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탐식마(貪食魔)
“...제 말이 잘 못 전달 된 겁니까?”
“아뇨. 마스터 말씀대로 하면서 만든 건데요. 하루 8시간씩 자고, 희란이랑 혜라 봐주고 저도 따로 4시간 씩 쉬었어요.”
“그 외 시간 동안 틈틈이 만드신 게 아니고요?”
“에이, 저도 그렇게 막 나가진 않아요. 상태가 그리 썩 좋지도 않아서 하라고 시켰어도 못 했을 걸요. 얻어걸린 게 반 넘어요.”
류 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손안에 굴러다니고 있는 약간 굵직한 옷핀 같은 것을 봤다.
핀의 머리 부분에는 네일아트 보석 같은 푸른 광물이 달려있었는데,
그 협소한 공간 내부에서도 검은 티끌과 하얀 티끌들이 소용돌이치며 신비로운 파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에게 내밀어도 뭔지 감을 잡기 힘들 정도로 마력파동이 느껴지질 않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아티펙트였다.
일회용이고, 일회용치고 정도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아티펙트와 비교해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투입되어 가성비를 따지는 의욕조차 꺾을 정도로 몸값이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만한 몸값을 하는 물건이었다.
그럴 일은 잘 일어나지 않겠지만, 여차할 때 목숨줄이 되어줄 수 있는 것.
화련의 텔레포트 마법을 담은 탈출용 간이 전송기.
류 현이 요 일주일 간 인도행에 대한 고민과 ‘신의 방패’ 협상에 매달려 있는 사이에 화련이 강 찬과 내놓은 성과였다.
팀 창고에 쟁여놓은 소재들을 써도 되냐는 화련의 물음에 대충 그러라고 대꾸하고 넘긴 류 현으로서는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아니 이런 걸 만드셔놓고 그렇게 말씀하셔도...”
“진짜라니까요. 정 의심스러우면 영감님한테 물어보시던가요. 저 그 시간 외에는 마법은 한 번도 안 썼어요. 그건 세아 언니한테 들으셨잖아요?”
언급된 세아의 이름에 다시금 류 현의 미간에 구겨졌다. 그를 보고 화련이 움찔했으나 류 현은 전처럼 빠릿빠릿하게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 겨우 토혈하는 것을 하루 일과에서 빼버리는 데 성공한 화련처럼 눈에 보이는 증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도 멀쩡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내상을 잡고 난 이후에 몸 안으로 파고들어서 식혀질 기미를 안 보이던 검은 불꽃의 열기를 누르기 위해,
‘종언의 불’의 술식을 새겨놓은 ‘살바토르’의 심장을 흡수했으니 당연했다.
‘종언의 불’을 발동시켜서 소모된 힘이 적지 않은데도 화룡의 심장은 그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그 대가로 검은 불꽃의 열기를 몸에서 빼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이젠 화련보다 자신이 ‘골병 들었다’에 가까운 상태가 된 것이다.
“언니랑 또 싸웠어요...?”
“예? 아, 아닙니다. 계속 이래도 되나 싶어서요...”
“이제 이런 걸 만들 수 있게 되긴 했는데 언니가 자기 몸 지킬 수 있게 되는 건 나쁜 건 아니잖아요? 언니도 꽤 좋아하고 계시고 그러니까...”
자신이 쥐고 있던 간이 전송기를 굴려 보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긴 했지만,
화련은 아직 혈색이 다 돌아오지 않은 얼굴로 안쓰러울 정도로 류 현의 눈치를 살폈다.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이 정도까지 못 알아볼 류 현은 아니었다.
“예, 그렇지요. 솔직히 이성적으로는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아는데 잘 안 되네요...저도 제 심정을 딱 잘라서 어떻다고 정의가 안 되는군요.”
“으음...”
화련이 그 조그마한 어깨를 더 움츠리려는 기색이 보이자 류 현은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억지 미소였지만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화련이었기에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말만 거창하게 전송기고 실제로 뜯어보면 별 거 없어요. 기술이 부족한 거 채우려고 그 비싼 재료들을 때려 박은 거고요. 다른 좌표를 찍어 달라고 해도 못 찍으니...”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어차피 우리가 이걸 상용화 시킬 것도 아니고요. 할 수 있어도 못하는 척 해야 하는 판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당장 유니크 아티펙트 뺏어가겠다고 온갖 포장질 해서 감사단이니 뭐니 보내겠다고 입 터는 꼴 보면 백프로 헛짓거리 걸어올 게 뻔 한걸. 근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진짜 작정하고 달려들 기세던데.”
“그쪽에서 작정하면 뭘 어쩌겠습니까. 유명무실한 국제 던전 점유법 같은 거나 들먹거리겠지요. 그거 지켜진 사례도 몇 없으면서. 이번에 타겟으로 삼은 청뢰랑 유성우는 둘 다 거기 해당 사항 없고, 끽해야 칼리프 클랜이랑 엮을 만한 개미지옥 정도나 물고 늘어지겠죠. 칼리프 클랜이 조용한 거 보면 그 쪽도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만.”
“걔들은 왜 조용하나 몰라. 제일 먼저 거품 물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명색의 원로급 플레이어들 아닙니까. 괜히 가망성 낮은 일에 매달리다가 우리와 마찰 일으키는 게 더 큰 손해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응? 또 무슨 일 생겼어요?”
“아무래도 그 쪽도 눈치 챈 거 같더군요. 유니크 아티펙트 말입니다.”
“아...엑스칼리버요?”
“예, 인도측이 파슈파타라고 부르는 그거요. 아무래도 확신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뭔가를 라비 라자가 찾았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람 압둘 아지드가 파견됐다더군요.”
“으엑...그 여자 뭔가 꺼림칙하던데.”
제 어깨를 끌어안고 부르르 떠는 화련은,
정말로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뭐 지금은 화련 씨가 근접박투로 시작해도 안 밀리실 텐데요.”
“에이, 아무래도 그건 좀...그 여자가 왔다면 진짜 완전 뻥은 아니라는 소리긴 하겠네요.”
“아직 달려들어서 강탈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그냥 추측 수준인 것 같지만요.”
“그래도 뭔가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증명 영상 보셨다면서요?”
“예에...참고 할 만한 건 죽은 지룡 껍질을 베어내는 게 다라서 그것만보고 판단 내리기가 뭣한 감이 있긴 한데...”
“그러니까, 제가 같이 가야죠.”
화련이 가슴을 펴며 주장하자 류 현은 할 말이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정한 인도행에 화련이 대뜸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하자,
팀원과 화련 본인의 부상을 이유로 거절하려고 한 게 시작이었다.
화련이 내민 대책이 안전가옥에 좌표 마킹이 되어있는 이 임시 전송기였다.
이제 설렁설렁 재활을 시작한 백혜라와 희란의 몸상태를 생각해도 이걸 쓸 일은 극히 드물게 분명했다.
둘이 지금 같은 상태더라도 단독으로 그녀들을 해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팀원들 외에 극히 드물었고,
정말 최악의 경우에도 이곳의 경계병력들이 도망갈 시간 정도는 벌어줄 터였다.
어디서 갑자기 지벡 건터나 웨인 크로이츠 수준의 플레이어가 뚝 떨어지지 않는 한은 도망갈 일도 거의 없겠지만.
그러니,
화련이 내놓은 이 일회용 전송기는 류 현이 준비해온 변명들을 죄다 무용지물로 만들고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화련의 병실로 오면서 스쳐가듯이 본 강 찬의 흥분한 기색이 이해가 될 정도의 물건.
미정부나 ‘마탑’에서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훤했다.
이 일회용 전송기는 지속 가능한 포탈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련의 태도로 봐서는 이게 실현 됐으니 영구적인 포탈도 만들 수 있다는 논리전개는 한참이나 있어야 그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류 현 개인적으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화련을 영입했을 때 정말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바라는 건 염동력 사용자로는 꿈도 못 꾸는,
대 네임드 몹 전에서의 저지력이었다.
전생의 류 현이 겪었던 네임드 몹 중 정점인 아지다하카조차 땅으로 끌어내린 그 힘.
덩치가 작은 네임드 몹의 차례라면 괴수 군단 사이에서 네임드 몹과 맞붙을 링을 만드는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전생과는 다르게 3차 ‘대소환’의 진행속도와 과정이 판이하게 달라진 것과 그녀의 성취가 어우러져서 더 큰 역할을 맡기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화련은 아직 안정을 필요로 하는 백혜라와 희란을 위해서 짜낸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세아 것이라고 내주는 전송핀의 개수가 그 둘의 몫보다 더 많은 것을 보면 류 현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해결해 줄 수단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거기까지 언제 비행기타고 갔다 오시게요? 아무리 전용기라서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 수 있다지만, 저보단 느리잖아요?”
“저는...아직 몸도 성치 않으시니...”
“이제 그 정도 거리는 문제없이 다녀 올 수 있어요. 마스터 보내놓고 돌아올 때까지 신경 쓰는 게 더 상처에 안 좋을 걸요. 제가 따라가면 손가락 두 번만 튕기면 갔다 올 걸.”
병자 두 명이 한 순간에 위기를 벗어날 도구까지 만들어낸 화련은 그냥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게 없었을 때야 아직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둘을 데리고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게 자신정도라 얌전히 잔류 지시에 따랐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 걸 넘어서 자신이 동행하지 않는 게 명백한 낭비였으니까.
“끙...그냥 약속을 더 늦게 잡을 걸 그랬나.”
“에이, 그러다가 마람 그 여자가 그 아저씨 죽이고 먹고 튀면 어쩌려고요. 보니까 해방 해보고 안 될 거 같으면 승하 언니 쥐여주면 딱 이겠던데. 다른 것도 아니고 소재를 유니크 아티펙트를 왜 그냥 둬요?”
“...이동만 부탁드립니다. 제발 다른 건 하지 마시고...”
“아이참, 내가 승하 언니인 줄 알아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속 태우지도 않지요.
류 현은 그 말을 속에서만 맴돌이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