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협상권을 미국에게 넘길 의사가 있다는 걸 밝힌 순간부터,
리어던은 흥분상태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거나 해서 정계에서 보낸 수십 년이 헛되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럴만한 상황이긴 했다.
네임드 몹, 그것도 언데드도 아닌 용종이 낀 환란으로 나라가 절단날 뻔한 위기를 두 번 연속으로 넘긴 입장이다.
말단 공무원이라도 죽을 만큼의 격무에 시달릴 텐데,
그 정점에 앉은 대통령의 오른팔 아닌가.
리어던이 느끼고 있는 심적 부담감은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던컨에게 위임받아 소화하고 있는 업무량은 그의 나이에 과로사를 걱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그러고도 향후 몇 년간의 조국에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힘든 상황이었다.
강 찬의 귀화는 미국이 여태 노력했지만 주변과의 격차가 벌어지기만 한 인프라 구축에 희소식이 분명했으나,
그 대단한 강 찬조차 무에서 유를 만들지는 못한다.
이번 ‘신의 방패’에서처럼 결과물의 가치가 상궤를 벗어난 수준이라,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수준으로 가치창출을 해낼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미국은 그것조차 결실을 보는 순간까지 무난하게 버텨낼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뭔가가 있어야 뭘 뽑아낼 수 있고, 그 뭔가는 귀화 협상 중에 강 찬이 요구한 필수 목록들만 봐도 굉장히 비쌌다.
가격이 비싼 건 둘째 치고, 직접 플레이어 전력을 투사해서 구해야하는 것들도 상당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당분간은 그 재능을 활용하는 건 고사하고, 연구재료를 대주는 것도 벅찰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건 지금 워싱턴의 연락체계를 마비시키고 있는 ‘신의 방패’로 재미 보는 것이겠지만,
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에둘러서 떠보려고 해도 강 찬은 요지부동이었다.
법적으로 장난질을 치기에는 그의 뒷배가 너무 무시무시했고.
결국,
이 건수가 성공리에 마무리 되더라도 외부에 떠들어 댈 수 없는 게 리어던의, 미 행정부의 입장이었다.
당분간은 몸을 사리면서 외부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데 힘을 써야 할 판이었다.
그랬을 터였는데,
갑자기 류 현이 외부에서 돈이든 인력이든 당겨올 만한 협상권을 턱하고 맡겨준 것이다.
리어던의 머릿속에는 이미 어느 국가로부터 얼마나 어떤 식으로 뜯어낼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결과물을 국내 어디에 투입해서 복구를 시킬지 또한.
정말 드물게도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고 있으면서도 즐거워서 그것이 잘 제어 안 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당연히 그 상태에서 뭔가 더 논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리어던은 체신 머리 없이 다시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가와 떨리는 손을 단속하고 류 현에게 던컨과 보좌진과의 상의를 거쳐 협상 전에 꼭 자리를 만들겠노라고 했다.
‘신의 방패’를 원하는 나라들과의 협상 방향성에 대한 상의도 그 때를 기약했다.
류 현은 솔직히 그리 크게 상관하고 싶진 않았지만 웃는 낯으로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리어던은 그대로 나이를 잊은 듯 날듯이 사무실을 나섰고,
류 현은 들어올 때 보았던 공무원 둘의 의혹어린 시선을 받으며 임시 병동으로 돌아왔다.
병동이라기에는 머물고 있는 자들이 용잡이 팀뿐이었지만,
그들의 요양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시설이니 그리 말해도 무리가 없을 터였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봐서는 곧 병동 이름표를 떼어버리고 별장 비슷한 것으로 바뀔 것도 같았지만.
아무리 말을 해도 여전히 그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경계 병력의 벽을 지나,
눈인사라도 건네게 된 의사들을 두어 명 마주친 후 류 현은 제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고, 고생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요. 오래 걸릴 게 아니라고.”
“뭐지, 걔네 막 사람 뜻 곡해해서 혼자 이상한 상상하면서 막 떠보고 그래야 정상인데. 아니면 그냥 파투난 거 아냐?”
“악담을 해도 좀...”
“그래서 뭐래?”
세 여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류 현은 대답 보다는 태연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대충 침대에 드러누워있던 승하가 반쯤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내주었다.
화련이 아예 일어나라는 듯 눈총을 보냈지만 승하는 모른 척 했고,
류 현은 두 여자의 유치한 싸움을 못 본 척했다. 경험상 끼어들면 끝이 없는 일이다.
대신 슬쩍 흘려보낸 승하의 질문에 대꾸했다.
“던컨 대통령과 의논을 해보겠다고 자리를 파하긴 했지만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것봐요, 마스터가 해놓은 게 얼마인데 간을 보겠어요?”
“...이렇게 빨리? 너 나간 지 한 시간도 안 됐어. 걔네가 순수하게 받아들일 리가 없는데...”
“가만 보면 이 언니도 인간불신 말기라니까.”
“야, 나는 그래도 근거가 있거든? 내 경험 뿐이긴 하지만...”
“언니보다 마스터가 그런 경험은 더 많잖아요.”
“끄응...”
승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류 현이 구원을 손길을 내밀었다.
“뭐 저도 이렇게 빠르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시지 말라고 했고요. 저는 최소 저녁까지는 그 쪽에서 같이 먹게 될 줄 알았거든요.”
이제 막 점심시간 대에 진입한 시간을 생각하면 이 상황을 빠르게 해결되었다는 말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승하가 거 보라는 듯이 어깨를 들먹이며 화련을 쳐다보자,
화련은 철딱서니 없는 맏언니를 보는 시선을 한 번 보내고는 류 현의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류 현을 달래려는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여태 해온 일이 있고, 여태껏 그 양반들도 그걸 부정하진 않았잖아요. 속으로는 주판알 튕기고 있긴 하겠지만...”
“예, 조력을 구할만한 국가 수뇌부 치고는 순수한 사람들이죠.”
“그렇죠. 그 할아버지들한테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런데...최소한의 염치도 있고, 또 호의는 호의로 순순히 잘 받아들이는 편이잖아요? ‘살바토르’가 핵미사일로 협박했을 때도 그렇고...”
“아마 다른 나라였으면 우리가 뭐라고 하든 간에 아마 우리를 바치는 것부터 고려했겠지요. 핵이 없는 곳이라도 그랬을 테지요.”
“그 할아버지들이 생각보단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결국 마스터가 해온 일을 보고 그런 결정을 내린 거잖아요? 그러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 건 옛저녁에 졸업했거든요. 류 현은 뒷말을 그냥 삼켰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을 끊긴 화련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나니 그래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승하마저 둘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판단 같지는 않았다.
류 현은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살짝 박수를 쳤다.
“제가 들은 바로는 바로 던컨 대통령과 상의를 하러 간 것 같습니다만 아마 저를 부르는 데는 한 최소 이틀은 더 걸릴 겁니다.”
제럴드 던컨은 두 번 묻는 법이 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두 번 묻는 경우는 있어도, 자리를 파하고 다시 했던 질문을 다시 하기 위해서 불러들여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자리를 파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건 류 현을 상대할 때로 한정된 맞춤형 태도였지만,
전생에서 제럴드 던컨과 인연이 전혀 없었던 류 현은 그의 성정이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다.
그런 착각 하에 류 현은 팀이 보장받을 수 있는 자유 시간을 대충 계산했다.
오희란이나 백혜라는 이제야 혼자서 거동이 되는 상태가 되었으니 끽 해야 바깥바람이나 잠깐 쐬어주는 수준일 테고,
라비 라자가 보유한 ‘엑스칼리버’ 때문에 계속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으니,
확실하게 마음 놓고 놀 시간을 말해주고 싶었다.
“1차 판매 대상들을 모으고, 그 구매자들이 소집에 응하는데 대충 나흘에서 이레 쯤 잡으면...한 일주일 정도는 아예 일정이 비겠군요.”
“오, 진짜? 난 몸만 추스르고 또 던전 가서 독적응 훈련할 재료를 모아야 합니다. 이럴 줄 알았는데.”
“...아니, 그러기에 쉬실 수 있을 때 던전 들어가지 말고 그냥 쉬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난 네 얘기 하는 거거든? 너 맨날 나보고 무모하니 몸 좀 사려라 이러는데 제일 안 지키는 건 너잖아.”
“저야 몸이 되니까...”
“그럼 너 돌아올 때까지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네 누나한테 ‘그 얘기’도 해두던가.”
순간 방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자리를 지키곤 있지만 꾸벅꾸벅 졸려고 하는 희란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하에게 응원을 보탤 틈만 보고 있던 화련도 입을 반개한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화련은 빨리 정신을 수습했고, 그녀는 창 대신 써도 될 맹렬한 시선을 승하에게 쏘아 보냈다.
세계 최고를 자칭해도 무방할 마법사의 감정이 담긴 시선에 볼이 저려오는 듯 했지만,
승하는 내친걸음을 다 걸어버렸다.
“나도 이 일주일 내로 혜라한테 말할 거야. 내가 뭐라고 하든 간에 안 떨어져나갈 애니까..별 수 없지. 그러니까 너도 마음 정해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둬. 내가 대충 눈치 보니까, 네 누나도 뭔가 숨기고 참고 있는 거 같더라. 나한테 갑자기 말 걸 정도면 말 다한 거지. 뭐 결국 아무 말도 안 한 셈이긴 한데. 앞으로 계속 이러면 글쎄...”
고개를 휘휘 내젓던 승하는 그대로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휘적휘적 문밖으로 사라졌다.
승하를 말을 끊어서 한 소리 하려다가 기세에 밀려 다 듣게 된 화련은 고개를 떨군 류 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더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뒤늦은 류 현의 대답을,
대답이라기보다는 다짐에 가까운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을.
도무지 착각으로 얼버무릴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하게.
“...그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