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화 〉탐식마(貪食魔)
그것이 화련이 그날 들은 류 현의 마지막 말이었다.
류 현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파하고 두 여자를 배웅했다.
뭐라고 말을 건네려던 화련은 류 현의 눈동자 안에 자리 잡은 고뇌의 기색을 보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줄곧 피해오던 문제에 대해서 그가 손을 대기로 한 것 같으니 찬물을 끼얹는 꼴을 피해야겠다 싶었다.
그 뒤로 화련의 일과는 전과 다름없이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재활운동을 소화하고,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강 찬이 만들어둔 일회용 전송기 안에 마법을 담았다.
말이 거창하게 일회용 전송기지, 실상은 화련의 마법을 담아놓을 수 있는 용기를 소형화 시켜놓은 것뿐이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긴 했으나, 결국 일의 대부분은 화련의 몫이었다.
레이드 이후에는 살짝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 류 현 앞에서야 대충 얼버무렸지만.
그렇게 용기에 마법을 담아 아티펙트로 만들고 나면 그녀는 병동을 순찰했다.
경계 병력의 근무태도를 확인하는 건 아니었고, 병동 전체를 커버하는 자신의 술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방에 앉아서도 구멍난 부분을 땜질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그녀는 직접 둘러보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페릭스’ 때 기습을 당한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기도 했고, 이번에 상대한 용종 네임드 몹 두 개체가 모두 자신이 상상하기도 힘든 수준의 마법 경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격차를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나더라도 직접 보면 흔적 정도는 쫓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하는 순찰.
그녀의 일과를 파악한 경계 병력들이 그 시간만 되면 장구류나 포메이션 체크를 하곤 했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요 사흘간은 발견할 기회가 없었다는 게 맞았지만.
화련의 일과에 이상행동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이상행동.
화련은 지난 사흘간 병원 옥상부터 1층까지 훑어 내려오는 순찰이 끝나고도 오희란이 지내고 있는 병실로 가지 않았다.
2층 복도 중간지점까지 점검을 마치고, 남은 반은 점검하지 않고 바로 1층으로 내려와 점검을 했다.
그리곤 다시 2층으로 올라가서 점검하지 않은 반절에 속한 병실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제 공간 마법까지 동원해서 팀원을 제외한 병동 안의 인원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엄폐가 끝나자 그녀는 중앙계단에서 복도로 돌아나가는 모퉁이에 가져다 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점검이 아니라 잠입하는 스파이 같은 모습이었지만 화련은 자신의 모습이 외부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사흘 전,
승하가 류 현에게 더 이상 꾸물거리지 말라고 한 마디 던진 후 화련은 한국에 머무르고 있던 이모를 불러들였다.
낯선 타국에 갑자기 장기 체류하게 된 것에 대해 그녀의 이모는 약간 부담스러워 하긴 했지만,
온 나라가 들썩들썩 할 정도로 유명해진 조카가 놓인 상황을 모르진 않았기에 조용히 미국이 제공한 전세기를 타고 LA로 날아왔다.
화련은 이모가 입국한 날에 LA로 날아가 머물 곳을 살피고 연방 정부가 붙여준 호위병력에게 당부를 한 후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워싱턴에 머물게 하기에는 동부의 상황이 너무 흉흉했고,
이제 몸도 다 회복해서 누워있던 시간을 만회할 생각으로 만만한 이모를 한 곳에 묶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화련은 비상탈출용 전송기를 몇 개 쥐어 주고 당부를 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녀의 이모도 처음 불안해하던 태도와는 달리 이튿날부터 정력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며 만족감을 표해왔다.
그 덕에 걱정거리 하나를 덜어낸 화련은 가장 큰 걱정거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병동에 숨어든 스파이 같은 거동을 보이면서 말이다.
그녀가 은밀하게 살피고 있는 병실은 세아와 류 현의 병실이었다.
제각기 방을 가지고 있는 둘이었지만 요 삼일 간은 의미가 없었다.
화련이 살핀 시간동안은 둘은 계속 같은 방에 머물렀으니까.
공간마법을 뻗어서 알아낸 것은 아니었고,
공간마법을 다루면서 발달한 감각으로 절로 알게 되었다.
처음 와보는 공간에서도 발만 살짝 굴러도 마법적 처리가 된 게 아니면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애초에 화련은 자신의 마법으로 류 현에게 들키지 않고 저쪽을 들여다볼 자신도 없었고,
그럴 수 있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러고 있냐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겠지만.
‘마스터도 몸이 성하진 않아서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할 텐데.’
류 현은 괜찮다고 했지만 장기간 붙어살다시피 한 그녀들의 눈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승하에게 한 소리 듣기 전에 뭔가 고심하던 모습도 그렇고,
평소 류 현과는 달리 반응도 뭔가 굼떴다.
몸이 심하게 불편해 보이면 그걸 잡고 뭐라고 해보기라도 할 텐데 또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 얘기 해봐야 떨떠름한 시선이나 받겠지만, 그녀들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대체 왜 이 시점에 그런 소릴 한 거야...몸을 좀 더 추스르고 나서 해도 되잖아.”
승하를 탓할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기도 그렇게 고생할 거면서.’
화련은 지금쯤 백혜라 앞에서 쩔쩔 매고 있을 승하의 모습을 상상하며 끓는 속을 식혔다.
아까 식당에서 둘이서 투닥투닥 하는 모습으로 추측할 때 승하가 아직 다 말하진 못한 것 같았다.
살짝 들어보니 백혜라가 자꾸 말을 끊어서 지체되고 있는 듯 했고.
이야기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이상할 건 없다.
자신들도 류 현의 태도에 눌려서 잠자코 듣고 있었던 면이 컸으니까.
‘...얘기 하셨으려나? 언니 얼굴을 통 볼 수가 없으니 추측거리도 없네.’
매일같이 보던 세아도 얼굴을 코빼기도 못 본지 사흘째다.
틀어박히기 시작하면 찾아갈 때까지 나오질 않는 류 현과 달리,
세아는 꽤 활동적인 편이라 같이 뛰진 않아도 오다가다 마주치는 게 일상이었다.
요 며칠 간은 뛰는 건 고사하고, 방에서 나오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식당에 물었더니 식사도 병실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서 대충 안에서 해결하고 있는 듯 했다.
정말 나올 일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듯 했다.
분위기로 봐선 뭐든 말을 꺼낸 게 분명한데, 예상과 달리 너무 잠잠하니 속이 탔다.
안다고 한들 자신이 끼어들어서 뭔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기 힘든 걸 어쩌겠는가.
애타는 시선을 문을 향하던 화련은 제 손목시계를 봤다.
무한정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류 현이 저러고 있으니 자신이라도 전화대기를 하고 있어야 하니까.
어제만 해도 강 찬이 워싱턴에 마련된 창고에 쌓인 재료에 대한 사용 가능한지 물어서 대신 허락해주었고,
이틀 전에는 연방정부에서 협상안에 대한 의논을 하려고 찾아온 것을 요약본을 받아두고 돌려보냈다.
엄청나게 바쁜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고 현 상황에서 그게 가능한 건 자신뿐이었다.
희란은 혼자 거동할 수 있게 된지 오래 되지 않아서,
승하는 백혜라에게 류 현의 회귀에 대해 말하느라 이 역할을 맡을 수가 없었다. 승하가 놀고 있더라도 맡겼을 것 같진 않았지만.
어찌됐거나 화련이 스스로 정한 1시간이 다 되어갔다.
‘오늘도 허탕인가.’
화련은 소리 없는 한 숨과 함께 미련 없이 자리를 정리했다.
의자를 챙겨서 내려가려던 화련은 잠깐 멈춰서서 한 번 뒤를 슥 돌아보곤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
밑에서 경계 병력 넷 가량이 안으로 들어온 걸 보니 또 높으신 분께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
“아니 그러면 대장 오빠는...”
“갑자기 왠 대장 오빠? 그냥 류 현 오빠가 더 맞는 말 아닌가?”
백혜라가 샐쭉 눈을 흘겼다.
승하는 그에 응해 하고 싶은 말이 없진 않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감이 아니라 반복학습의 승리였다.
아까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서 식사를 하다가 조금 풀린 분위기에 농담 한 번 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잔소리만 잔뜩 들었다.
그 전에도 평소 같으면 대충 고개만 내젓고 넘겨줄 농담에 백혜라는 두 세 마디가 아니라 열 마디로 대응했고,
승하는 오늘은 장난치지 말고 애 말이냐 잠자코 들어줘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대장 오빠는 지금 이 얘기를 세아 언니한테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글쎄, 지금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네-. 난 걔가 이번에도 운도 못 띄웠다고 해도 안 놀랄 자신 있어. 걔 보기보다 멘탈이 물렁물렁해. 몇 사람 한정이긴 한데...자기 누나가 상대면 그런게 좀 더 심해지고.”
“아니 그럼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에요? 푹 쉬게 해줘도 모자랄 판에.”
“다음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
백혜라가 대꾸를 포기하고 승하의 얼굴을 살필 정도로 단호한 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류 현 걔가 알고 있는 미래랑은 한참 달라졌어. 다른 것도 그렇지만 네임드 몹들의 강함이 가장 큰 문제지. 전생에서도 화룡 상대로는 고생을 심하게 했다고 하긴 했는데...이번에 잘 풀려서 한 번으로 끝난 거지. 운이 없었으면 최소 두 번은 그 꼴을 봤을 거야. 그랬으면 우리가 버텨냈겠어?”
“그건...”
못 버텼을 것이다. 백혜라는 확신했다.
그녀가 ‘비아트리체’ 전에서 발동시킨 ‘종언의 불’은 단순히 성능좋은 필드 디버프 마법 같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다뤄서 대부분의 기능이 날아갔지만 ‘비아트리체’라는 괴물의 힘을 억제할 수 있는,
자신으로서는 두루뭉술한 설명도 내놓기 어려운 고차원적인 무언가 였다.
그런 힘을 다루는 존재와 맞붙는 것 자체가 생사를 장담하기 힘든 일인데,
연달아서 ‘비아트리체’와도 싸운다?
‘비아트리체’가 팀이 회복해줄 때까지 기다려도 승산을 점치기 어려울 것이다.
‘비아트리체’전에서 ‘종언의 불’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살바토르’의 배려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니까.
이기더라도 살아남는 인원이 반이 안 되는 상처뿐일 승리일 가능성이 클 테지.
그 반절도 안 되는 생존자 중에 류 현이 포함될 가능성은 꽤 높겠지만,
그런 상황까지 갔다면 무엇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류 현이 맡은 역할은 지금껏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뿐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역할 아닌가. 백혜라는 류 현이 여태 별다른 이상증세를 보이지 않고 꿋꿋이 버텨온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탱킹 전문 플레이어라도 류 현처럼 몸을 희생시키면서 스트라이커 역할까지 겸하는 건 본적이 없으니까.
말이 탱킹 전문이지 전문가라고 칭할 경험이 쌓이기 전에 그들 대부분은 은퇴한다.
사람의 신경은 그 정도의 고통을 반복해서 견딜 수 있게 설계되어 있지 않으니까.
플레이어라고 해서 별 다를 게 없다는 걸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닿은 백혜라는 승하의 의도를 이해했다.
승하의 생각이 과하지 않다는 것도.
“뭐 사실 얘기 한다고 네임드 몹이 약해진다든가 식으로 상황이 호전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에 짐 짊어지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하는 승하를 백혜라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로 기약이 없긴 하구나. 그래도 말 좀 예쁘게 하지. 친구라고는 몇 있지도 않으면서. 그것도 다 그 사람이랑 연결되어 있는데.’
“...계속 톡톡 쏘다가 사이 틀어져도 난 몰라요.”
“그렇게 되면 너 붙잡고 술주정이나 부려야지.”
백혜라는 뭐 이런 사람 다 있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반쯤 장난이 섞인 반응이었기에 승하도 히죽히죽 웃는 것으로 응대했다.
두 여자가 이후 조금 더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흐윽...”
아래층에 있는 류 현은 누이의 눈물을 닦아내주느라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