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탐식마(貪食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정적.
루카스 파커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나이 지긋한 신사는 그 얼굴에서 엿볼 수 있는 세월의 흔적이 무색하게 화면에 코를 쳐박고 맹렬하게 태블릿을 연타하는 중이었다.
두 번 볼 것도 없이 그 화면에 비친 건 게임이었다.
이 방은 와이파이도, 통신도 막혔으니 그가 하고 있는 건 싱글게임일 터였다.
어떻게 봐도 과한 몰입이었지만 루카스는 신사의 이름을 듣고 끓어올랐던 존경심을 박박 긁어모아 그 사실에서 눈을 돌렸다.
물리적으로도 눈을 돌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여자 다리였다.
그냥 다리가 아니라 숏팬츠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흉터로 얼룩진 다리.
과연 저 다리가 제대로 기능을 다 할 수 있을까 싶은 굵직굵직한 흉터들이 어린 아이 낙서마냥 다리 위를 수놓고 있었다.
그것을 제하고도 만개한 꽁초 해바라기 위에 또 꽁초를 꾹꾹 눌러 담는 것만 봐도 껄렁껄렁함이 느껴졌지만, 루카스는 섣부른 판단을 자제하는 것을 넘어 그녀에게도 존경심을 쥐어짜내려고 애를 썼다.
헐리웃 셀럽에 대해서 쥐뿔도 모를 정도로 일 외에는 무관심한 그였지만,
저런 다리를 숏팬츠까지 입어가며 자랑하고 다니는 여성 기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니 단박에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대소환’이후로 이전에 존재했던 현세의 지옥들을 우습게 만들어버린 아프리카에 청춘을 갈아 넣은 종군기자,
줄리아나 허드슨은 기자라면 당연히 존중해야했고, 아니어도 존경 받기에 충분했으니까.
태블릿에 코를 박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저 신사도 만만치 않은 인사였다.
‘대소환’ 초기 플레이어에 대한 압제를 고발해 협회 결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도 만족 못해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들쑤시다가 피랍 당해 고문까지 받고도 그 뜻을 굽히지 않은 친 플레이어 대표 기자 소리를 듣는 마커스 라이트먼.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고 도망쳐버린 루카스로서는 빚진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대 선배였다.
이 방에 있는 다른 십여 명의 기자들 또한 그 둘에게 지지 않을 경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종군기자부터 플레이어에 대한 압제를 고발하는 기사를 내다가 고국에서 추방당한 이까지.
잘 못한 것도 없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위축되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쟁쟁한 기자들.
아니,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루카스는,
더 나아가서 사회는 이들에게 작든 크든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슨 생각이지?’
그 지벡 건터가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삼 일전, 인터뷰 자리를 만들어보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루카스는 근처에 숙소를 잡으면서도 스스로를 비웃기를 서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돈과 시간을 버리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직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동심의 파편 같은 것 때문이었다. 다른 이해득실이 끼어들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 연락이 왔을 때는 기쁨보다는 당혹스러움을 느꼈었다.
처음에는 교묘한 말장난을 치는 것 아닌가 싶었고,
그게 아니라 정말 인터뷰 허락을 받아냈다는 걸 알게 되고 부푼 가슴을 안고 이 자리에 온 뒤에는,
모인 기자들의 면면을 알게 된 후에는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가 냉정하게 평가해 보면 루카스 파커는 정치부 기자로 작은 명망이 있긴 하지만 그 뿐인 자다.
스스로의 양심에 위배되는 기사거리를 다룬 적이 없으니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문 것이 정상.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싸움을 벌이고 2주 넘게 대변인 한 번 안 세우고 잠수 탄 이들이 선택하기에는 그리 적절한 인선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들의 소식에 목말라하는 대중들이야 루카스 파커가 누군지도 별 관심이 없겠지만,
그 당사자들 입장에서야 인터뷰어가 어떤 사람인지 신경 안 쓸 리가 없으니.
다른 이들도 아니고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사투를 벌였던 이들 아닌가.
2주 넘게 저들끼리만 침묵한 게 아니고 연방정부의 입까지 다물게 만든 걸 보면 골빈 플레이어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들 언질을 받은 건가? 나만 못 받은 거고? 지벡 건터가 날 물 먹이려고?’
답답한 마음에서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더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눈덩이가 그의 입 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그가 들어올 때 열었던 문과 반대편에 나있는 문이 열렸다.
한껏 딴청을 부리고 있던 기자들의 시선이 그 문으로 들어온 이에게 쏠렸다.
기묘했다.
동양인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동양인의 외모에 익숙하기 때문에 위화감은 더 크게 다가왔다.
남자는 분명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음에도 유령처럼 희미했다.
그가 눈을 감아버리면 사라져버릴 것처럼,
숨을 멈추면 시체가 남는 게 아니라 그대로 존재가 증발해버릴 것처럼 존재자체가 희박하게 느껴졌다.
그건 지극히 이상한 일이었다.
플레이어에 대해서 초기에 손을 떼버리고 아예 정치부에서도 꼰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쪽에만 골몰한 루카스 조차 상위 플레이어 특유의 존재감을 모르진 않았다.
그가 플레이어에 대한 기사를 쓰지 않는다고 한들 개인 경호원이나, 군에 속한 이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루카스는 그들에 대한 느낌을 현대에 나타난 검투사들이라고 정의해왔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감을 그렇게 정의했다.
실제로도 상위 플레이어는 무수히 많은 피를 뒤집어써야만 탄생할 수 있는 투사다.
아무리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정신력이 뛰어나더라도 수 없이 그런 일을 겪은 이들이 일반인과 같을 수는 없는 노릇.
아예 상위 플레이어를 처음 보는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수 없이 그런 이들을 만나온 자들이니 그들이 느낀 바는 이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뇌와 눈은 저 희미한 남자가 머리카락 길이의 불일치 외에는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요 2주간 세계에서 가장 핫해진 그 남자라고 증언하고 있었다.
그 증언은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얌전한 차림의 지벡 건터의 존재로 확정되었다.
남자는 자리에 앉더니 그들을 한 번 슥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바쁘신 와중에 이리 모여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벡 씨에게 이미 들으셨겠지만, 제 입으로 소개하는 게 맞겠지요. 류 현이라고 합니다.”
***
“허어어...”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외에는 숨 막힐 정도로 정적을 강요하던 분위기가 깨진 건 마커스 라이트먼의 한 숨 때문이었다.
그 소리에 모두의 집중이 확 깨졌지만 원망하는 눈길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그가 이 자리에 모인 기자들 중 최선임에 가깝기도 했지만, 모두가 이런 기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50분 남짓한 영상 시청이었지만 그들은 기진맥진해 질 정도로 집중력을 소비했다.
두 번째 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집중했다.
두 번 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앞의 것과 차이가 심하긴 했지만 말이다.
루카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는 걸 넘어서 아예 풀어 젖히기까지 했다.
이제야 좀 숨 쉴 만 해진 듯 했다.
‘원본은 정말 말 그대로 원본일 뿐이었군. 그건 반의반도 못 보는 거였어. 왜 그렇게 순순히 풀었나 했더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 최강을 칭해도 과하지 않은 초인과 그 초인을 종이인형마냥 오려버리던 괴물을 대결이었다.
생중계 때는 어마어마한 현장감에 먹혀서,
영상 판매 후에는 끓어오른 분위기에 떠밀려서 혹은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별 말이 안 나오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끔찍하게 빠르고 거대한 힘이 부딪힌 싸움을 촬영해서 생중계가 가능한데 방금 처럼 영상을 해부하는 게 아주 불가능하다고 장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루카스는 질린 표정으로 지벡을 봤다가, 그 앞에 앉아있는 류 현을 봤다.
원본 영상을 펀딩으로 판매한 것도 저 남자가 시킨 것일까? 지벡의 태도로 봐서는 그럴 것 같았다.
망명 후에 그야말로 미친 망아지마냥 좌충우돌 하던 저 망나니가 고분고분 따르는 것만 봐도 추측거리로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의구심은 그대로 사그라지지 않고 바로 옆으로 옮아 붙어 그 세를 불렸다.
‘...왜 이런 힘을 가지고도 여태 침묵한 거지?’
이 주하고도 삼 일.
증권가는 물론이고, 알만한 신문사에서도 찌라시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돌리는 중이다.
지벡 건터가 펀딩으로 팔아치운 원본 영상은 어느 채널을 틀든 하루에 두 번은 나가고 있으며,
이 정도로는 전혀 이 불길을 잡을 수 없다는 걸 그 캡쳐가 찌라시의 근거로 탈바꿈하는 식으로 증명하는 중이었다.
이를 진화할만한 열쇠를 가진 연방 정부나 용잡이 팀이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그 추측들이 사실인양 인정받으면서 점점 좋지 못한 쪽으로 커지는 중.
그러니,
루카스의 고민은 루카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 방향성만 다를 뿐 같은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뜯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먼저 귀하의 분전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요. 어떻게 그 싸움을 칭송해야할지 잘 모르겠소. 그저 늙은이의 우둔함이라고 여겨주었으면 감사할 거요..”
모두가 고민의 수렁에 빠져서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장 느려야 할 것처럼 보이는 마커스 라이트먼이었다.
기자들은 세상 심각하게 고민하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빠르게 반응했다. 목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빠르게.
“아닙니다. 그리 말씀하실 정도는...”
“그리 생각해주니 이 감사함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그냥 답하지 않아도 되오.”
“예, 말씀하시죠.”
“왜 우리를 불러 모아서 이런 걸 보여준 게요?”
순간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고,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돌아가려다가 류 현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질문을 던진 마커스 라이트먼을 포함한 기자 모두가 긴장했다.
류 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맥 빠지는 것이었지만.
“그저 지금 보신 것을 토대로, 해오신대로 기사를 써주시면 됩니다.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되시면 아예 내지 않으셔도 되고요. 이후 인터뷰 내용을 포함해서요. 어디까지나 판단은 기자분들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