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화 〉탐식마(貪食魔)
“아니요, 부인. 그건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네? 아뇨. 전화 뺑뺑이를 돌리지도 않을 거고, 증명서를 가져오셔야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저희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확답도, 조치도 취해드릴 수가 없다는 의미에요.”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렇게 치면 동네 꼬마가 부인댁 뒤뜰에 공을 떨어뜨리면 그게 부인의 소유가 됩니까? 예?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이런 젠장.”
“또 진상 전화에요?”
“폴, 나 직장을 잘 못 구한 거 같아.”
“음, 28년차 직장인이라고 자아성찰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긴 하죠. 그런데 어쩌죠,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 커피뿐인데요.”
“...고마워. 잘 마실게.”
플라스틱 컵 안의 검은 내용물을 보자마자 몸이 반사적으로 ‘속쓰림’이라는 신호를 보내왔지만 글렌 쿠퍼는 내밀어진 아메리카노를 받아들었다.
이거라도 없으면 등받이에 기대고 10초 안에 꿈의 나라로 떠날 것만 같았다.
한 모금, 너무나도 익숙하다 못해 속이 쓰려지는 맛이라고 재명명해도 될 아메리카노 향에 반사적으로 정신이 드는 기분이 들자 글렌 쿠퍼는 그제야 폴 루카스를 제대로 올려다 봤다.
폴이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했다.
“이번에는 또 어디에요?”
“나도 몰라. 대충 흘려들어서. 대충 공화당에 괜찮은 끈이 있는 부잣집 마나님 같던데.”
“허어, 진짜 이젠 개나 소나 다 달려드네요.”
“그러게 말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영국에 사는 sir 아무개씨들한테서 연락이 왔었는데.”
“그 양반들은 무슨 100년 전쯤에 살고 있는 거 같아요. 안 그래요, 글렌?”
“아니면 2차 대전기쯤 살다가 왔나 보지. 자기들이 우리 외면한 거 싹 잊은 거 보면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건 분명하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영국 총리가 입턴 거 들어보셨어요?”
“뭐라고 했다고는 들었는데 내 상태가 이래놔서 들었어도 기억 못하지.”
“이번 일이 양자 간의 동맹을 더 공고히 할 기회라던데요.”
“하, 끝까지 사과는 안 하겠다는 거로군.”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사과하면 순번이 밀린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쪽도 아주 난리랍니다.”
“그건 자네가 말 안 해줘도 알아.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체험 중이었으니까. 아직도 입에서 단내가 나는 거 같아.”
“그래도 늦어도 다음 주까지는 민원 센터를 복구시킨다니까 다행이죠.”
“그래, 이번 주 내 근무가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는 걸 빼면 말이지. 젠장, 이러려고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닌데.”
“에이, 우리 정도면 근무 환경이 훌륭한 거죠. 다른 부서 친구들 얼굴 보셨어요? 당장이라도 은퇴선언하려는 걸 부장들이 갈궈서 막고 있던데요.”
“...그런 얘기를 하면 내가 뭐가 되나?”
“아니 뭐, 저는 힘내시라는 의미로. 글렌이 그렇게 바라던 빅 딜이 지금 왔다 갔다 하는 중이잖아요?”
폴의 말에 글렌은 다른 대꾸는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랬다. 고위공무원단의 일원인 글렌 쿠퍼가 전화 상담원이나 할 법한,
아니, 졸지에 떠맡은 전화 상담원 역할을 감내하고 있는 건 그가 공무원직에 몸을 던지고 꿈꾸었던 광경이 이루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에 남을 빅딜의 체결.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진 못해도, 역사에 남을 사건에 기여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그렇게 생각 없고 무모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어진 머나먼 젊은 나날의 편린이긴 하나,
낡아버린 몸조차 들썩거릴 정도로 그는 흥분상태였다.
‘신의 방패’.
그 오만한 이름에 걸 맞는 전략 무기급 아티펙트에 대한 협상은 빅 딜이라 할만 했다.
‘대소환’ 이후로 박살나버린 주거지의 안정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물건을 말 그대로 독점하고 있는 상대와 가장 빠른 번호표를 뽑아들고 협상 중이었으니까.
그 공급자가 개인이라는 것과 그 뒷배의 행보를 볼 때, 첫 거래 대상은 단순히 첫 고객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단순 망상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그 공급자의 귀화 논의도 같이 오가는 중이지 않은가.
그 뒷배가 인류 역사에 존재한 적이 없는 특이한 존재라 쉽사리 장담하긴 어렵겠지만,
강 찬의 귀화가 이루어진다면 어느 나라든 필요로 하는 재화를 독점하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될 게 분명했다.
동부가 박살나버리고 그 난리 통에서 기적적으로 무사하긴 했으나,
주변의 라인은 그렇지 못한 워싱턴에 빠르게 돌아온 죄로 맡게 된 높으신 분들 상대하는 전화 상담원 노릇도 그래서 감내해낸 것이다.
그의 일을 대신할 능력 있는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높으신 분들은 보통 사람들이 안고 살아야하는 근심걱정과 거기가 먼 대신에 유치하게 구는 것에 열중한 이들이 많았다.
자신의 전화를 받는 놈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지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신의 격에 맞는 직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아무 의미도 없는 자신만의 규칙을 강요하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게 평범해 보일 정도로 많았다.
“문제는 저 날파리들 때문에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는 거지. 염병할 놈의 미디어. 저놈들 어디가 귀족적 고귀함이 있다는 건데?”
그냥 진상들이라면 글렌 파커 또한 다년간의 공직생활로 단련된 정치적 수사로 물 흐르듯이 모두 흘려보냈을 것이다.
문제는 그냥 지체 높은 진상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놈들은 약 육일 전,
제럴드 던컨의 재임기간 중 처음으로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집기부수는 소리가 나오게 만든 ‘신의 방패 유출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작자들이었다.
정확히는 정보 유출이었지만, 이만한 기밀이 유출된 것 자체가,
연방 정부가 입을 피해와 수습을 위해 들여야 하는 품을 생각하면 실물이 유출된 것과 별 다를 게 없었다.
글렌이 진상들을 상대하는 상담원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직책을 가지고서도 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이거였다.
연방 정부에 자신들의 프락치를 꽂아 넣어 놓고 기밀을 빼돌렸음에도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낸 것을 숨기기는커녕,
언제 그것을 받아갈 수 있냐고 묻는 작자들.
그 뻔뻔함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행태에 글렌은 완전히 질려버렸다.
당분간은 저 치들이 심어놓은 프락치를 솎아내기 힘들다는 사실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격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온화한 내면을 가진 제럴드 던컨마저 꼭지가 돌게 한 기밀 유출 사태에도,
당장 프락치들을 솎아내겠다고 나서기에는 워싱턴으로 빠르게 복귀한 행정부의 상태가 너무 좋지 못했다.
이번 ‘비아트릭스’와 ‘살바토르’ 사태에도 불구하고 인력 손실이 거의 없었으나,
인력 손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기뻐하기에는 그들의 손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나 많았다.
인력 보충이 힘들다는 것이 절망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말이다.
“당장 급한 건 민원 센터 복구가 아니라 각하의 위장염 호전과 교대 인력이야. 그 빌어먹을 놈들 개소리는 대충 흘리면 그만이지만, 병동 쪽에 파견 가 있는 친구들은 교대가 절실해.”
“안 그래도 던전부 장관님이 다시 LA로 날아가셨다 하더라고요. 근데 거기 또 대규모 시위 일어났던데 인력을 뺄 수 있나?”
“그쪽에 폭동이 일어났어도 빼야지. 병동 쪽 가드가 풀려서 일 터지면 그 시위대는 귀엽게 보일만한 폭동이 일어날 테니까. 근데 왜 그 양반이 간 거지? 그 양반 강 찬 귀화 건도 맡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정확히는 대통령 각하 보조죠. 아무래도 소란이 진정되기 전에는 진전이 없을 거 같아서 그 쪽으로 간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장군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징징거리는 통에 장관급이 직접 가서 인솔하는 게 아니면 어떻게 될지 장담도 못 하니까요.”
“그냥 공항을 죄다 틀어막고 통제 해야 했는데.”
“그랬다간 진짜로 폭동이 날 걸요. 지금도 왜 아직도 계엄령 유지 중이냐 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중부 친구들은 아주 대놓고 주 경찰이랑 자경단이 섞여 다닌다던데요.”
“진짜 지긋지긋한 놈들이야.”
중간 중간 홀짝거렸더니 어느 새 아메리카노가 바닥을 드러냈다.
이젠 아메리카노 비슷해 보이는 액체만 봐도 자동으로 속이 쓰려왔지만,
당장 카페인 공급이 끊기면 아무것도 못할 상태라 글렌은 텅 빈 용기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요.”
“응? 폴 자네는?”
“저야 뭐 교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요. 부족하실 줄 알고 입도 안 댔습니다.”
“...나중에 꼭 갚지. 그런데 오면서 병동 쪽은 보고 왔나?”
“예, 물어보실 줄 알고 당연히 보고 왔죠.”
“자네는 정말 훌륭한 보좌야. 잠만 안 밝혀도 완벽할 텐데.”
“보좌가 너무 완벽해도 상관이 부담을 느끼지 않겠어요? 병동 쪽은 이상 무였습니다. 단 한 명도 나오질 않았답니다. 그 친구들 진짜 이상할 정도로 외출을 안 한다니까요.”
“셋이 너무 빠르게 외부 활동을 시작해서 그렇지 원래라면 그게 정상이지. 예전에 퍼플 던전 원정 다녀온 팀도 그보다는 오래 쉬었어. 그 셋도 다 회복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마탑’에서 온 치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던데요. 심심하면 여기와서 포션이니 뭐니 저쪽에 전달 좀 해달라는 거 보면...”
“그 치들 그러는 거 한 두 번 보나? 평소 태도 생각하면 지금은 있는 예의 없는 예의 다 짜낸 거야. 그놈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저밖에 모르는 놈들인데.”
“아무튼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위대랑 사진 찍으러 LA가, 볼 일 있다고 인도까지 갔다 오더니 갑자기 저렇게 틀어박혀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지지부진 하던 협상 진행은 아예 멈춰버렸다.
높으신 분들은 미리 얘기를 들은 것인지,
아니면 저러는 내막을 아는 것인지 별로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행동거지로 봐서는 사정을 모르는 게 분명한 ‘마탑’에서 온 인원들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평소 같은 무례함은 어디 팔아넘겼는지 그네들의 기준으로는 아주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용잡이 팀이 머무르고 있는 병동에 포션을 찔러주면서 소식을 들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폴과 글렌 같은 이들에게는 그런 행동 자체가 엄청나게 신경 쓰이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다.
‘마탑’에서 들쑤시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오전 동안은 그들의 단속 겸 해서 이곳에서 업무를 보겠다고 저 건너편 소회의실 하나를 차지한 부통령의 존재도 그렇고.
“폴, 입 조심해. 유출 건을 보고 느낀 바도 없나? 예전처럼 편하게 입을 놀리면 안 되는 때야.”
“저도 알죠. 지금은 우리 둘 뿐이니 이러는 거고요. 제 마누라 앞에서도 이런 소리는 안 합니다.”
“거 영광이구만 그래.”
“아- 어째됐건 간에 빨리 협상 좀 끝내줬으면 좋겠네요. ‘마탑’ 쪽에서 자꾸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분위기가 이러면 업무 보기도 힘들...”
“본의 아니게 업무 보시는데 폐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안이 사안인 터라.”
정말 마지막으로 불평을 내뱉으려던 폴 루카스는 낯선 목소리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왜냐하면 낯설지만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릴 수 있게 그의 기억 폴더 중에서는 가장 상위에 올려놓은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부류에 넣어놓은 목소리.
폴은 먼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상사의 표정부터 살폈다. 일종의 현실 도피 시도였다.
그러나 익숙하다 못해 꿈에서도 보곤 하는 상사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폴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 같은 고개를 억지로 돌려 기척도 없이 제 뒤에 선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폴 루카스는 그 사실을 기뻐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불평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이,
그것도 도무지 자신이 비벼 볼 수 없는 자가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오면 누구든 그럴 터였다.
폴의 머릿속은 갓 태어났을 때보다 더 하얗게 탈색되었다.
다행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그의 상사도 비슷한 상태였다.
“어어...”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마탑’측 인원들이 더 폐를 끼치지 않게 말은 해 보겠습니다. 그럼.”
살짝 목례 해보인 후 떠나가는 류 현을 두 남자는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