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화 〉탐식마(貪食魔)
“미국?”
“예. 미국이요.”
조금 풀어진 상태에서도 사람 얼굴보다는 조각상의 무정물스러움을 자랑하는 그 얼굴에 당혹감이 비춰졌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류 현에게 있어서는 전혀 아니었다.
강 찬을 만난 이후 줄곧 고민해온 게 그의 거취문제였다.
류 현이 기억하는 전생에서 강 찬은 어떤 루트를 거쳤는지는 몰라도 미국에 속해 있었다.
악룡이 나타나 인류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고,
인류가 멸망수순을 밟고 있을 때도 미국이 미국이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강 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었다.
류 현은 강 찬이 미국에 소속되었음만 알고 있고,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기에 그 본인이 그 선택에 만족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생존이 밑바닥에 깔린 대 전제가 아니라,
가장 우선되는 가치가 된 시대였으니 그 선택이 잘 못 되었다고 지적할 이는 거의 없으리라.
지금이야 그 때와 달리 한국이 군벌 때문에 찢겨나가지도,
검성을 죽이겠다고 헛짓거리로 전력이 갈려나가서 그 좁은 땅하나 다 지키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진 것도 아니었으며,
3차 ‘대소환’마저 전생과 달리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판이었으니.
전생은 물론이고 현재 상황도 어찌 진행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강 찬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판국에 갑자기 기반을 옮기자는 제의를 해왔으니 화를 내도 이상한 것 없다.
그의 반응을 보면 화났다기보다는 이쪽의 의도를 읽을 수 없어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문제는 강 찬 본인이 스스로의 위상에 대해 어떻게 인지하고 있든 간에 그 몸값이 너무 높아졌다는 점이다.
엘릭서의 존재 때문에 강 찬의 존재도 준 기밀처럼 다뤄졌다.
류 현이 스폰서가 되기 전에 거래했던 곳들이 있긴 했지만,
강 찬이 불평했던 것처럼 그리 끈끈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일방적으로 라인을 끊어버려도 큰 문제는 없었다.
용잡이 팀 자체가 양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질과 희귀도로는 다른 곳과 비교도 안 되는 공급자였기에,
업계에서 가장 큰 공급자이기도 한 ‘마탑’과의 거래도 문제가 없었으니 강 찬은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업적에 비해 정말 없다시피 한 인지도는 유지되었지만,
류 현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강 찬은 그런 명성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강 찬 본인이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한들 그가 가진 것이 보물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엘릭서는 개량된 급속 엘릭서가 먼저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나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효과였고,
그 효과만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광고가 될 수준이었으나,
거기에 최초 네임드 몹 레이드 생중계라는 광고판까지 달게 되었다.
강 찬은 출국 직전에 연락시도에 시달리다가 공방 전화기를 없애버렸고,
두 번째, 세 번째 번호를 개통해야만 했다.
별 문제 없이 출국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이전에 아는 이도 몇 되지 않는 수준의 인지도 덕이었다.
서해란의 커버도 있었지만 이전부터 자신이 이룬 성과들을 시장에 내놓고 다녔다면 꽤나 피곤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신의 방패’의 존재가 알려지고 나서는 지금의 시달림이 장난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고 말이다.
“출국 전에 꽤 애먹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서해란 씨가 그러시더군요.”
“이전까지는 계획서를 아무리 짜가도 거들떠도 안 보던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작자들이오.”
“‘신의 방패’를 공개하고 나면 지금보다 더 심해 질 겁니다. 아마, 귀찮은 정도로는 안 끝나겠지요.”
류 현이 쓸데없는 과장이나 겁주기를 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아는 강 찬의 턱수염이 잘게 떨렸다.
아마 얼마나 더 피곤해질지 상상 해보고 있는 것일 테지. 그 상상 정도르는 턱없이 부족할텐데 말이야.
류 현은 속으로 웃으며 계속했다.
“그래서 미국을 추천 드린 겁니다.”
“으음...하지만 얼마 전에 전쟁 통을 겪지 않았소? 내가 들은 것만 해도 당분간은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도 남을 듯 싶던데.”
“그러니 강 찬씨의 더욱 보호에 사활을 걸겠지요.”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그랬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이미 피폐해진 나라니 그런 말을 해봐야 마이너스 밖에 되질 않으니.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이런 말씀드리긴 좀 웃기다고 생각되지만, ‘신의 방패’는 강 찬 씨가 상상하신 것 이상의 파급을 몰고 올 겁니다. 여유가 있는 나라든 없는 나라든 모두 달려들겠지요. 이번에 공개된 개량 엘릭서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신의 방패’까지 더하면 당분간은 휴대폰을 포기하셔야 할 지도 모르겠군요.”
“끙, 그런 유명세는 바라지도 않거늘...”
“아마 이전처럼 자율적으로 공방을 돌리시긴 어려울 겁니다. 서해란 씨가 돌보던 수준으로도 힘들 것이고요.”
“그래서 미국이오? 음...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소만은...앞에도 말했듯이 전쟁 통에 골병든 나라 아니오?”
그 강 찬이 정말로 눈치 보는 듯한 기색이 영 적응이 되질 않았지만,
류 현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대답을 내놓았다.
“예, 일반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이번 사태로 미국이 잃기만 한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버거운 상위 괴수를 자주 상대한 플레이어 일수록 성장도 빠르다. 알고 계시겠지요.”
“레드 드래곤 웨이브 때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들었소만은...”
“대신 살아남은 이들은 그만한 대가를 받아내었지요. 아까 보셨던 호위팀 수준이 평균 헌팅 레벨 300대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
“그렇게나...?”
강 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요즘 들어 헌팅 레벨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무용론이 돌고 있긴 했지만, 당장은 그걸 대체할 것이 없고 여전히 표준 규격처럼 쓰이고 있다.
3차 ‘대소환’ 이후 레벨 인플레 기미가 보이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300대는 국가를 대표할만한 수준의 수치.
뉴스로 미동부가 박살났다, 증시도 같이 박살났다 같은 소식만 들었을 강 찬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화룡이라는 놈들이 동급 괴수에 비해서 상당히 강력한 놈들이었거든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체를 보내드리지 못했지만 뉴욕 기지에 아직 사체가 한가득 남아있습니다.”
“으음...”
“그리고 미국에게는 강 찬 씨에게 목을 매달 이유도 충분히 있지요. 국가 이미지 때문에 ‘마탑’과의 거래도 껄끄러운 입장이라, 제대로 된 거래 창구 하나만 생겨도 크게 만족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공방의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책임질 이유로는 충분하고요.”
세아에 거취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지만,
강 찬의 문제라면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외부 공격에 취약한 군식구까지 달고 있는 강 찬에게는 이 이상의 선택지는 없다고 류 현은 확신했다.
한국에 큰 유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체계도 잡히질 않아,
중간에서 문민호 같은 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라가 감당하기에는 강 찬이 품은 보물이 너무 컸다.
당장 네임드 몹에게 크게 피 본바가 있는 인접한 두 나라에서 강 찬을 탐내면 지켜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최근에 전해들은 바로는 ‘예거즈’는 분열 중이고,
‘산군’은 앉은뱅이라도 됐는지 외부활동이 확 줄더니 알아서 나가떨어질 기세라도 했다.
전생과 달리 검성을 죽이겠다고 엄한 전력을 날려먹지 않았음에도 이 지경이다.
양대 클랜이 발전은커녕 전력 보존조차 못하는 판국인데 지키긴 뭘 지킨단 말인가?
지금이야 국제법을 따르고 윤리 준수를 하는 ‘선’을 남아있으나 ‘대소환’이 더 심화되면 얼마 안가 그런 것에 기대하는 건 다 부질 없는 짓이 될 것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이거...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 싶소.”
“당연한 말씀입니다. 협상도 단 시간 내로 끝나긴 어려워 보이니 느긋하게 머무시면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꼭 와 있는 동안 결정 하지 않으셔도 되니 천천히 생각해보시길.”
류 현은 그대로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 강 찬이 뒤에 선 아이와도 의논을 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방문을 나선 류 현은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강 찬을 미국의 비호 하에 밀어 넣고 나면 독 저항이나 열심히 키우면 되겠군. 표정을 봐선 꽤나 혹한 거 같으니 호위진 중 몇 명 불러다가 쐐기로 시연식만 해줘도 될 거 같고.’
3차 ‘대소환’의 진행이 지지부진해서 엉겨 붙는 작자들이 많이 남은 건 피곤한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지지부진함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이 그 괴물 같은 생산력 상실하기 전에 강 찬을 붙여주고 손해를 채워주면 전생보다 더 강력한 조력자가 남을 터.
당초 계획보다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싹 트는 것 같았다.
확신은 금물이겠지만 이 지경까지 오고도 별 태도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당분간은 믿어도 될 듯했다.
물량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네임드 몹이야 자신의 과제로 남겠지만,
류 현에겐 끔찍한 과제라고 한 들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환경이라 할만 했다.
“어...이야기 끝났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색하게 입가를 끌어올린 지벡 건터가 서있었다.
부상당한 팀원들 때문에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화련이 ‘신의 방패’에 대한 소식과 함께 같이 보내온 인력.
그러나 류 현은 이번만큼은 그를 부려먹는 용도로 쓸 생각이 없었다.
보호해 줄 테니 데리고 오라고 했던 그의 친구가 자신과 승하에게 심란함을 안겨주었으니까.
그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이리 피로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화련도 그런 의도로 보냈을 것이라고 자기합리화를 마친 류 현은 미소로 본심을 가린 채 말했다.
“일단 방으로 가실까요?”
지벡은 그 미소 뒤에 도사린 섬뜩함을 느꼈지만 거부의사를 표하진 못했다.
죽으나 사나 이제 이 남자한테 매달려야하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친구를 속으로 욕하며 지벡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마냥 류 현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