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화 〉탐식마(貪食魔)
승하가 내놓은 피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배를 꿰뚫고, 결정타를 먹인 후 팔을 빼내는 것까지 류 현에게는 한 호흡 내에 마무리 된 일이었으나 비아트리체에겐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검은 불꽃과 함께 정제되었던 검은 기운이 몸 안쪽에서 폭발하는 순간,
비아트리체는 반강제로 트랜스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주마등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정보의 파도에 질식할 것 같은 상태에 빠졌지만,
그녀는 정신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해진 정신으로 기억 속 결락을 살폈다.
자신이 원래 가졌어야 할 힘과 기억을 공백을 인지하자, 모든 것이 예정된 일이었던 것 마냥 비어있던 것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용으로서 이 세계에 떨어졌지만 용으로 살지 못했던 용의 의식이 육신을 한계를 넘어 승천(昇天)했다.
높은 곳에서 행성의 모든 것을 굽어보게 된 용은 원하는 것을 순식간에 찾아내었다.
이름을 되찾았지만 본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따로 놀다가 비참한 꼴로 죽어가게 된 원인을.
분노는 없었다.
류 현의 주먹에 배가 꿰뚫리기 전만해도,
그 주먹을 통해 침투해 온 검은 불꽃과 그 끔찍한 기운이 세뇌와 정신에 가해진 불합리한 제약을 태워버리기 전이라면,
분노로 미쳐날뛸만한 사실이었지만,
세뇌와 세계가 가한 불합리한 제약마저 벗어던진 용의 정신은 분노가 일어나기도 전에 그것을 꺼뜨릴 소화수를 찾아내었다.
억압과 미혹에서 벗어난 용의 정신은 단단했다.
얼마 남지 않은 호흡을 무의미한 보복에 쓰는 것이 아니라,
앞서 떠나간 동족처럼 투자에 할애 할 수 있을 정도로 냉철하면서도 빨랐다.
비아트리체가 모든 판단을 끝마치고 입을 열기까지,
류 현의 주먹에서 해방된 그녀의 몸은 막 빙하에 닿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비아트리체의 말에 최전방에 있던 두 사람이 기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깔끔하진 않지만 적절하군.]
바닥을 기다시피 천천히 상체부터 일으키던 승하와 비틀비틀 그녀에게로 다가가던 류 현의 목이, 목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격하게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놀래 킨 비아트리체는 무심한 눈으로 명치에서 배꼽부근까지 난 구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지금도 검은 기운이 남아 야금야금 넓어지고 있는 구멍을. 고통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살바토르, 그가 말하지 않던가? 나를, 동족을 죽이려면 심장과 머리를 터뜨려야 한다고.]
웃긴 얘기였지만 류 현은 그 소리를 듣고 아차 했다.
용종 괴수가 아니어도 네임드 몹의 생명체를 이탈한 듯한 생명력을 생각하면 심장과 머리통이 아니라,
사지 중 한 부위만 남아 있어도 다시 되살아날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으니까.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죄다 놈들이 가루로 흩어지고 나서야 일이 끝났다고 인지했으니까.
그에 비해 비아트리체가 입은 상처는 인간 기준에서야 절명할 치명상이라지만,
네임드 몹 기준에서는 중상에 미칠까 말까한 수준.
상처를 낸 검은 기운과 불꽃을 생각하면 치명상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니었다.
그 끔찍한 생명력을 생각하면 끝냈다고 안심한 순간이 원정대가 날아갈 수도 있는 틈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왜 이런 어중간한 상태에서 끝났다고 생각한 거지?
놈이 힘을 쓸 수 있는 요소는 아직 남아있었는데?
방심한 것이 아니라 확신이 있었다.
비아트리체의 배를 꿰뚫고 그 안에 검은 것들을 한껏 밀어 넣어 터뜨린 순간,
직감에 가까운 확신이머리에 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확신이 섰다.
끝났다! 라고.
팔부능선을 넘었다는 기쁨 정도가 아니라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가 뒤돌아보지 않고 승하를 돌볼 생각부터 할 정도로 확고하게.
류 현을 당황스럽게 만든 건 이 부분이었다.
대체 뭘 근거로?
끔찍한 방어력으로 모자라서, 공격력마저 부딪힐수록 향상되는 모습을 보여준 강대한 적이었다.
비아트리체 정신조작 마법 보유설에서, 자신의 몸을 알아서 움직인 두 네임드 몹의 기억까지 용의선상에 올려놓으려는 때 비아트리체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리 놀랄 것 없다. 더 이상 싸울 의지도, 기력도 남아있지 않으니. 살바토르와 내가 너를 너무 낮게 보았구나. 아니, 낮게 본 것이라고 할 순 없는가. 네 존재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니.]
류 현은 귀는 열어둔 채로 승하 옆까지 도달해서 그녀를 슬쩍 제 등 뒤로 밀어 넣고 앞을 가로막았다.
생각보다 손상이 심각하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자는 마음에서였다.
놈이 반 드러누운 채로 천천히 안쪽에서부터 먹혀가고 있다는 것과,
적의는커녕 마력의 유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후자의 경우에는 비아트리체를 상대로는 근거로 삼는 게 의미 없다는 게 몇 번이고 증명되었지만, 저 몸 상태로는 이전과 같은 공격법을 구사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류 현이 경계하거나 말거나 비아트리체의 입술은 계속해서 그 미성을 자아냈다.
[그 살바토르도 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고 떠난 모양이로군. 하기야, 뭔지 알 수 있었다면 너를 돕는 게 아니라, 너를 차지했겠지. 이 곳에 떨어진 열화복제품 몸뚱이로는 사도라도 가당치도 않은 일이겠다마는, 그는 그런 자니까. 아마 너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이 된 줄 모르겠지. 그렇지?]
류 현의 표정이 흔들리자 용은 키득키득 웃었다. 죽어가고 있는 그 모습이 거짓인 것 마냥.
[그런 표정을 지어도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없구나. 내가 알아낸 것도 너의 존재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네 존재가 이치에 벗어난 것이라는 것 정도이니. 살바토르가 순순히 떠난 게 이해가 가.]
[나 또한 이 몸뚱이를 희생시켜서 알아낸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아. 아니, 이 몸뚱이를 시험용으로 네게 던져줬어도 이보단 많이 알아내진 못 했을 테니 적다는 것은 틀린 말인가? 아쉽구나,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는 말을 내뱉더니 비아트리체의 몸이 기침으로 크게 들썩거렸다.
그렇게 망가지고도 초월적인 조형미는 조금 깎였을지언정, 사라지진 않았으나 류 현은 그 모습에서 시간 앞에 존재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이리저리 가늠해보던 류 현은 방금 전까지 의심하고 있던 자신의 직감대로 내뱉었다.
“...네 동족은 다른 소리를 하던데.”
[그는 지혜롭지. 그래서 하게 되는 착각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나에게 한 것처럼 그에게 하진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나?]
류 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뒤에서 승하가 힘없이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으나 뒤돌아보지 않고 남은 팔로 손을 잡아주기만 했다.
승하가 그 손을 잡자 손뼈가 바스러진 통증이 일었지만,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없다는 것이 더 신경이 쓰였다.
[그도 네가 품고 있는 것과 유사한 것을 직접보거나, 겪은 적은 없지. 네가 품고 있는 힘의 기반이 되는 존재는 오래 전에 사라진 것. 내 동족 중 가장 오래 산 이조차 그의 사도가 발광하며 몇 성계를 날린 흔적을 목격했을 뿐이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막혔을 것이다.]
“정보제한이라는 건가?”
[조금 성격이 다르다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영 틀린 것은 아니겠지. 살바토르가 내 생각보다 많은 걸 전달해주고 떠난 모양이로군. 하긴, ‘종언의 불’도 전달한 마당에 이상할 건 없나.]
류 현은 그 말에 자신의 직감의 근거를 찾았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어가고 있는 비아트리체의 정신에 작용하던 세뇌가 깨진 것이 분명했다.
‘용제 살바토르’가 남긴 심장으로 만들어진 아티펙트에 깃든 ‘종언의 불’을 보고 눈이 뒤집혔던 조금 전과 다르게 아주 침착하게 상황을 유추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이것저것 남기고 소멸한 살바토르가 절로 떠올랐다.
‘용이라는 놈들은 다 이런 건가?’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살바토르도 그렇고, 지금의 이 상황도 기적같은 행운이 겹친 것일 테니까.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지. 살바토르의 추론은 논리적으로는 틀린 바가 없지만, 네 존재는 그런 이치를 이탈한 것이니 그의 추론도 틀릴 수밖에 없었을 터.]
[너는 살바토르의 추측과 다르게 그 존재의 사도나, 화신 같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될 수도 없지. 대리자가 소멸하지 않도록 권능으로 보호해주면서 힘을 내려야 하는 존재가 소멸했거늘, 어떻게 그의 대리자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살바토르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겠지만, 이런 억지 가정이 더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탓할 수는 없겠지.]
“아까부터 이야기가 빙빙 도는 것 같은데.”
[오해는 풀어야 할 것 아니냐. 살바토르가 떠나기 전에 베푼 것이 있으니, 목숨 걸고 싸운 나의 의견보다는 그의 의견을 더 믿을 터인데.]
“너도 빚이라도 지워두고 싶다는 건가?”
[그래. 살바토르라면 너의 존재를 제대로 꿰뚫어보고 나면 차지하려고 들겠지만 나는 그런 피곤한 일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다.]
“네 동족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사람을 계속 위험물 취급하는 게 별로 다르진 않은 것 같다만.”
[위험물 취급이라면 꽤나 잘 쳐준 것 같은데. 그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나? 너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야. 이 자그마한 행성은 물론이고, 우리 동족과 저 초월자들도 너의 존재를 알고 나면 달리 생각하게 될 터이니.]
“......”
류 현은 입을 다물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경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아트리체는 류 현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향성이었지만.
[인간이, 그것도 어느 행성보다 취약한 인간이 생명체의 적과 같은 힘을 홀로 오롯이 담고, 키워내고 있다. 그 옛날 소멸했다던 [악마]의 재림 같은 얘기 아닌가. 너의 존재를 제대로 꿰뚫어 봤더라면 살바토르가 그냥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이유는 이 때문이지. 너의 존재는 위험하면서도 너무 탐스러워.]
[너의 힘은 어디에도 묶여있지도 않고, 최소한의 제약조차 없다. 그 끔찍한 힘으로부터 네 스스로를 지킬 안전장치조차도.]
[마치 스스로가 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