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화 〉탐식마(貪食魔)
스읏-
들릴 리 없는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모두가 들은 듯 했다.
너무 부드러워 공기가 밀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내려 베기.
부드럽지만 맥이 없진 않았다.
라비 라자를 비롯한 인도 측 플레이어들은 속으로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순수하게 경탄할 수 있는 기예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잠깐이나마,
이전에 류 현이 보여준 퍼포먼스에 내내 가슴을 짓눌리는 것 같던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자,
그들은 검이 그려내는 궤적에 해방감마저 느꼈다.
유니크 아티펙트 파슈파타에 대한 검증에 대한 생각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그 결과물만 봐도 더는 신경 안 써도 된다는 게 더 적합했지만.
츠익- 쯔억- 쿠웅!
정확히 정수리부터 반으로 갈라진 지룡의 몸뚱이가 뒤늦게 바닥을 뒹굴었다.
이 화이트 던전의 주인치고는 허망한 최후라 할만 했지만,
그녀의 검격을 본 이들 중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넘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가장 놀란 것은 그들 중 가장 강해 좀 더 면밀히 검격을 살필 수 있었던 라비 라자였고.
“이게 최대치인 거 같진 않긴 한데...이 정도면 괜찮나?”
“예, 뭐 사용자 숙련도 차이가 엄청날 거 같긴 한데...솔직히 다른 사람이 쓸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승하 씨 몸 생각도 하셔야죠.”
“으엑, 방금 그 대사는 좀 그랬다.”
그 놀라움은 벌써부터 저 파슈파타가 자신들의 소유인 양 말하는 무례함마저 문제 삼지 못할 정도였다.
현 소유자인 라비 라자조차 검성에게 훨씬 잘 맞는 아티펙트라고 혼자 수긍할 정도니 말 다한 셈.
오늘 처음 쥔 아티펙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능숙하다.
처음이 아니라, 원래 검성 본인의 소유 아티펙트였으며 잃어버린 것을 오늘에야 찾았다고 거짓말을 해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만 했다.
정작 본인은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그조차도 만용이나 허세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 뒤에 어떤 경지가 더 있을지 상상조차 가질 않았지만,
검성이 숨겨둔 뒤가 더 있을 거라는 느낌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일신이 쌓은 무기술에 목숨을 내맡기는 스트라이커로서 가르침이라도 청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외부로 나갈 기회가 있었을 때 한 번이라도 저 여자와 만나봤으면 좋았을 것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어도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인도 플레이어들에게 마녀라는 별칭을 떨친 마람 압둘아지드 하나에게 휘둘리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런 후회의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다.
그렇다고 라비 라자는 외부의 시선대로 힘만 쎈 멍청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매달려서 현재를 허비하는 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검성이 저토록 파슈파타를 잘 다룬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억지로 팔겠다고 애원할 필요는 없겠군.’
둘이서 말하는 걸 보면 검성 개인적으로도 퍽 마음에 든 듯 싶었고,
드래곤 슬레이어로 유명해진 류 현 또한 그녀에게 쥐어 줄 생각이 만만한 듯 했다.
거기에 성능까지 스스로 긍정하는 걸 보면 상정한 최악의 사태 중 하나는 빗겨나간 것으로 보였다.
‘그래, 저 정도 되는 검사에게 걸 맞는 검이 잘 있을 리가 없지.’
그의 측근들은 상대가 너무 강한 것에 강한 우려를 드러내었지만,
라비 라자는 반대로 상대가 너무 강했기에 그들이 공식적으로 협상에 응한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라고 해석했다.
레이드 생중계 이후 유니크 아티펙트의 가치를 인지한 인간들이 슬슬 대의를 운운하며 수작질을 하고 있지 않은가?
협상에 동의하고 이곳으로 날아와 수십 명의 증인을 남기는 일 자체가 그들에겐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라 할만 했다.
후에 이 이야기가 그렇지 않아도 용잡이 팀을 뜯어먹으려고 간보고 있는 자들에게 들어간다면 어찌 될지는 그들이 더 잘 알 테니까.
아직은 기밀이 잘 유지 되고 있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없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조국처럼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는 상태의 집단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미국 내부에 겨우 깔아둔 라인이 노출될 걸 각오하고 빠르게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유니크 아티펙트 정도 되는 물건이라면 빠르게 던지든,
느리게 던지든 눈에는 띄겠지만 그의 앞에 놓인 협상물들이 많아지면 조건을 많이 달아야 할 테니.
그리고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의 충성스러운 측근들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니라 상품 설명까지 친절하게 해주러 온 것 자체가 성공이라 할 만 했다.
막말로 그들이 파슈파타를 그냥 원한다면 위치만 파악하고 협상을 거부한 뒤에 조용히 이곳으로 와서 무력행사를 해도 누가 그들을 제지할 것인가?
거기에 화련이라는 여자의 정신 나간 텔레포트 마법을 선보이지 않았나.
인간 마법사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경지라고 생각된 이적의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행사.
마법에는 문외한인 라비 라자가 보아도 정말 아무런 무리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마법이었다.
측근 중 마법사들은 마법 경지 그 자체에 얼이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라비 라자는 그것을 보고 용잡이 팀에 대한 내부 평가 한 줄을 더 추가했다.
누가 어디 있든 한 순간에 죽일 수 있는 암살자.
인간 마법사들이 텔레포트 흉내는커녕,
리치 같은 고지능 괴수의 텔레포트에 대한 방어책조차 제대로 못 내고 있는 판국이니 저 마법은 누구든 죽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전가의 보도나 다름없다.
유일한 방어수단으로 보이는 ‘신의 방패’는 그들 휘하에 있는 장인이 개발한 아티펙트.
‘마탑’이 설설 기고 있다는 소식까지 더해 보면 원천기술을 독점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누구든 쳐 죽일 수 있는 암살자가 최고의 방패까지 독점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런 상대가 대화에 응한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들이 인도에 막 도착했을 때는 그 방패의 성능을 의심했으나,
검성이 지룡을 단칼에 반으로 갈라버리기 전에 30분 넘게 지룡의 생물체가 아니라 건물이 들이받는 것 같은 맹공을 막아내고도,
별 흠집도 없는 반투명한 방어막을 보고 난 뒤에는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완전 전개도 아니고 극히 일부분만 펼쳐 보인 것이니,
개인이 아니라 지형에 설치를 하고 마나맥을 빨아들이게 해서 완전 전개를 하면 요새화 시킬 수 있을 터였다.
이마저도 개발이 끝난 게 아니라 조정 과정에 있다고 하니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제시할 수 있는 게 파슈파타 뿐이고 그마저도 완전히 넘겨줄 수 없는 입장에서는 번호표가 뒤로 밀리면 어떤 장담도 할 수 없게 될 테니.
‘조금 미진했어도 되었을 것을...완성도가 너무 뛰어나서 꼬이게 될 줄이야...’
원래는 조금 더 배짱을 부려볼 요량이었다.
‘비아트리체’ 레이드 생중계 때 사용했던 유니크 아티펙트들의 엄청난 화력의 비결 같은 걸 물어볼 생각이었다.
자세한 정보가 풀려있는 건 아니었지만, 류 현이 그 때 사용했던 아티펙트 두 가지는 명백하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보유한 파슈파타와 비교해도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사용자의 역량 차 때문일 수도 있긴 했지만, 일단 한 번 떠볼 수는 있는 것 아니겠는가.
대여 기간을 늘려주는 식으로 협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완전히 글러먹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배짱을 부릴 상대도 아니었고,
직접 본 ‘신의 방패’는 그렇게 수작질을 해서 후려치는 게 가능한 물건도 아니었다.
청뢰에 대한 용잡이 팀 내부 지분 공증을 협회가 해준 기록이 없었다면 말조차 꺼내기 힘들 판이었다.
그 기록마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무의미할 가능성이 높아보였지만, 어쩌겠는가.
비벼볼 언덕이 그 뿐인 것을.
라비 라자는 보스몹 사체 위로 열리고 있는 출구로 바라보고 있는 두 남녀에게 헛기침을 하며 다가갔다.
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니 숨통이 막히는 착각마저 들었지만 다시금 못을 박아야 했다.
파슈파타에 대한 장기 대여가 최대한의 양보라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도 별 반응이 없긴 했지만,
저들의 시위 아닌 무력시위를 보고 ‘신의 방패’의 위력까지 견식하고 나니 그 사이 자신의 말을 잊었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다.
저쯤 되면 자신이 뭐라고 하든 실력을 보여주고 나면 대충 철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아 맞다. 자, 여기.”
검성은 꽤 즐거운 표정으로 장난치듯이 손가락 두어 개로 빙빙 돌리던 대검자루를 미련 없이 슥 내밀어 오는 게 아닌가.
그가 바로 받아들지 못하고 잠깐 굳어있자 류 현이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꽤 마음에 드신 거 아니었습니까.”
“응?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어차피 오늘 끝낼 건 아니라면서?”
“정확히는 못 끝내는 겁니다만. ‘마탑’이 일단 제일 먼저 찾아왔으니까요.”
“뭐래, 원하면 ‘마탑’이고 뭐고 쌩까고 거래 할 수 있으면서.”
“그 치들한테 받아먹을 거 많으니 당장은 좀 그렇죠.”
“그을쎄. 걔들 못 가지면 부숴버리겠어 이러고도 남을 놈들이라.”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요. 그건 그거 대로 나쁘지 않겠네요.”
“네가 퍽이나.”
거의 떠넘겨주다시피 파슈파타를 돌려주고는 그대로 미련 없이 출구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을 라비 라자는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던전 밖에 나오자마자 귀신 같이 다가온 화련이 모두를 처음 왔던 접선 장소로 옮겨주고,
간략한 작별인사와 당부를 남기고 그들이 떠나갈 때까지 계속.
그대로 망부석이 될 것처럼 류 현과 두 여자가 사라진 지점을 바라보던 그에게 측근 중 하나가 다가와서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대장, 괜찮아? 그래도 ‘마탑’과의 협상이 끝나는 대로 오겠다고 하니까...”
“...미국행 티켓을...아니, 비행기를 수배해야겠다.”
“뭐? 지금 이 상황에 출국하게?”
“지금이 아니면 그럴 기회도 없을 거 같다. 칼리프 클랜 쪽에는 슬쩍 용잡이 팀이 왔다간 거 흘리면 아마 확인하느라 당분간은...”
“대장! 그 마녀가 들어왔다는데!”
“젠장, 생각할 시간도 안 주나. 아무튼 너는 따라오지 말고 비행기 수배 해놔! 없으면 밖에서라도 매물 찾아서라도!”
넋 나간 사람처럼 굴던 것이 거짓말처럼 라비 라자는 대검을 등에 매고 어느새 달려온 차를 향해서 뛰었다.
마람 압둘아지드를 향한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미국행을 위한 조율로 가득했다.
정확히는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떠나버린 이들을 어떻게 꾀어낼지에 대한 궁리였다.
불행히도 삼일 뒤에 그 계획을 전부 폐기하게 되었지만.
연방 정부에 심어둔 라인을 포기할 작정으로 도박수를 던질 용기가 있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