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탐식마(貪食魔)
안구에서 터져나오는 피보라를 이룬 핏방울 하나하나를 눈으로 잡아채며 승하는,
그 순간 곤두선 솜털마저 느낄 정도로 집중력이 날이 서 있음 깨달았지만 더 몰아붙이지 않고 몸을 빼내었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들어가면 트랜스 상태에 돌입하게 될 거다.
그것까진 좋지만 몸이 견뎌내지 못할 게 뻔했다. 자연스럽게 거기 도달하다고 한들 소모 값이 없진 않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만 다듬어서 이 전장에 온 류 현과 달리,
자신은 어떻게든 전력을 끌어올려보겠다고 흉내 내기에 그걸 벼락치기까지 하지 않았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 것도,
류 현이 혼자서 하는 탱킹마저 위태위태한데도 바로 뛰어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억지로 끼워 맞춘 기술의 여파가 생각보다 컸다. 비슷한 계열이긴커녕, 아주 다른 식으로 마력이 운용되는 것도 자기 식으로 흉내 낼 수 있는 천재의 내부 균형이 깨질 정도로.
그녀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스스로 이렇게 변한 것도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안 빼도 되겠어?”
그 천재가 그리 말하며 류 현이 쥔 클리버를 쓱 훑어봤다.
일반인이 본다면 뭔가 기분 나쁜 시커먼 클리버라고 하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우악스럽지만 깔끔하게 마무리된 칼이었다.
마력검의 달인인 만큼 이정도 완성도를 보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기량이 필요한지 모를 수가 없었다.
더욱이 류 현이 자신의 수련을 도와주면서 스스로의 어려움도 토로했었기에,
저것이 류 현의 기량을 넘어선 결과물임을 모르지 않았다.
화련과 자신이 보고 두려움마저 느꼈던,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류 현이나 보일 수 있을 법한 기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불과 40여초 전만 해도 ‘그 상태’였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빼면 다시 이렇게 할 수 있을지 장담 못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류 현의 대답은 그녀가 바라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평온한 목소리,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면서도 가장 위태로운 저 스스로는 끼워 넣지 않아서 옆에서 보는 이를 열 받게 하는 태도까지.
화련이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지도 모르지만, 승하가 느끼기에는 그는 괜찮아 보였다.
“아님 잠깐 엘릭서라도 마시고 올래?”
“시간은 벌 수 있으시고요? 저녀석 지쳤지만 공격은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흠...방어 몰빵형인 줄 알았는데 반대였던 건가?”
“글쎄요. 그보단 복잡한 문제 같은데.”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시선을 비아트리체로부터 고정한 채였다.
비아트리체는 완전히 뭉개지다 못해 핏물 수준이 된 제 왼쪽 눈의 일부분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멍하니 남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거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이 반응하네.”
“좀 뒤로 물러나 계시죠.”
“너 또 그러면?”
“이제 그럴 일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랬다간 제 뒤통수가 먼저 터져서 끝날 거 같거든요. 류 현은 끔찍한 두통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비아트리체의 방어가 약해진 덕에 승하가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도 저 미친 방어력을 뚫을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동안 류 현이 치른 대가도 만만찮았다.
체력적인 부담으로 재생력과 체력을 갉아먹은 검은 불꽃을 꺼버린 건 말할 것도 없다.
대해 같은 마력을 양껏 밖으로 쏟아내던 통로는 이제 욱신거리다 못해 뽑아내는 마력줄기가 균일하지 못할 지경인 점이나,
처음에 복강이 찢어졌을 때보다 재생이 조금이지만 느려진 것,
그리고 클리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긴 하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질 정도의 지독한 두통까지. 류 현은 제 손에 쥐고 있지만, 쥔 거 같지가 않은 존재감의 클리버를 힐끗 봤다.
‘...힘의 운용 방식의 문제가 아니야. 정보 그 자체가 문제인거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류 현은 이 두통의 원인을 파악했다.
비아트리체가 승하와 자신을 임시변통 공간격리로 가두었을 때,
그 잠깐 동안 두통이 멎었었다.
클리버를 휘둘러 그것을 깨고 나오는 순간 확신하게 되었고.
‘아직 나한테 허락된 정보가 아니라는 건가.’
마치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용사]라는 말을 뱉었을 때처럼,
‘용제 살바토르’가 공간 격리를 펼치기 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었을 때처럼.
천기누설 받은 대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존재를 짓눌러오는 기괴한 압력.
그것이 두통의 원인일터.
‘그럴 만도 해.’
[...한심하군.]
멍하니 제 눈이었던 잔해를 내려다보던 비아트리체가 내뱉음과 동시에 그것을 흩뿌렸다. 제 신체의 일부분이었던 그것들을.
류 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클리버를 방패로 내세우고 약간 뒤에 서있던 승하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파콰강! 파캉! 백색 폭발이 클리버와 함께 두 사람을 가볍게 날려 보냈다. 폭발의 와중에도 류 현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의 변화를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이전에 화련이 보았던,
주변 마력이 얼어붙음과 함께 공간이 얼어붙는 듯한 광경을.
류 현은 속으로 욕지기를 뱉으며 방패로 삼았던 클리버를 비틀었다.
파캉! 콰직! 쿠화악! 살짝 비튼 것만으로 날려가던 방향이 확 바뀌었다.
그대로 공격범위에서 밀려나온 류 현은 일어서기도 전에 눈을 감은 승하의 뺨의 두드렸다. 승하의 앞머리와 눈썹에는 하얀 살얼음이 껴있었다. 얼굴 곳곳에도 허옇게 언 곳들이 보였다.
실력에 비해 형편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항마력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그녀에게 회색 오러를 북돋아주긴 했지만, 다른 방어는 더 얹어주지 못했다.
클리버를 유지하느라 다른 여유가 없었다. 검은 불꽃을 일으키면서 꺼진 회색 오러를 제 몸에도 못 일으키고 있으니 충분히 최선이라고 할 만 했지만.
“승하 씨!”
“어우, 머리 띵해. 나 아직 안 죽었어.”
승하가 눈을 끔뻑일 때마다 얼음조각들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아예 얼어터진 눈썹이나 머리카락도 같이.
눈가를 슥슥 비벼 대충 털어낸 승하는 류 현을 보고 저가 더 인상을 찌푸렸다.
“...네 꼴이 더 심각해 보이는데.”
“...전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
그 대답에 승하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달리 직접 노출이 아주 없지 않았던 류 현은 오른 쪽 무릎이 옷과 함께 연골이 보일 정도로 살덩어리가 얼어 터져서 떨어져 내리고,
오른 쪽 어깨는 얼음인간이라도 된 것 마냥 크게 금이 간 상태였다. 쩍 갈라지며 틈에서 뿜어지는 김이 잘 못 본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그놈의 안 죽는다는 진짜...”
학을 떼며 품에서 나와 제 발로 서는 승하를 살피던 류 현은 빙하를 긁어내는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하얀 용이 내려앉아있었다.
그 근원이 핏물과 파괴된 안구 파편이라는 걸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새하얀, 얼음으로 이루어진 용이.
류 현은 직감적으로 검은 불꽃 방어용으로 마구 던져대던 용형상의 마법과는 저것이 질적으로 다름을 깨달았다.
“아니 미친 뭐가 계속 나와?”
“처음부터 저걸 다 퍼붓지 못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죠.”
“못 했다고?”
“아니면 뭐겠습니까. 처음부터 저렇게 퍼부었으면 이미...”
쿠왁! 두 사람이 아니라 팀원 전체를 집어넣고도 공간이 남을 것 같은 아가리가 덥썩 덮쳐들었다.
승하는 가볍게 뛰어올라 피해냈지만,
무릎이 겉보기보다 손상이 심했던 류 현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다시금 클리버를 앞으로 끌어당겨 방패삼아,
가가가각! 콰콰! 저보다 높이만 세 배는 더 높아 보이는 용의 돌진을 막아내었다.
막아냈다기에 는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지만, 신경이 그리로 쏠린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승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스칵! 파캉! “어?”
얼음으로 이루어진 용의 정수리에 바람구멍을 내주려던 승하의 검격은 검이 깨어지면서 힘의 반의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대로 힘을 제대로 내보내지 못하고 공중에서 헛도는 승하를 향해,
[떨어져.]
꾸웅! 무형의 압력이 짓눌러왔다.
비아트리체의 힘으로 이루어진 얼음용이 코앞이라 가해지는 압력은 배가 되었다. 승하는 저항할 새도 없이 그대로 용의 몸뚱이 위로 쳐 박혔고, 한기가 제 피부 위로 파고들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딴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쿠왕! 치이이! 후르르!
용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발치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급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항마력이지만,
마력이 섞이지 않는 한 화염방사기 세례에도 좀 덥네 하고 말 몸뚱이에 열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면 뻔했다.
그 열기 덩어리가 그녀가 쳐 박힌 용의 목 부분에 내려서더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여?”
승하는 류 현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툴툴 거렸다.
“진짜 서러워서 항마력 늘려야지. 유니크 아티펙트 중에 그런 것 없어?”
“글쎄요. 저라고 뭐든 다 아는 건 아니라서.”
“...나 두 번 당하면 리타이어 할 거 같은데. 저격보다 이게 제일 끔찍하네. 너 이거 어떻게 버틴 거야?”
“몸으로 때우는 것 외에 뭐가 있겠습...”
류 현은 갑자기 솟아난 거대한 존재감에 반응하려고 몸을 돌렸지만,
[아주 여유로워 보이는 구나.]
콰긱! 거대한 용의 팔이 그를 잡아채는 게 한 발 더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