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
까앙! 대답대신 금속성 타격음이 돌아왔다.
도무지 생명체와 생명체가 맞부딪힌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였지만 시야가 회복되지 않았어도 승하는 확신했다.
그 잠깐 동안 손상이 상당한 것인지 시야가 바로 회복되지도,
‘가방’을 조작해서 회복약을 꺼내려는 손도 잘 움직이지가 않았다.
손이 떨려서가 아니라, 아예 감각이 없었다. 움직일 수는 있는데, 정확히 어디를 짚고 있는지가 제대로 느껴지질 않았다.
당해보니 화련이 왜 그 한 번의 저격으로 한 달 동안 반 시체 상태가 되었는지 알만 했다.
이건 권능이고 뭐고 작용하기 이전에 마력의 질은 물론이고 성향이라고 해야 하나,
에너지원일 뿐인 것이 독립된 생명체마냥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저를 깨부수려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최근에 류 현이 품고 있는 검은 것들에게 노출되어 본 경험이 있어 아주 처음 느껴본 건 아니었으나,
그 안에 들어찬 적의와 작용 방식이 아주 달랐다.
그건 어디까지나 훈련이었으니.
‘진짜 죽겠네.’
정말 일순간 얼음 감옥을 이루는 얼음 조각이 피부에 슬쩍 닿았던 것뿐이다.
아무리 자신이 스트라이커 중에서는 유리몸 소리를 들을만하다 해도, 순간적인 방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랬으니 류 현을 만나기 전에도 던전 솔플을 밥 먹듯이 돌 수 있었지.
방금 전도 당황하긴 했으나 뒤를 생각 안하고 마력을 한껏 돌려서 방어를 했다.
류 현과 희란의 보조가 없다면 방금 그 방어로 마력이 거덜날 만큼.
그런데도 이 꼴이다.
트랜스 상태에 들어갔던 데미지가 아직 남아있기도 했지만, 이건 그걸로 다 설명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육체적 데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항마력도 봉쇄된 수준.
“류...크합...”
몇 번 헛손질한 끝에 류 현을 불러보려고 했지만 나오는 건 말 대신 토혈뿐이었다.
‘어...잠깐...’
찰박찰박-
“우프픕...콜록...콜록...”
밀고 들어오는 현기증에 눈앞에 까맣게 변하려는 찰나,
머리 위로 뜨거운 것이 끼얹어졌다.
그냥 차가운 게 아니라, 마비되었던 감각과 함께 몸의 기능이 돌아와서 후끈해진 것 같다고 느낀 것이었지만.
“어푸읍...야, 이렇게 막 안 들이부어도...”
“자기 꼴이나 보고 말하시죠.”
“뭐? 야 너 무슨 말을...어?”
내려다보니 나름 고위 아티펙트들을 갈아 넣어서 만든 옷들은 온데간데없고,
그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같은 색의 얼음조각이 피부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말이 달라붙은 것이지, 피부가 아래가 차오르면서 알아서 떨어져나가는 꼴이 박혀있었던 게 분명했다.
류 현이 엘릭서를 퍼붓기 전에는 어떤 꼴이었을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렇게 할 만한 상태였음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됐다고?
등허리에 식은땀이 구르는 듯 했다.
“일단 이거라도 두르시죠.”
류 현이 던져준 로브를 받아든 승하는 뚱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인지, 류 현은 여전히 상반이 벗은 몸이었다.
류 현이 가진 방어력과, 옷쪼가리의 방어력도 아쉬운 자신의 몸뚱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오던 불평도 쏙 들어갔다.
승하는 로브를 대충 꿰어 입으며 그의 몸 곳곳에 달라붙어서 타오르고 있는 검은 불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 그거 안 꺼도 돼?”
“이거 없으면 이빨도 안 들어갑니다.”
“저거 방어력이 좀 소모되긴 한 거 같은데. 피부 없는 부분은 그냥 칼질도 박히더라.”
“그보단 우리 소모가 더 크니 문제죠.”
류 현이 슬쩍 들어 보인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야 너 그 정도면...”
“걱정마십쇼. 중간에 안 퍼질 정도로 조절하고 있으니까. 승하 씨 말처럼 저놈도 멀쩡하진 못하니 이제 끌어내린 상태에서 끝을 봐야죠. 신호 같은 거 없을 테니 몸이 회복되면 알아서 돌입하시면 됩니다.”
“네가 웬일이래. 어, 근데 진짜 저거 저 안으로 도망 안치네?”
승하가 가리킨 비아트리체의 몰골은 굉장히 험악했다.
그녀가 연달아 헤집어 놓은 왼쪽눈 부분을 류 현도 노린 것인지 검은 불꽃이 지지고 지나간 화상자국으로 이젠 비유 약한 이는 제대로 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고,
복부 부분의 드레스도 다시금 깨져서 검은 불티가 타닥타닥 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말을 나누는 동안 물러날 틈도 있었고,
자신의 최대 방어수단이 등 뒤에 있음에도,
놈은 꼼짝 않고 다시 날아간 피부 수복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저 정도 방어력이 아무 대가 없이 유지되는 거면 양심 없는 거죠.”
“그런 거면 다행이긴 한데...”
“얼마나 벌어드리면 되겠습니까?”
승하는 놀란 눈으로 류 현은 올려다봤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할 말이었으니까.
우크라이나에서 데스나이트 때 자신에게 맡긴 적이 있긴 했지만,
자신이 나서서는 곤란한 상황이 아니고선 류 현은 팀원들에게 부담 갈만한 말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류 현 스스로가 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는 것도 포함된 엄격하다 못해, 가혹해 보이기까지 한 기준이었다.
류 현은 그런 잣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지만, 어디 하루 이틀 그를 보아왔는가.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세아의 투병생활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도 크게 티를 내지 않았다.
네임드 몹 같은 강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네임드 몹의 힘을 다 빼놓고 나면 돌입하라든지,
자신이 말한 상황이 되면 도주 루트를 확보하라든지.
지시라고 해봐야 좋지 못한 상황에서 몸을 어떻게 뺄지에 대한 지시가 대부분이었다.
그건 거의 강박이라고 해도 할만 했다.
이번 미국 원정에서야 화련을 한 번 무리시킨 전적이 있긴 했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무모한 돌격작전을 ‘살바토르’ 상대로 성사시킨 것도 류 현이 아닌가.
그의 기량이 아니라 엄청난 우연의 산물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승하 입장에서는 귀를 의심하게 될 만한 말이긴 했다.
“어...5분? 아니...3분 정도면 될 거 같은데.”
“5분 정도면 어떻게든 될 거 같네요. 천공성 쪽으로 가 계십쇼. 그렇지 않아도 혜라양이 좀 힘에 부쳐하더군요.”
“어...으응.”
진심이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승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따랐다.
슈슉! 승하가 뒤로 멀찍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곤 류 현은 앞을 향했다.
‘해왕 비아트리체’는 그 이름과는 반대로 검은 불꽃의 화기를 다 떨쳐내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피부를 수복시키고 있었다.
‘종언의 불인지 뭔지 덕에 다루기 더 편해지긴 했는데...문제는 소모가 더 심각하다는 거지.’
승하에게 내보인 손 떨림은 최대한 억누른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빙하위에 벌렁 드러누워서 그대로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해방 청뢰에서 새어나온 뇌기에 구워진 내장은 아직도 회복 안 된 부분이 있어서 마력을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핏물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이번이 첫 시동도 아니고, 어떻게든 제어해 본다고 해본 건데 덜 구워지는 게 최선이었다.
검은 불꽃과 섞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검은 불꽃이 한계일 때나 쓰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 슬쩍 시도는 해봤는데 생각 이상의 반발력이 느껴져서 잠깐이라도 쓸 수 없겠다 싶어서 바로 마음을 접었다.
동시에 썼다간 정말로 선 채로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해방 유성우는 더 끔찍했다.
가뜩이나 ‘강림’을 제어하느라 체력과 마력이 같이 쭉쭉 빨려나가는데,
거기에 해방 유성우의 불을 붙이니 조절은 ‘강림’과 함께 튀어나오려는 탐욕을 억누르는 것만 가능해졌다.
순간적으로 불을 댕겼다가, 꺼지지 않은 잔불을 주무르는 정도의 잔재주만이 가능했다.
백혜라가 종언의 불을 발동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껐다가 켜는 것만 제대로 조절이 되었던 거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조절을 해도 소모가 감당이 안 되서 전투 도중에 의식이 잠깐이지만 나갔었고.
승하에게 말한 5분은 정말 한계치에 가까운 수치였다.
지금도 겉모습만 급하게 재생시킨 것이지 안쪽은 성한 곳보다 내장이 스튜 꼴이 된 부분이 더 컸다.
당장 ‘강림’을 제어하기도 벅차니까. 검은 불꽃을 터뜨림과 동시에 갑자기 살아난 것처럼,
그의 꿈틀거리고 있는 충동은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류 현에게는 타임 어택 카운트다운이나 다름없었다.
위험하고 두렵다고 쓰지 않을 수는 없으니, 자신의 감이 보장하는 시간 내에 끝을 봐야만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도 끔찍하게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그렇기에 더더욱.
‘돌고 돌아서 다시 몸빵으로 때우기인가. 젠장, 그 세 명이 안 튀어나왔으면 좋겠는데.’
류 현이 사지가 찢기고 내장을 쏟아내기를 반복하는 고통을 각오하고 달려들려던 차,
[이해 할 수가 없어. 네가 아무리 마신의 사도일지라도 그의 힘을 훔쳐다 쓰는데 대가가 적지 않을 터인데...애초에 그를 어떻게 한 것이지?]
원독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던 비아트리체가 반쯤 넋이 나간 투로 물어왔다.
그 물음에 대답이 필요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걸 기다릴 여유도 없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횡설수설했다.
[너는 이상해. 아무리 버림받은 세계라곤 하나, 권능까지 물려받은 마신의 사도가 할 일이 아닐 진데...왜 생텀을 주겠다는 그까지 치고 우리를 배제하려는 것이지? 이 약한 인간들을 감싸봐야 네게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너는 대체 뭐지? 마신의 사도들이 그의 소멸로 전부 미쳐버렸다고 해도 너 같은 자는 존재할 수 없어. 너는 마신의 사도가 아니라 마치 그 [용사]의...[용사]?]
혼자서 화냈다가, 그 괴상한 말을 내뱉고 혼자 더 큰 혼란에 빠져드는 비아트리체를 보며 류 현은 헛웃음과 함께 툭 내뱉었다.
비아트리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자신에게 되새기는 목적이 더 강한 대답을.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면 그놈 만나서 물어봐라. 뭐가 뭔지 아는 것보단 당장 사는 게 더 중요하니까. 난 말이지.”
연이은 기현상에 혼란스러워 하던 자신에게 딱 잘라내는 대답을 던져준 류 현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