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비아트리체’ 이후로도 마력이 늘어난 폭보다 공간이 늘어난 폭이 훨씬 커. 마력은 그냥 있어도 늘어나는 게 보이는데, 공간은 그냥은 안 늘어나는 걸 보면 이쪽이 더 늘리기 힘든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계속 넓어지고 틀은 단단해지고 있어. 마치 내가 아까 말한 ‘빛’과 격리공간 얘기랑 같아. 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걸 담을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강해지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