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화 〉탐식마(貪食魔)
반응은 즉각 일어났다.
핏기가 싹 가셔서 도무지 산사람 같지 않은 낯빛이 된 최치열은 괴물보는 듯한 눈으로 류 현을 바라보다가,
우당탕! “각하!”
류 현의 눈을 들여 보는 순간 불에 댄 사람처럼 몸을 뒤로 쑥 빼며 뒤로 넘어갔다.
뒤를 짚은 손목에서 바늘로 뼈를 후벼파는 것 같은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것을 돌아볼 새도 없었다.
최치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괴물을 보고 올려다보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우습게도 아직 마비되지 않은 그의 약삭빠른 이성이 빠르게 내놓은 살길이 그것이었다. 그의 본능은 저 기묘한 압박감을 과시하고 있는 괴물에게서 무슨 수를 써서든,
비명을 꽥꽥 질러서라도 떨어지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이성은 빠르게 이것이 살길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 저 남자가 원활하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나면,
저 괴물은 정말로 저 위험한 본색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오늘 생판 처음 보는 남자고,
대체 왜 동석했는지 모를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기에 그의 성향을 유추할 단서도 거의 없다.
하지만,
최치열은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비명을 질러서 저 남자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면,
저 남자의 손해를 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안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그 일을...알고 있었다고?’
한국정부가,
정확히는 당시 대통령을 후원하던 스폰서가 검성을 고립시키기를 원했기에 행했던 일을 안다고 한 것도 충격적이지만 그건 뒷전이었다.
전혀 뒷전으로 미뤄둘 일이 아니었건만, 최치열은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압박감을 스스로 추가해서 고민하자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 몇 초간의 아이컨택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저 남자의 내부의 끔찍한 무언가를 본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주변에 포진해있던 플레이어 경호원도,
임기 중 딱 한 번 마주한 바 있는 검성도 저런 끔찍한 무언가를 내보이진 못했다.
플레이어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본듯한...
“괜찮으십니까?”
“어? 어어, 괜찮네.”
내밀어진 손을 보고 최치열은 뒤로 굴러서라도 멀어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의 이성이 그를 채찍질 하여 그 손을 잡고 일어나게 만들어주었다.
류 현이 몸을 툭툭 털어줄 때는 방광의 긴장이 풀려버릴 뻔 하기까지 했다.
엉거주춤하게 멈춰선 경호인력들의 모습에 열불이 터졌지만 최치열은 울분을 억누르며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렸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으니까.
“다음 만남은 청와대에서였으면 좋겠구려.”
태연함을 가장 한 채, 본심과 가장 거리가 먼 말을 내뱉는 것에 조금의 멈칫함도 없을 정도로 절실했다.
“예, 그랬으면 좋겠군요.”
누가 봐도 빈말이 분명한 류 현의 대꾸에 저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로 말이다.
***
“너 무슨 사고 쳤어?”
머리를 닦으며 티비 리모컨을 집어 든 류 현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는 수준급으로 류 현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된 승하는 그 무언의 말을 읽었지만,
모른 채하고 저하고 싶은 말만 했다.
“비서실장 할아버지 표정 봤어? 차라리 심장 마비 왔으면 하는 표정이던데.”
“...그건 또 무슨 표정인데요.”
“그래서 최씨 영감 만나서 뭘 한 거야?”
“이제 물어보지도 않고 확정짓고 몰아가시는 겁니까?”
“그거 말고는 뭐가 터질 건덕지가 없으니까. 그렇지. 다른 데서 터졌으면 분위기가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 아냐?”
승하의 말대로 사고가 터졌기에는 분위기가 애매하긴 했다. 류 현과 회담장에 들어가 있었던 비서진 중 몇 몇은 대놓고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고,
다른 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비서진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고는 싶은데 차마 분위기 때문에 캐묻지는 못하는 그런 기묘한 대치가 얼마 안 되는 무리 내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당연히 류 현도 이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풀릴 거라고 여겨서 모른 척하고 있을 뿐.
모른 척 하는 것 외의 대처는 일을 꼬이게 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도 한 몫 했고.
“...별 거 안 했습니다.”
“왜 내 귀에는 별 일 했다는 걸로 들리지? 내가 좀 멍청하긴 해도 눈치가 없진 않거든? 저 할아버지들이 저럴 정도면...”
“그냥 슬쩍 경고만 해줬습니다. 몰라서 그냥 두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인지할 정도로만.”
“뭐?”
승하가 입을 연 채로 굳어버렸다.
류 현은 드물게도 이걸 찍어두면 꽤 재미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휴대폰은 꽤 먼자리에 있었다.
“야, 너 나한테 사고 안 칠거냐고 물어놓고는...”
“제가 언제 그렇게 물어봤습니까. 그냥 하실 건지 말건지 물었지요.”
“아니...그게 더 악질 아냐?”
“악질은 무슨, 당장 일 저질러도 대놓고 증거 남기면서 쳐 죽이는 거 아니면 계획 틀어질 일 없습니다.”
“야야, 왜 네가 화를 내?”
“...아무튼 별 일 아닙니다. 그냥 살짝 압박했을 뿐이고 넘어진 거 외에는 별 일 없이 돌아갔습니다. 별 일 있었으면 이 인원만 있겠습니까? 공군부터 날아왔겠죠.”
“그건 그렇네.”
방금 대화에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인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승하는 발을 까딱거리며 허밍까지 시작했다.
류 현은 괜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 궁시렁 거렸다. 이번 회담행 직전에 ‘예거즈’와 정부가 얽힌 뒷이야기에 대해 제보한 지벡의 친구라는 인간에 대해서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승하 들으라는 식의 중얼거림이었다.
“알렉스인지 렉터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응? 야, 왜 정보 제공자를 갑자기 족 치려고 해?”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당장 자기가 한 짓거리 커버할 뭔가를 제시하기는 힘들어 보이니, 이런 때에 그런 소리를 한 거 아닙니까. 가뜩이나 어디 가는지 뻔히 알면서 심란해지라는 건지 뭔지.”
류 현은 그러고도 몇 마디 더 궁시렁 거렸다. 너무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기에 승하도 중간에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야야, 나 괜찮으니까 안 그래도 돼. 아직 뽑아먹을 게 없진 않잖아?”
“없을 겁니다. 그런 게 있는 놈이면 아직 저쪽에 붙어있겠죠. 자기도 자기 자리가 보장 안 된 거 같으니까 뒤늦게 갈아타려는 거겠죠.”
“생중계 보고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지.”
“그건 그거대로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는 의미 아닙니까. 차라리 조용히 지벡 건터한테 말만 전했으면 공으로 참작해줬을 텐데. 쯧.”
“반대로 별 볼일 없는 놈이라서 직접 대면해야 안심이 되나 보지. 어차피 우리 손해 볼 것도 없는 일인데 왜 그렇게 열을 올려. 자자, 여기 호텔 술 괜찮은 거 주더라?”
미정부에서 자기 방도 따로 잡아줬음에도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따라 들어와서 술부터 찾는 친구의 모습에 류 현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이 겉보기마냥 완전히 풀린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는 상태가 좋아진 것처럼 보였으니.
‘다음부터는 이딴 수작 못 부리게 못을 박아놔야겠어.’
하지만 승하의 말처럼 대충 넘겨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팀원들을 흔드는 일을 그냥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같은 시각 워싱턴에 급히 꾸려진 대규모 요양시설에서는,
화련이 류 현의 역할을 대신해서 승하를 흔든 죄를 묻고 있었다.
그 정보를 전한 알렉스 뷸러가 아니라, 그 알렉스 뷸러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인 지벡 건터를 족치는 식으로.
명분은 말할 것도 없고, 무력적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 너머를 점하고 있는 화련이었기에 지벡은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력적 우위는 화련이 골병이 든 상태라 상당히 줄어든 상태긴 했지만,
지벡은 찍소리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스스로도 그녀가 이렇게 불을 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놈은 대체 왜 나한테는 별 말도 없이...’
지금쯤 비행기에 올랐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린 나이에 세상에 내팽개쳐진 탓인지 인간관계에 있어서 좀 하자가 있는 친구이긴 했지만, 몰랐을 리가 없다.
원수인 걸 모르는 원수 중 하나를 만나러 가는데,
그 사람이 원수 중 하나라는 걸 알려줬다고 마냥 좋아할 만한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벡은 그 사실을 듣고 알렉스 뷸러에게 본격적으로 화내기도 전에 이상한 기류를 읽은 화련에게 불려 나와서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당신이 내 상관이냐고 뻐팅기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고, 또 자신이 이런 기묘한 포지션을 잡는데 도움을 준이라 그러기도 힘들었다.
“진짜 좋게 봐주려고 해도 좋게 봐줄 수가 없네.”
그나마도 이제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지벡은 속으로 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이 여자가 아플 때 터져서 다행이다.
쌩쌩 할 때 이런 일이 터졌다면 상상만 해도 귀와 머리가 아파져왔다.
지벡은 슬슬 빠질 각을 보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에 몇 번 작별을 고하는 행동을 했다가 붙잡힌 적이 있어 고안해낸 퇴장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은근슬쩍 가긴 어딜가요?”
“어? 아직 할 얘기 더 있나...?”
“얘기는 없고 해줘야 할 일이 있어서 그쪽 부른 건데 왜 듣기 전에 내빼요?”
“아니...”
그쪽이 그런 얘기는 안 하고 종일 쪼아대기만 하니 그게 볼일 전부인 줄 알았지.
지벡이 품었던 말은 입안에서만 멤돌다 흩어졌다.
그는 불평하는 대신 더 생산성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 일로 왕창 깎여나갔을 점수를 벌충하기 위해서.
이전 스폰서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눈치 안 보고 살던 자신이 어쩌다 이리됐나 한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직 회복도 안 됐을 텐데 벌써 무슨 일을 벌이려고?”
“우리가 벌이는 게 아니라, 벌이고 싶다는 치들이 있어서. 그나마 멀쩡한 게 그쪽 정도니까. 그리고 이번 일에 지식도 꽤 있는 편이고.”
왜 웨인이 아니라 나인가 하는 불평이 다시금 싹 트려고 했지만, 지벡은 단호히 그것을 짓이겨버렸다.
눈앞의 여자는 불평한다고 뭘 바꿔줄만한 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묵묵한 일처리를 보고 뭔가 더 얹어주는 스타일이었지.
“무슨 일인데 그래?”
“마탑 꼰대들이 북극에 남은 그 얼음벽을 보고 싶다고 온다는데, 협상은 둘째치고 마중 나갈 사람이 마땅찮아서.”
“마탑? 아니 걔들은...”
“아직 말 안 끝났어요. 그 인간들만 오면 그냥 오든 말든 두면 되는데 같이 오는 사람 때문에 부른 거죠. 마스터도 신경 써서 관리하는 인사니까 알겠죠?”
“어...대충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알겠네.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이 뭔데?”
“강 찬. 강 찬이요. 마탑이랑 연구한 성과가 났다고 아티펙트 들고 찾아왔는데 보고서대로 성능이면 이쪽 사람 하나는 보내줘야 되거든요.”
“대체 뭘 만들었길래 사람을 오라가라...아니, 갈게 간다고.”
“아뇨. 그냥 가면 또 사고 칠 게 뻔 하니까 이거 보고 가요. 시동실험 당시 측정 스펙이에요.”
종이를 받아든 지벡은 대충대충 읽으려는 시늉을 하다가 얼마 안가 그것에 코를 박을 기세로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리 복잡한 보고서가 아니었기에 금세 다 읽어낸 지벡은 저도 모르게 물음 같은 말을 흘렸다.
“아니, 그쪽 대장은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거래? 아니 어떻게 이런 게 덜컥...”
“왜 지금은 못할 거 같아요?”
장난치는 듯하지만 충만한 자신감이 깃든 화련의 대꾸에 지벡은 더 이상 진위를 의심하기 힘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