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화 〉탐식마(貪食魔)
푸확!
텔레포트 직후 닥쳐드는 기압과 빛 때문에 검격이 용의 눈을 갈라놓는 것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비릿한 혈향이 퍼지기도 전에 승하는 손끝의 감각으로 확인했다.
들어갔다!
그 생각이 제대로 형태를 이루기도 전에 그녀의 검이 또 다른 궤적을 그렸다.
의식 하에서 행한 일이 아니라,
몇 천 번, 몇 만 번 반복 끝에 몸에 새겨진 반사에 가까웠다.
카각!
하지만 비아트리체도 마냥 넋을 빼놓고 있진 않았다.
승하는 검이 다 휘둘러지기도 전에 쇳덩이를 친 것 같은 반발력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쇳덩이도 그냥 벨 수 있게 된지 오래였지만, 콱 막힌 느낌이 그러했다.
[감히...]
파캉! 비아트리체는 검을 붙잡은 손목을 슬쩍 비틀어 부러뜨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손을 뻗었다. 아직 피부가 수복되지 않아, 뻘건 살을 드러낸 손을.
파가각! 승하는 복부에 피어난 얼음꽃 때문에 날려가면서도 제 검을 부러뜨린 그 손을 유심히 관찰했다.
‘피부가...있어.’
류 현의 예상대로 저 정신 나간 방어력은 겉에 보이는 피부와 연관이 된 모양이었다. 자신이 갈라놓은 눈은 피부가 사라진 왼쪽 눈이었으니.
승하는 그대로 우당탕 세 바퀴쯤 구르고 벌떡 몸을 일으켜 복부에 피어난 얼음꽃을 마력막과 함께 뜯어내었다.
어지간히 독이 잔뜩 올랐는지, 두르고 있던 막 대부분을 같이 뜯어내야만 했다.
‘재생속도는...생각보다는 별 거 아니야.’
보통 피부가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놈의 특성이 그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피부가 차오르는 속도가 눈으로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한 왼쪽 눈보다 피부의 재생을 우선하는 걸 보면 전자인 것 같았지만.
승하는 거리를 가늠하며 ‘가방’에서 새 검을 꺼내들었다. 검이 손의 연장선상인양, 마력검이 검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물러서기는커녕, 자신을 막아설 것 같은 기세를 보이자 비아트리체의 눈에 살의가 어렸다.
[내가 약해졌다고 네가 나를 범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피익- 승하가 속으로 그딴 거 알게 뭐냐고 대꾸하기도 전에 비아트리체의 분노가 그녀를 덮쳤다.
승하가 빙하 아래에서 솟구치는 물빛 창 같은 꼬리에 반응한 건 그야 말로 천운이었다.
비아트리체의 말에 반응해서 용에게 쏠려있던 주의가 조금 풀어지지 않았다면 절대 반응하지 못할 속도와 은밀함.
카아앙! 꼬리 공격은 승하의 검을 산산조각 내고, 가슴께에 기다란 자상까지 남겼지만 전투력 상실까지는 이루어내지 못했다.
한기가 남아있었다면 피부만 긁어낸 공격도 의미가 있었겠지만,
남은 한기마저 불의 결정에 살라 먹히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말로 긁힌 상처 수준이었다. 플레이어 기준에서 말이다.
허공에서 잽싸게 블링크 트리거를 발동시킨 승하는 500미터 뒤쪽에 착지해 상처에 엘릭서를 뿌리면서 다시금 검을 꺼내들었다.
앞섶이 다 벌어져서 허전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기도 없어졌으니 전투력 손실이 올 요소도 아니니까.
‘미친 무슨 공격이 기척도 없어? 걔는 이거 상대로 어떻게 버틴 거야?’
원래도 피지컬로 싸우진 않았지만,
이런 상대를 앞에 두니 정말 답이 보이질 않았다.
자신보다 공격도 빠르고 강력하며,
덩치도 작아 사각을 노리기도 힘든데,
무지막지하게 단단하기까지 해서 트랜스 상태가 아니고선 그냥 뚫리지도 않는다.
방금 전의 공격은 류 현이 피부를 벗겨놨기 때문에 먹힌 것이라는 걸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류 현 정신 차리기 전까지는 묶어둬야 하는데...’
문제는 지금도 피부가 점점 차오르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는 거다. 머리가 나쁜 놈도 아니니, 방어가 굳혀지면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관심도 못 끌 것이다.
트랜스 상태 이전에는 몇 번 검은 검기를 받아내 보더니, 의식할 거리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류 현에게만 집중하지 않았나?
지금도 피가 펑펑 솟고 있는 왼쪽 눈에는 관심도 없고, 하나 남은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면서 피부를 회복시키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눈이 반쯤 돌아갔지만 아는 거다. 방어력을 회복하면 승하가 자신을 건드릴 수도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더...하기에는 한 번 쓰고 나면 더 못 쓸 거야.’
생각보다 강제 트랜스 상태 돌입 후 들어오는 데미지가 컸다.
방금 전도 그 트랜스 상태에 들어갔을 때 데미지가 모두 회복되지 않아서 두 번째 공격이 늦었다.
그게 제대로만 들어갔다면 어떻게 어그로를 끌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지만, 그것마저 떨쳐내고 승하는 앞으로 내달렸다.
파창! 다시금 전조도 없이 얼음꽃이 어깨부분에 피어났지만 승하는 무시하고 내달렸다.
놈도 무한한 힘을 가진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냉기도 이전보다 훨씬 덜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 같던 놈도 한계가 존재했던 거다.
“스읍...”
쉬릿- 까앙! 카가각! 캉!
왼쪽 눈의 사각을 노린 올려 베기는 가벼운 손짓에 튕겨져 나왔다.
반쯤 무너진 자세로 왼쪽 눈을 향한 찌르기는 아예 검이 잡히는 결과가 나왔다. 코앞에서 멈춘 수준이었지만, 누가 봐도 막기 급급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비아트리체는 시야의 손실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검에 반응했다.
검이 제 손아귀에 잡히자 비아트리체는 곧바로 손을 뻗어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승하의 수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슈슉! 검은 놓은 채로 반걸음 뒤로 텔레포트한 승하는 그대로 허리를 휘돌려,
퍼엉! 빠악! 쿠직! 비아트리체가 쥐고 있던 검 손잡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서 검 끝을 왼쪽 눈에 박아 넣었다.
양자의 스펙차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승하가 놓아버린 검에는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마력검이 쌩쌩하게 전개되는 중이었고,
류 현에게 틈틈이 배운 파쇄권 요령을 침투가 아닌 추진력으로 모조리 돌려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또 비아트리체의 방심 아닌 방심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이 있었다.
검이 그 결과 검은 회수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났지만, 승하는 미련 없이 다시금 블링크 트리거를 발동시켰다.
‘...다시는 못 써먹겠네. 두 번 쓰면 내 다리도 고장 나겠다.’
승하는 검 조각을 왼쪽눈에 꽂은 채 멍하니 서있는 비아트리체를 주시하며, 경련이 일려는 다리를 살살 주물렀다.
상상이상으로 다리의 타격이 심했다.
트랜스 상태는 한 번 더 쓰면 더 전투이탈이 확실하니 되는대로 어그로를 끌어보려고 왼쪽눈을 노려본 것이긴 한데,
마력검을 최대한 끌어올렸음에도 검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이 상상이상이었다.
‘죽겠다. 죽겠어. 어떻게 된 게 이렇게 해도 관통이 안 되냐. 어그로는 끈 거 같긴 한데...’
승하가 검을 꺼내들고 슬금슬금 접근을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칙! “어?”
물빛 꼬리가, 공격이 제지당하고 비아트리체의 뒤에 망부석처럼 서있던 본신의 꼬리가 다시금 그녀를 습격해왔다.
승하는 목덜미를 아주 얕게 스친 그 공격에 서늘함을 느낄 새도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거의 동물적인 감으로 인한 반응이었다.
‘이런 미친...!’
탄환이 사라졌으니 히트 앤 런도 괜찮겠지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성이 뒤늦게 상황을 따라잡자, 등골 위로 소름이 내달렸다.
‘젠장, 뭘 어떻게 해야...’
속마음과는 다르게 그녀는 마력검을 날카롭게 벼렸다. 너무 날카로워서 칼이 들어가다 말고 부러질 정도로 날카롭게!
그녀는 비아트리체가 아직도 왼쪽 눈에 박힌 검조각을 쥐고 있는 것에 집중했다.
아직도 피부가 회복되지 않은 채로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 왼쪽 눈.
자신이 유일하게 비벼볼 구석.
슈슉!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승하는 다시금 공간을 뛰어넘었다. 블링크 트리거의 스택이 쌓이는 것보다 소모되는 게 배는 빠를 지경이었지만, 당장 어그로를 안 끌면 다 죽을 판인데 어찌 사리겠나?
비아트리체의 뒤편으로 날아간 그녀는 텔레포트가 마무리 되기도 전에 있는 힘껏 목덜미 좌측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여파로 내상을 입어도, 검이 부러져도 상관없다.
전투 초반 때처럼 놈을 잠깐 동요시키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은,
[네가...아주 날 우습게 보는구나.]
분노에 찬 비아트리체조차 간파할 정도로 너무나 편향된 것이었다.
카드득! 콰악! 승하의 텔레포트가 마무리되기 직전,
빙하가 형태가 없는 유체처럼 쭉 늘어나더니, 파충류의 앞발로 변해 그녀를 콱 움켜쥐었다.
승하의 이동 루트마저 예상한 것인지 그녀의 팔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모양새였다.
승하는 곧바로 마력을 폭발시키며 저항하려고 했으나,
콰르르! 콰득! 쿠드득! 발치의 빙하들이 부스러지며 일어나 류 현에게 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얼음감옥을 이루더니 프레스기처럼 압착되기 시작했다.
류 현과 비교할 것도 없이,
후열인 화련이나 희란과 비교해도 월등히 몸이 튼튼하다고 할 수 없는 승하가 버티지 못할 것임은 분명했다.
마력과 함께 작용하는 압력이 그녀의 피부를 짓누르며 들어오려던 찰나,
치이이! 후르르르!
[크으으!]
하얀 장벽에 닫혀버린 그녀의 시야에 검은 불꽃이 비집고 들어왔다.
정말 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검은 불꽃이 밀고 들어오는 걸 보자 승하는 갱도를 헤맨 끝에 빛을 본 사람의 심경이 되었다.
“류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