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화 〉탐식마(貪食魔)
열여섯 번.
숫자를 속으로 세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 숫자가 머리에 새겨졌다.
이 이상 당하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마치 경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열여섯 번째로 당한 강제 복강 개방은 그에게 눈앞이 캄캄해지는 통증을 선사했다. 내부 장기가 쏟아져서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는 건 덤이었다.
당연히 열여섯 번째라고 더 잘 참아지고 그러는 건 당연히 없었다.
감각이 무뎌진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반사 속도 쪽은 티나게 문제가 생긴 반면 통증은 그것을 수치화 하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계속해서 마력을 쌓으면서 그의 신경줄은 생명체들과 비교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튼튼해졌지만, 그렇다고 통증이 의미가 없어지진 않았다.
아무리 류 현이라도 복부 장기가 다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순간적으로 통증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피할 순 없는 거다.
이제 생명체가 맞나 싶을 정도의 내구성과 재생능력을 갖추게 되긴 했으나, 신체구조가 아주 바뀐 건 아니었으니까.
다른 플레이어라면 의식을 유지하기는커녕 목숨을 건지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출혈에도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날릴 수는 있지만, 그게 항상 가능한 일이었다면 팀을 위험한 곳에 같이 끌고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처럼 북극 같은 곳으로 네임드 몹을 유인하고 그냥 개싸움으로 몰고 가는 게 훨씬 안전하고 손쉬운 일일 테니.
‘강림’의 파괴력을 좀 낮추는 일이긴 하나,
‘탐욕’을을 억누른 채로 ‘강림’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이미 인간을 초월한 것 같은 내구성, 반사 속도, 마력 방출 한계량, 재생속도가 한층 더 강력해지니까.
어디까지나 더 강력해진 것이지,
인간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었고,
류 현은 저보다 수 백 체급은 더 높은 네임드 몹을 상대로 ‘순간적으로 필름이 끊기는’ 상황을 감내해야만 했다.
바로 지금처럼.
“카학...!”
공기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핏물을 밀어내서 난 것 같은 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새어나왔다.
폐의 반이 얼어 터져버렸으니 의식을 유지하는 걸 넘어서 살아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지만 류 현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잠깐의 지체는 이 다음에는 더 큰 부상을 낳는다. 눈덩이가 구르듯이 점점 더 감당하기 힘든 지경으로 커지다가 결국 놈에게 차고 넘치는 틈을 주게 될 터였다.
이따금씩 힐끗거리고 있는 후열을 괴멸시킬 틈을 말이다.
‘이미 한 번 당했다. 다시 그 꼴은 못 보지.’
하지만 그 결연한 의지만으로는 무릎이 빙하에 닿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류 현은 배 안쪽을 파먹고 심장에 닿으려는 한기를 억누르며, 놈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상당히 사그라진 검은 불꽃을 일으키려고 했다.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지 못했다는 의미다.
‘어...?’
잠깐 블랙아웃 하는 정도가 아니라, 네임드 몹의 마력 정수를 삼켰을 때나 느껴본 의식이 멀리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전투 중 용납할 수 없는 틈을 내준 것에 경악할 겨를도 없었다.
자신이 육체 통제권을 잃었음에도, 몸뚱이가 바닥에 얼굴을 쳐 박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으니까.
류 현의 몸이 입은 부상을 잊은 것처럼 곧바로 비아트리체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검은 불꽃은 일으키지 않았지만, 비아트리체는 그의 돌격을 가볍게 쳐내지 못했다.
그의 양팔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 놈에게 뻗어 가는가 싶더니,
츄왁! 문어다리마냥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정면을 죄다 틀어막은 채로 놈을 공격해갔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것인지 비아트리체는 본신의 꼬리로 그것을 튕겨내고 뒤로 펄쩍펄쩍 뛰었다.
검은 뱀들은 조금 기세를 잃긴 했지만 꿈틀거리며 용을 쫓았다.
스스로 평하기에 집중력과 체력이 많이 떨어진 난 지금 상태로는 어림도 없는 운용이었다.
평시에도 자신에게 저런 짓을 시켜도 저것보다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보다 낫군.’
왜 이렇게 남의 얘기 하는 것 마냥 행동을 평하고 있느냐면 자신의 의지와 집중력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게임 캐릭터 시점으로 이벤트 씬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가 움직일 수 없는 이벤트 씬 말이다.
비슷한 것도 아주 겪어보지도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강림’상태에서도 이 비슷한 있었지만, 꽤 많은 편이었지만 이런 식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 때는 하나같이 의지로 끓어오르는 충동을 더 이상 제어하지 못하고 먹혔었던 거였다.
말 그대로 폭주였다.
후에 정상적인 상태가 되고,
몸을 회복하면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렇게 한가롭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이 행한 일을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실시간 평가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경우도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게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대부분은 정신을 차려보니 일이 끝나있는 식이었다.
전생에서 그럴 때 류 현의 할 일은,
실력 향상을 위해 그 때의 기억 되살리거나,
그 때가 되었을 때 좀 더 확실하게 네임드 몹을 때려잡기 위해 괴수를 때려잡고 먹어치우는 것 정도였다.
현생은?
류 현은 부분적이나마 ‘강림’ 제어에 성공했다.
공격력은 많이 깎아먹긴 했으나 위험도를 최대한 낮추었고,
현재까지는 이 방식은 꽤 잘 먹히고 있었다.
엘더 리치와 본 드래곤 때는 ‘강림’에 먹히기도 했지만,
네임드 몹들을 상대하면서 한 번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류 현 스스로도 생각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로 완전히 먹힌 적이 없다는 게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지금은 그 자신감이 창날로 바뀌어 그의 멘탈을 후벼 파고 있지만.
‘뭐가 문제였던 거지?’
전생에서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뇌가 끓는 것 같은 충동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회귀 후,
‘강림’에 도달한 직후에는 그 문제가 괴롭히긴 했지만,
네임드 몹을 계속 잡아 죽이면서 점점 좋아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이 안 되던 전생의 노력들이 허망해질 정도로 ‘탐욕’에 대한 제어 능력이 점점 좋아졌다.
힘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위험성을 배제했기에, 이번 원정 직전에 에너지 드레인을 통해 비아트리체의 저격 방어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을 먹어치워 회색 오러 버프를 얻고 나서는 자신이 파 먹히는 악몽은 완전히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렇다곤 해도,
‘강림’상태에서 저가 버텨낼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하면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류 현은 자신감이 오만으로 탈바꿈하지 않는 지 계속 돌아보길 반복했다.
그래서 승하에게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꽤나 지쳤지만 아직 한 번의 몰아붙이기 할 힘은 남아있었다.
백혜라가 종언의 불을 발동시키지 않았다면 폭주고 뭐고 ‘강림’에 기대야 했겠지만,
대규모 술식이 한 방에 수포로 돌아간 탓에 비아트리체도 꽤 지친 상태처럼 보였으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헌데 지금 이 상태는 대체 뭐란 말인가?
새로운 ‘강림’ 후유증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야,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류 현은 아주 자연스럽게 뼈대뿐인 검은 날개를 펴고 비아트리체를 물어뜯을 것처럼 바싹 달라붙은 자신의 몸에 의지를 투영시키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제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대로 안 되는 건몸뿐이었는지 평소 수련할 때처럼 아주 쉽게 되었다.
‘뭐야?’
역시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예상외라고 해야 할까.
류 현은 한 눈에 지금 이 기괴한 상태의 원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세아처럼 보는 능력을 각성해서는 아니었다.
두 가지의 기억이 전구마냥 맹렬하게 불을 뿜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흡수가 덜 된 엘더 리치의 기억이 뒤섞인 마력 덩어리와 ‘페릭스’의 그것이.
누가 봐도 서로 호응하는 걸로 보이게 들러붙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처럼 한 쪽이 확 밝아졌다가, 다른 쪽이 밝아지기 시작하면 어두워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류 현도 생전 겪어보는 일이었다.
애초에 전생에는 이런 기억의 흡수 같은 건 없었으니까.
있어봐야 먹어치운 네임드 몹의 힘이 너무 커서 흡수 하는데 고생한 적은 있었어도,
마력 덩어리에 자신이 해독할 필요도 없이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정보가 깃들어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마저도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정도가 제멋대로였지만.
도로 뱉어낼 수도 없고 평소에는 건드려봐야 찔끔 정보 한 번 뱉고 별 반응도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림’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것도 관망을 택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고.
이미 제 몸을 갉아먹는 걸 확인한 바 있는 암덩어리 같은 게 싹 사라졌는데 별 해도 없고, 처리 방법도 알 수가 없는 걸 처리하겠다고 전전긍긍하기에는 그는 너무 바빴다.
지금에 와서는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차게 되었지만.
‘저것들 때문인 건가? 그런데 어떻게?’
밖으로 잠깐 시선을 돌려보면 저것들이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스스로 열심히 수련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지만 저런 정신 나간 마력 운용은 그로서는 꿈도 못 꿀만한 것이었다.
검은 기운으로 만들어진 제 몸뚱이만한 팔에, 그 팔에 걸 맞는 대형 클리버까지 기운을 정제해서 만들어 휘두르다니.
거기서 무엇을 느낀 것인지 비아트리체가 막는 걸 포기하고 뒤로 내빼면서 탄환과 권능을 퍼부으며 저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시커먼 클리버가 그 모든 걸 단칼에 잘라냈다.
비아트리체가 기겁을 하며 빙하 위를 뒹굴었다.
‘딜레이가 좀 있는 것만 빼면 완벽하다.’
엘더 리치와 ‘페릭스’의 기억을 전부 흡수하면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만 하던 경지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다.
‘강림’을 억누른 채로 발동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 기운은 운용하는 게 더럽게 힘들었다.
마치 부정형인 세 번째 팔이 돋아났는데 그 팔이 근육이 아니라 순수하게 의지로만 움직이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가뜩이나 ‘강림’으로 집중력과 체력이 실시간으로 깎아 먹이는데 검은 기운까지 제대로 운용하면 정밀한 조정은 고사하고, 유지시간을 신경 써야 하는 판이었다.
전투 중간에 집중력과 함께 기운이 거덜 난 적도 있었으니.
그런데,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몸뚱이는 대체 무슨 원리인지,
두 네임드 몹의 기억을 극한으로 활용하며 그가 상상 속에서나 그려보던 전투법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 느꼈던 것과 달리 아주 아무런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장이 쏟아지는 부상 여파인 줄 알았던 뒤통수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은 두통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되고 있었다.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몸의 행동이 격화될 때마다 그게 맞다고 말하는 것처럼 같이 격화되면서.
‘근데 이거 어떻게 멈추는 거야?’
‘강림’상태에서의 폭주와 달리,
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상태라 당혹감은 금방 정리되었지만 손 쓸 방도가 안 보인다는 점에선 별 다를 게 없었다.
괴수 잘 때려잡고 딱히 큰 해도 없는 것 같아 느긋하게 찾아보자니, 후열의 동요가 그대로 느껴졌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몸이 보고 있는 시야 외의 것도 볼 수 있었다.
천공성 아래에서 자신의 변화를 느낀 것인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특히 승하는 벌떡 일어나서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이해 못할 건 아니었지만 동시에 한 숨을 참을 길이 없었다. 한 숨을 내쉴 입도 제 몫이 아니었지만.
‘돌겠네 진짜.’
한창 정보를 빼먹으려고 시도할 때처럼 이리저리 찔러봐도 서로 들러붙은 두 덩어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예전 ‘강림’ 때처럼 자신이 삼켜지는 느낌은 없었으나, 단단하기로는 이쪽이 훨씬 더 단단한 느낌이었다.
그 때처럼 힘이 네임드 몹을 쳐 죽이고 나서 힘이 다해서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류 현은 자신도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태에서 동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까지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망설임은 길었지만 결단은 칼 같았다. 류 현은 그대로 그보다 아래쪽으로 침잠해 들어가 전보다 더 커진 검은 덩어리에 도달했다.
언뜻 보면 구멍처럼 보이는 그것을,
그 안에 잠들어 있는 ‘탐욕’을 풀어놓으려고 했다. 전생과 같은 무절제한 ‘강림’ 상태에 돌입하기 위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작전이 현명한 선택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이 상태에 균열을 내는 게 급선무였다.
지금이야 비아트리체를 몰아붙이고 있지만, 승하가 접근하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이 몸뚱이가 어찌 반응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
‘꼬여도 튀었다가 다시 붙으면 돼.’
그러나 그런 결단이 무색하게 그것을 풀어놓기도 전에,
제멋대로 움직이던 몸이 클리버를 내려치려던 자세 그대로 덜컥 멈춰서더니,
푸훅! “어?”
코피를 확 쏟아내며 류 현은 제 몸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
뻐억! 그가 상태를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그틈을 본능적으로 잡아챈 비아트리체의 발차기가 몸을 끊어놓을 것처럼 배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