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탐식마(貪食魔)
던컨은 넥타이를 끌러 내리려다가 손을 멈칫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맞은편에 앉아있을 부통령 제프 리어던의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떠올라서였다.
‘끙...’
앓는 소리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켜야만 하는 처지.
정계로 복귀한 이후로는 아주 낯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마저 아주 티를 내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얼마가지 않아 던컨은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대소환’ 초기 첫 단추를 잘못 꿴 죄로 플레이어의 시대에선 뒤쳐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미대통령이라는 직함이 종이호랑이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런 던컨에게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는 건 젊은 동양인 남녀였다. 둘이 합쳐도 던컨은 고사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비서실장보다 어린 젊은 이들.
방금 건넛방으로 간,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별명을 얻은 류 현과 그 전부터 유명한 검성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나승하.
눈에 안 보인다고 한들 그들의 존재감으로 인한 부담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게 문제일 뿐.
그렇다고 그 두 사람이 던컨과 그의 부통령이나 다른 관료들에게 압박이 올만한 행동을 한 건 또 아니었다.
그 둘은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자리만 지키겠다고,
그마저 문제가 된다면 그냥 근처에 대기하다가 상황만 보다가 돌아갈 것 이라고 적극적인 협조의사를 밝혀왔으니까.
외국인에게 훈장을 수여하라고 벌어진 시위를 대통령이 달래러가는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을 겪는 입장에서는 반길만한 일이었지만,
마냥 좋아하지 못하는 건 같이 처리해야할 또 다른 일 때문이었다.
훈장을 수여하라고 시위까지 일어난 당사자의 조국에서 날아온 대통령을 달래서 돌려보내는 일.
정확히는 그 대통령과 당사자 중 하나인 승하가 가까이 있게 되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자국 대통령을 만나서 설득될 걸 우려해서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는 물론이고,
LA행 합류의사를 밝혔을 때 대통령의 존재를 알렸음에도 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되레 그 귀찮은 걸 처리하러 가는 거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보좌진들이 면밀히 그들을 분석한 결과,
용잡이 팀이 하나같이 가족이 남아있는 멤버가 가족이 남아있는 곳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조국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긴 했으나 확신을 가지기 힘든 일 인건 분명했다.
확인 해보기도 곤란한 일이니 기회가 될 때마다 반응을 살피며 천천히 그 추측에 대한 근거를 쌓아하는 수밖에 없는 문제.
그랬는데,
그 추측을 확신으로 굳힐만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굳이 거짓반응을 보일 필요도 없고, 그걸 바탕으로 설계를 짜기도 힘든 상황에서 나온 반응이니 날을 세우고 의심하기도 우습다.
하지만 덮어놓고 좋아하자니,
와있는 한국 대통령과 나승하가 마주 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들의 우려는 매우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겠지? 안다면 이렇게 따라나서지 않을 거 아닌가.”
“그렇게 목소리 낮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들이 들으려고 하면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셔도 다 들을 테니까요.”
던컨은 자신이 보기에 비정상적으로 담담해 보이는 부통령을 빤히 보다가,
부어놓고 잔만 만지작거린 보드카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화끈한 감각이 목을 훑고 내려가자 어딘가 막힌 것 같은 감각이 좀 해소되는 듯 했다.
“이럴 때 보면 자네가 터미네이터나 그에 준하는 뭔가 인 것만 같아. 내가 자네 아들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걸세. 대체 나 몰래 뭘 먹고 다니길래 그리 덤덤한가?”
“각하는 총책임자시고, 저는 직함 상으로는 두 번째 책임자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책임의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우리 비서실장은 위경련이 온 표정 아니던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게 아니니 반쯤 포기한 겁니다.”
던컨은 입을 반개한 상태로 1분가량 멍하니 리어던을 바라봤다.
부통령답지 않은 무책임함을 탓하자니 그의 말이 너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에어포스 원이 이륙하기 직전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비행기가 되었다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 문 너머에 있는 두 젊은이들은 당당하게 세계최강임을 자칭해도 되는 자들 아닌가.
그 중 하나가 심기가 뒤틀려서 날뛰어도 말릴 방도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또 다른 최강자가 나서서 말려주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어지간하면 대장인 류 현이 말려 주겠지만,
문제는 이 걸린 건수가 어지간한 게 아니라는 거였다.
“...너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나. 그녀라면 맨손으로 그쪽 경호는 물론이고 비행기도 통째로 박살을 낼 수 있을 텐데.”
“그 점 때문에 걱정 안 하셔도 될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음? 내가 놓친 게 있나?”
“각하의 말씀대로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여기 와 있는 경호인력 정도가 아니라, 자국 내에서 정면 돌파로 그를 죽일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까지 목이 붙어 있는 걸 보면 모르고 있거나, 알고서도 죽이지 않은 것일 테지요.”
“으음...그건 그렇지.”
수긍하면서도 던컨은 문을 힐끔거렸다.
그런다고 자신이 문 너머에 있을 두 젊은이를 투시할 수도, 그들이 마음먹었다면 듣지 않게 만들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자의 슬픈 운명을 느끼며 던컨은 더 큰 위안거리를 부통령에게 눈짓으로 요구했다.
그의 부통령은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했다.
“그리고 그녀의 대장도 이런 상황에서 눈에 띄게 처리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고요. 지금까지의 행동만 봐도 그가 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건 명백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자국 대통령을 죽이면 혐의를 벗어나더라도 우리와 한국이 부딪히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다는 걸 알 테니까요. 한국이 원하지 않아도 중국이 이를 빌미로 부추길 거라는 걸 류 현 대장도 알고 있을 겁니다. 처리하기 더 좋은 때가 나올 거라는 것도요.”
“결국 그의 판단력을 믿어야 하나...”
“정 불안하시면 그에게 직접 부탁해보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괜히 말 꺼냈다가 난리 나면 어쩌려고!”
상사가 버럭 소리치자 리어던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지만 생각을 바꾸진 않았다.
‘그라면 그래 줄 겁니다. 제가 본 인간 중 가장 이상한이니까요.’
바로 옆방의 승하와 류 현이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강심장인 그조차 움찔했을 테지만,
류 현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만큼 자신의 프라이버시도 지키려고 했다.
화련이 만들어준 일회용 아티펙트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완전히 차단해 주었고,
류 현은 주변 생각 하지 않고 아주 편하게 물었다. 그의 표정은 전혀 편하지 않았지만.
“어쩌실 겁니까?”
“뭐가?”
“대통령, 만나서 아무 짓도 안 하실 겁니까?”
“...왜 나한테만 돌려서 말하는 거 안 하고 대놓고 미치광이 취급하는 거야?”
“돌려 말하면 몰랐다고 핑계 대실 거 아닙니까. 그리고 미치광이 취급하는 거 아닙니다.”
“회담장에 대통령 모가지 따러 따라간다고 생각하는 게 미친년 취급하는 게 아니라고?”
“승하 씨 심경을 짐작 해보려고 노력했으니까요.”
“......”
투덜거리던 승하의 눈 움직임이 멎고,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그녀가 제 손가락으로 장난 치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것을 류 현은 그저 기다려주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승하의 입이 열렸다.
“...내가 한다고 하면 말릴 거야?”
결심 하에 내뱉은 말이었음에도 머뭇거림이 진득하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녀의 심경을 완벽하게 이해는 못해도 대강 어떤 기분일지 짐작은 할 수 있었기에 류 현은 더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제가 말릴 일은 없을 겁니다.”
“...진짜로?”
“예. 정말로요.”
“여기서 대통령 죽으면 난리 나잖아. 그러니까...네가 전력 보존하려고 이거저거...”
“어차피 한국은 별 기대도 안 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내전은 안 터졌지만...최대 전력은 제 옆에 있고, 솔직히 ‘터주’가 장악하는 쪽이 협력은 편하다고 생각해서요. 내전이나 ‘터주’ 군벌화를 거들 생각은 없지만, 별 기대도 없습니다.”
“...그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류 현은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진짜 애 같다니까.
“굳이 한국이 아니었더라도 안 말렸을 겁니다. 모르면 몰라도 어떻게 알고서 말립니까.”
“...난 네가 말릴 거라고 생각했어. 복수해봤자 언니랑 오빠들은 안 돌아온다 뭐 그런 소리하면서.”
“그거랑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복수라는 거.”
그 대꾸에 승하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류 현을 올려다봤다. 이리저리 헤매는 것처럼 움직이던 그녀의 초점은 생각이 정리 되자 그의 눈을 직시하더니, 스르륵 다시 아래로 가라앉았다.
잊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복수와 생존을 위해서 목을 매고 있는 존재라는 걸.
그것도 한 번의 생을 끝내고서도 굴하지 않은 자라는 걸.
“...미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사과하실 거 없습니다. 사과 받을 일도 아니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는 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요. 역효과 날 가능성이 큽니다.”
“...안 죽여. 지금 대통령이 실행자도 아니고 곁다리 수준이었고, 실행범들은 다 한국에 있잖아.”
류 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반쯤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뭐라고 말한들 그녀의 기분이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는 위로의 말 대신 수납장에서 양주 두 병을 꺼내오길 택했다.
“...술 냄새 풍기면 안 되는 거 아냐?”
“좀 그런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동네 우리한테 훈장 주라고 시위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영 안 내키시면 회담장에는 안 나가셔도 됩니다. 제가 처음부터 말잖습니까. 혼자 다녀와도 되는 일이라고.”
“그럼 련이가 왜 따라갔냐고 나 쥐 잡듯이 잡으려고 들 걸.”
“화련 씨가 언제는 뭐 안 그러셨습니까.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걱정을 좀 심하게 과하신데.”
“좀 심하게는 또 뭐야? 그럼 나 진짜 안 따라가도 돼?”
“부통령이 시위대랑 시간 때울 거라고 했으니 옆에서 손이나 흔들고 계시면 되겠네요. 그 정도만 해주셔도 아주 좋아할 겁니다. 어차피 회담장 대화내용은 녹음해갈 거고요. 화련 씨도 속사정을 알았으면 승하 씨가 따라오는 거에 반대하셨을 텐데...”
“대신 자기가 따라오려고 했겠지. 그건 진짜 아니야. 걔 요즘도 밥 먹다 말고 피 게워내고 그런다고.”
“아직도 그럽니까? 아니 대체 왜 그런 걸 숨기려는 건지...”
“다 대장님 보고 배운 거지 뭐. 희란이까지 그러는 거 보면 뭐...걔가 누굴 보고 배웠겠어?”
승하를 위로해주려다가 의도치 않게 한 방 먹은 류 현 잠깐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을 편히 했다.
평소의 활력을 어느 정도 되찾은 승하에게 병을 건네고는 자신도 병을 따 한 모금 들이켰다.
5분 후 술을 요청하는 두 사람의 행태에 당황한 승무원들로 인해 대통령과 부통령이 방으로 뛰어드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우려가 무색하게 에어포스 원은 아무 문제없이 LA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