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1화 〉탐식마(貪食魔)
콰가가강! 콰득!
한계까지 응축된 한기와 용의 권능이 합쳐진 숨결은 빙하 위에 새로운 얼음을 더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얼어붙어있던 빙하를 더 단단하게 얼어붙게 만들며 그 위로 기다란 선을 그었다. 인공위성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우주에서도 관측할 수 있는 굵고 기다란 선을.
이 전투를 생중계로 관람 중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은커녕,
용의 숨결이 터져 나오는 순간 화면이 화이트 아웃 되는 바람에 다른 의미로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런 이들도 화면이 회복되고 보인 광경에 비명의 의미를 바꿔야만 했다.
그 광포한 힘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류 현은 처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약간 덜한 상태였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내뱉게 했다.
눈과 입 라인을 제외한 몸의 모든 곳이 허옇게 얼음으로 뒤덮인 채로 제 의지로 서있는 것인지,
아니면 얼어붙어서 고정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꼴이 된 류 현의 모습은,
내장이 쏟아지고 머리 한 쪽이 터져나가는 스플래터 무비 같던 이전의 혈투보다는 관람객들에게는 ‘좀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비아트리체의 화력적 우위가 훨씬 와 닿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정작 류 현을 그 꼴로 만든 비아트리체는 전혀 만족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비아트리체는 거칠어지려는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여유부리는 것이 아니라,
방금 전의 공격은 그만한 소모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기억 속 모든 기교를 다 동원해도 힘겹게 열화버젼으로 소화해내는 게 고작.
열화버젼이라곤 해도 위력이 부족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눈앞의 인간에게 힘을 나눠줬을 존재의 특성 때문에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제압은 가능하리라고 봤다. 상대가 완전히 재기불능에 빠지더라도 제압은 제압 아닌가?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무리를 한 것인데, 놈은 피해를 줄이는 정도가 아니라 빗겨내기까지 했다.
그 대가로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만든 칼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투사된 한기가 방어를 뚫고 장기 몇 개를 끝장내놓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임은 분명했다.
그걸 넘어서 이상하기까지 했다.
저 칼을 만든 능력이나, 저 칼로 빗겨내는 반응속도도 놈의 능력을 벗어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열화판이라고는 하나, 이 얼음덩어리를 반으로 가르지도 못하는 위력이 나온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
외부 요인이 작용한 것이 확실했다.
분명 회복되는 기억들 중에 자신에 대한 것은 거의 없고 계속 시답잖은 것만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의...
[...?]
꼬리에 꼬리를 물던 비아트리체 의문은 벽에 막히자마자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진 위화감을 기반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아예 비아트리체의 머릿속을 한순간이지만 하얗게 탈색시켰다.
사고의 공백은 행동의 지체를 불렀고,
의도치 않게 류 현에게 도망갈 시간을 준 꼴이 되었다.
콰창! 후두둑! 슈슉!
“커읍...”
10미터 가량 뒤로 블링크한 류 현이 연거푸 헛구역질을 해댔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당연했다. 안쪽에서 터진 피는 그대로 얼어붙어서 가루가 되었고, 그건 목도 마찬가지였다.
클리버를 이루고 있는 기운을 해체해서 몸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더 끔찍한 상황이 되었으리라.
빗겨내지 못했다면 받아들였건 말건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겠지만.
‘미친...브레스를 못 쏘는 게 아니었나?’
용종 괴수가 최대 화력은 누가 뭐래도 브레스 일 것이다.
용종 괴수를 대표하는 피어로 시작해서 비행능력이나 동급 대비 기괴한 방어력을 포함한 우월한 피지컬도 끔찍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박힌 건 브레스 일수밖에 없다.
한 번에 수 백, 수천의 목숨이 녹아내리고 그 여파로 만 단위 목숨이 날아가는 모습을 어찌 잊겠는가?
준비 동작이 존재하는 터라 완벽하진 못해도 가장 위력적인 공격수단이 브레스였다.
그런데 그걸 이제야 꺼내들었다?
기억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비아트리체의 속사정을 알 수가 없는 류 현 입장에서는 충분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방금 전 공격을 받은 천공성 위에 있을 백혜라와 희란, 그 근처에 있을 화련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잊을 정도로.
‘용제 살바토르’라는 선례가 있긴 했으나, 자신과의 전투를 통해서 적이 기억을 되찾아 전력이 강화될 수도 있다는 가정은 그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비아트리체의 브레스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한 몫 거하게 거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움직임이 굼떠졌다. 놈에게도 타격이 있어.’
혼란한 와중에도 류 현은 억지로 적의 행동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몸이 회복하는 속도가 끔찍하게 느렸지만, 그의 적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움직임이 매끄럽지 못했다.
‘...지금 걸어야 하나? 승하한테 신호를...어?’
[...감히!]
갑자기 분노를 불태우며 달려드는 비아트리체를 모습에 류 현은 멍청하게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은 아직 그의 의지를 받들 최소한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
그 틈을,
슈슉! 스칵! 공간을 뛰어넘어 둘 사이에 끼어든 승하가 검을 긁어올리며 용의 진격을 막아내었다.
세 번이나 왼쪽 눈에 상처를 입은 것에서 교훈을 얻었는지, 비아트리체가 몸을 한껏 비틀어 검을 피했다.
피하는 것과 동시에 비아트리체는 본신을 끌어당겨 꼬리를 다시 구현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내쏘았다. 소리마저 잘라낼 것 같은 기세로.
건방진 그랜드 마스터의 능력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사형선고.
머릿속이 강제로 비워졌다가 등 떠밀리듯이 지금의 상황을 맞이했지만 비아트리체는 후련함마저 느꼈다.
이걸로 두 번째로 성가신 존재를 치워버릴 수 있다.
방해만 없었어도 그녀의 예상대로 되었을 것이다.
꾸웅! 피잇- 무형의 추가 용의 머리를 포함한 온 몸을 짓누르며, 승하를 구해내었다.
목이 날아갈 위기에서 옆구리에 아주 작은 상처 하나로 그친 승하는 뒤로 구르듯이 몸을 빼내며 류 현도 자신과 같이 굴렸다.
아직 얼어붙은 그의 몸에서 인체가 아니라, 얼음덩어리가 떨어지면서 날법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바퀴를 다 구르기도 전에 화련이 손을 뻗어 두 사람을 뒤쪽으로 빼내었다.
[...!]
그것을 못 알아볼 비아트리체가 아니었다. 방금 전의 우악스러운 공간마법 운용법이나, 좌표변동은 전부 저 무녀의 작품이었다.
꾸웅! 발 구름에 빙하가 용으로 화해 일어났다.
형태가 갖춰지자마자 땅을 기는 것처럼 날기 시작한 얼음용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화련의 코앞까지 도달했으나,
꽈직! 그 목적을 다하기 직전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여태 침묵하고 있던 웨인 크로이츠는 분풀이라도 하듯이 한계까지 마력을 밀어 넣은 워해머를 말 그대로 터뜨리며 화련을 향한 위협을 분쇄했다.
그런 그를 비웃듯이 머리통이 부서진 얼음용의 단면에서 작은 용의 머리통 셋이 돋아나 둘을 향해 쇄도해왔다.
웨인은 그대로 화련은 안은 채로 머리통 하나당 무기 하나씩을 날려먹으며 공격을 저지했지만, 꽤나 위태위태해 보였다.
비아트리체의 눈이 날카롭게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저 정도의 인간을 묶을 언령도 쥐어짜내야 할 판이었지만,
한 순간이면 충분하다는 걸 잘 알았다.
자꾸만 난입자에게 눈이 돌아가는 가서 흐름이 끊기는 것부터가 그리 현명한 대응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기에는 비아트리체의 머릿속이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점점 기억을 되찾으면서 꼬리를 무는 의문과 그 의문이 벽에 부딪혔을 때 정신에 가해지는 세뇌의 제재가 그녀로 하여금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위화감을 지우겠답시고 머리통을 비워버려도 상황이 꼬인 것에 대한 분노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떨...]
결정적인 틈을 발견했다고 여긴 비아트리체가 그것을 잡아채려는 순간,
틈을 찌르고 들어온 건 류 현이었다.
후웅! 뻐벙!
제 몸의 살덩이들이 얼어서 투둑 떨어지면서도 있는 힘껏 풀스윙을 날린 류 현의 기세에 놀라 물러선 비아트리체는 마냥 뒷걸음질만 치진 않았다.
비아트리체의 등 뒤로 신체의 일부분보다는 보석 공예품 같은 날개를 펼쳐졌다. 본신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부위.
움직이는 게 가능한 가 싶은 공예품 같은 여러 장의 날개 중 절반이 움직이자 공기가 일변했다.
날개짓의 반작용으로 공기가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바뀐 것 마냥 말 그대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승하는 물론이고, 류 현조차 완력으로 그것을 빠르게 떨쳐내기 힘들 정도로!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용의 권능 행사는 뭔가 의도해서 아껴둔 것은 아니었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지만, 제 몸에 멀쩡하게 달려있던 것을 움직이는 것조차 기억이 돌아와야만 할 수 있게 된 용의 비극만 있을 뿐.
전술적인 고려 같은 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이었다.
비아트리체는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게 열 두 장의 날개로 홰를 쳐댔다.
<너희는 이보다 더 높이 날 수 없다.>
용이 가진 권능이 저보다 낮다고 규정한 인간들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을 넘어, 그대로 인간 둘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버릴 기세인 압력 속에서 류 현은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오른손의 날을 세워 휘둘렀다.
그의 오른손에 쥐여져 있던 클리버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손날의 궤적을 따라 검은 잔흔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잠깐이었지만, 그 후폭풍은 명확했다.
츠즉! 쑤우웅! 정체된 것을 넘어서 내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죄다 짓누르던 공기가 쑤욱 빠져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크게 심호흡했다.
[떨어져라. 유동하라.]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인지 비아트리체의 언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닥쳐들었다.
방금 전까지 어그로가 휙휙 돌아가서 자꾸 맥이 끊기던 것과 비교하면 믿기지 않는 침착한 대응이었으나,
류 현 또한 오산을 만들어낼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꾸그극! [뭐...?]
류 현의 전신과 발밑에 작용하기 위해 모여들던 힘이 우악스러운 저항에 밀려 흩어져버렸다. 검은 불꽃을 거둬들인 현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아니, 검은 불꽃이 있을 때에도 잠깐 멈칫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했었다.
비아트리체는 몸을 띄우며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썼으나, 클리버를 모두 해체해 그 기운을 당겨온 류 현은 그럴 시간을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스트라이커 중에 가장 강력한 칼을 빼들기로 했다.
“승하 씨!”
외침을 듣자마자 비아트리체는 자신의 시간감각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또 다!
불길한 예감에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이전과 달리 비아트리체가 할 수 있는 건 지극히 느리게 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 끔찍하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검끝을 보는 것뿐이었다.
검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감각 확장이 전보다 덜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반면 트랜스 상태에 제대로 돌입한 승하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용의 왼쪽 앞발을 타고 휘감아 그 비늘을 죄다 벗겨내고 발목 부분을 쳐낸 것과 류 현을 향한 오른쪽 앞발을 쳐내는 데 한 호흡도 필요하지 않았다.
후욱-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숨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까앙! 투학! 날숨과 함께 검을 거둬들이자마자 용의 앞발이 떨어지며 시간이 폭발적으로 그녀를 덮쳐들었다. 트랜스 상태가 끝난 건 아니었다.
앞전의 그 짧은 경험만으로 배분 요령이 생긴 거였다.
숨을 들이마시며 승하는 잠깐 놓았던 고삐를 확 끌어당겼다. 모든 감각들이 다시금 시간을 잡아 늘어뜨렸다.
그녀는 발을 굴러 뛰어올랐다.
본신의 앞발이 잘린 용의 눈이 자신의 검은 반 박자 느리게 쫓는 듯 했지만 개의치 않고 검을 내려쳤다.
줄곧 노려왔고, 이미 성과도 세 번이나 낸 왼쪽 눈!
예상한 것인지 용의 눈동자가 검이 움직이는 것과 똑같이 궤적을 그렸다.
피할 순 없다. 방금 전에 내보인 날개 같은 괴상한 능력을 더 숨겨놨더라도 이건 피하지 못한다.
승하는 반쯤 관람객이 된 기분으로 용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용의 판단은 왼손을 방패처럼 내미는 것이었다.
그다지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스걱- 처음과는 다르게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는 승하의 검은 가볍게 약지와 소지 사이를 가르고 순식간에 손바닥 절반까지 도달했다.
그대로 팔까지 타고 내려가려던 것을,
꽈악! 비아트리체는 그대로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막고자 했다.
황당하게도 승하가 검에 저항감을 느끼며 그것이 헛된 짓이 아님이 증명되었으나,
승하는 혼자가 아니었다.
빠악! 정제된 기운을 흡수해 혼자 다른 시간대에서 노는 듯한 승하만큼은 아니지만,
비아트리체만큼은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게 된 류 현의 레프트 훅이 관자놀이를 후려치며 집중력을 앗아갔다.
츠걱! 꾸웅! 소지와 함께 연장선상에 있는 팔뚝의 1/5가량이 날아간 비아트리체는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발을 굴러 멈추며 동시에 얼음을 일으켜 둘을 떨쳐내고자 했다.
치이이! 화르륵!
이제 검은 기운이 몸 윤곽에 흐르는 것을 육안으로 알아보기도 힘들 지경이었지만 류 현은 검은 불꽃을 일으켜 얼음벽을 증발시켜 승하에게 시야를 확보시켜주었다.
그 잠깐 동안 트랜스 상태를 벗어났다가 사정거리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돌입한 승하가 다시금 용의 왼쪽 눈을 노려왔다.
비아트리체는 왼쪽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의 제스쳐는 아니었다.
푸쉭!
눈꺼풀 위로 타는 듯한 통증이,
벌써 네 번째로 느끼는 통증이 내달렸지만 이번만큼은 분노로 눈이 돌아가지 않게 정신을 붙들었다.
끔찍한 고통과 분노 속에서 비아트리체는 부서지지 않은 오른팔에 덧씌워진 용의 앞발과 꼬리를 움직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앞발은 짐승처럼 달려드는 시커먼 남자를 저지하는 대가로 으스러졌고, 꼬리는 저 끔찍한 검격을 두 번을 채 막지 못해 명치 부분에 기다란 검상이 새겨졌다.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상대를 얕게 볼 수 없었다. 이미 그럴 마음 따윈 사라졌다.
해왕이라고 이름 붙여진 용은 아직 남아있는 한기와 이제 쥐어짤 것도 거의 남지 않은 언령을 짜냈다.
그것이 스스로의 한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허용된 조작된 한계치라는 걸 그 순간 깨달았지만 용은 그 분노마저 술식의 땔감 삼았다.
[떨-어-져-라]
분노를 기반으로 한기와 언령이 서로를 뒤섞이며 끔찍한 상승효과를 내었다.
세 존재가 뒤엉킨 3평 남짓한 공간은 그 순간 용의 영지가 되었다.
정제된 기운을 흡수해 일종의 도핑 상태였던 류 현도,
트랜스 상태의 극에 달했던 승하도 용의 영지가 되어버린 공간에서 용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정말 찰나라고 밖에 표현 못할 시간을 멈춘 것이었지만,
멈췄다고 하기도 힘든 수준이었지만,
그것이면 족했다.
본신을 끌어당겨와 조금이라도 몸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힘을 모을 그 잠깐이 필요했던 거니까.
비아트리체의 머리 위로 용의 머리가 신기루처럼 드리웠다.
그 모습이 말하는 바는 확실했다.
브레스!
브레스를 내뱉고 휘청거렸던 것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의 마력이 압축되었다.
품을 수 있는 힘의 최대치에 도달과 동시에, 억누르던 힘도 같이 풀렸다.
류 현과 승하는 막 경직에서 벗어나 자세를 바로 잡기 바쁜 상태였다.
비아트리체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이걸로 됐다!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꾸웅!
류 현의 지시를 따로 받진 않았지만 이런 때를 위해,
웨인에게 몸을 맡기고 힘을 비축하고 있던 화련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용의 머리 위를 한참 위에서 생성시간 공간으로 짓누르는 것도 아니고,
벌려진 턱 사이와 턱 아래에 공간을 끼워 넣는 행위는 속이 뒤집어지는 내상과 함께 전력 이탈을 일으켰지만,
그녀가 찰나를 벌어 지킨 동료는 세계 최강의 스트라이커들이었다.
쉭! 승하는 반쯤 무너진 자세 그대로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뻗었다.
허공을 향해서 백색 숨결을 내뿜고 있는 용의 뱃가죽을 향해서.
츠익- 푸확! 복부의 피부를 뚫었다는 걸 느끼자마자 그대로 그어 올려 환부를 넓히고는 우당탕 앞으로 굴렀다.
칼을 놓음과 동시에 트랜스 상태가 풀려버렸고, 화련과 똑같이 전력 이탈을 하게 되었다.
승하가 가진 공격력을 감안하면 영 만족스럽지 못한 성과였지만, 그녀의 뒤에는 류 현이 있었다.
제 몸뚱이마저 태울 기세로 검은 불꽃을 한껏 일으키고, 남은 오른팔은 원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기운으로 꽁꽁 싸맨 그가.
츠걱- 쿠가각- 콰득-
그렇지 않아도 방어력이 소모된 비아트리체의 피부에 틈까지 벌어지자,
창처럼 내쏜 손이 그 틈을 비집고 손쉽게 피하층과 복막을 뚫고 들어갔다.
뚫고 들어갔음을 류 현이 느끼자마자 몸 위로 타오르던 검은 불꽃이 푸쉬식 꺼졌다.
겉보기만 꺼진 것일 뿐 실제로는 몸 안으로 불꽃을 끌어당긴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미친 짓이었지만 류 현은 그것이 답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자마자 그렇게 했다.
끔찍한 작열통이 그의 온몸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고통은 길지 않았다. 류 현은 불꽃이 튈 거 같은 눈으로 자신에게 배를 꿰뚫린 용을 노려봤다.
비아트리체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의 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겉보기와 다르게 훨씬 복잡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지만,
류 현의 알바는 아니었다.
비아트리체가 당혹과 고통이 뒤섞인 신음을 내지르기도 전에,
쿠웅!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그의 팔이 비아트리체의 등 뒤로 튀어나왔다.
반대편으로 뻗어져 나온 그의 손아귀는 검은 불꽃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류 현은 초점이 나가버린 용의 눈을 한 번 보고는,
푸걱! 팔을 뽑아내며 몸을 밀어버렸다.
용의 몸이 하릴 없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