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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3화 〉탐식마(貪食魔) (353/429)



〈 353화 〉탐식마(貪食魔)

그 순간 비아트리체의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
자신의 권능마저 살라 먹히고 피어오르는 허연 수증기는 그녀의 머릿속 상태를 대변해주는 듯 했다.
은근히 퍼뜨려 놓은 한기가, 권능의 밑바탕이 부질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가지 않아 마구잡이로 튀어나온 추론들로 엉망진창으로 변했지만.


그를 잡은 정도가 아니라 수하로 부릴  있게 되었나?부터, 그렇다면  내게는 그 수를 쓰지 않는 것이지? 까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의문을 품었나 싶은 것까지 온갖 잡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녀를 당황시키고 있는 요인은 여러 가지였으나, 가장  건 이것이었다.

‘종언의 불’.
[에레츠]에서도 자신보다 육체적으로는 약했던 ‘살바토르’가 숨기고 있었던 비장의 한 수.

뜨거움을 몰랐던 비아트리체는 그것과 마주한 그 날,
불꽃에 대한 두려움을 뇌리에 각인시키게 되었고,
동시에 용에게 이름이 묶인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게 되었다.

그녀가 불완전하게나마 휘둘렀던 권능은, ‘살바토르’의 권능인 ‘종언의 불’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랬기에 비기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신이나 다름없게 보였던 아비가 그녀 앞에서 사라진 이후 처음으로, 비아트리체는 벽을 느꼈다.
저보다 약해보이는 동족에게서.

그런데,
그 불이.
있을 수 없는 장소에, 있을 수 없는 타이밍에 나타난 것이다.
상당한 열화판이긴 하나, 비아트리체 자신의 권능을 약화시키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이상한  넘어서서 말이 안 되는 일.


자신의 신과 통하기 위한 생텀조차 짓지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그 권능을 낭비하고 있는 사도 말고는 볼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행성이다.
그렇다고 무력적으로 돌출되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품은 힘에 비해 기괴할 정도로 무의 경지가 높은 그랜드 마스터도 방금 전의 일로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봐야 단독으로는  5분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 공격력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면 모르되, 이미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았던가?
가진 건 검기술 뿐 인 인간을 접근시키지 않고 찢어죽일 방법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살바토르’가 증발한  때문에 복잡한 심경인데 굳이 마신의 사도가 걸어온 싸움에 응한   부분이 컸다.
거치적거릴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죄다 치워버리고 제대로 그 문제에 접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마음 편히 휴식이라도 취하고 싶었다.


이 기괴하고 기분 나쁜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그녀는 계속해서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태였다.
생각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해서 뭔가에 막히는  같고,
 막히는 것조차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없으며,
그것을 신경 쓰는 동안에는 신경줄을 갉아내는 것 같은 두통이 그녀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중간에 ‘살바토르’처럼 속 편하게 인간들을 찢어죽이고 주어지는 고양감에 취해 볼까 고민한 적도 있다.


뭐든 간에 마신의 사도만 치우면 선 자리에서 죄다 찢어죽이고 쉬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를 만든 후에 정보를 쥐어짜낼 수 있을 테니.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건방진 인간놈들을 이번 기회에 처리하자.
마침 그 충동에 휩싸이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인간이 없는 장소까지 와주지 않았는가?


그러한 확신들은   흔들리긴 했어도 뿌리까지 들썩이는 일은 없었다.

마신의 사도가 어떻게 얻은 것인지 알  없는 불의 정수를 내보였을 때도,
그 불의 정수에 제 권능을 섞어 본신의 방어를 뚫었을 때도.

비아트리체는 상처에 분노를 불태우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불의 정수와 권능을 뒤섞는 공격법은 마신의 사도 스스로에게도 타격을 적지 않게 주며,
 순간 무방비가 되는 것으로 볼  능숙하게 다루지도, 지속가능한 공격법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내었다. 재생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일순간이지만 공격력 하나만은 자신을 압도한 그랜드 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싸울수록 조금씩 돌아오는 운용법에 대한 기억들도 의외의 상황에 거덜 나기 직전이었던 여유를 다시 불어넣어주었다.

한기를 기반으로 전장 전체를 장악하고 나면 마신의 사도의 발을 묶고,
어떻게 장악한 것인지는 모르나 ‘천공성’의 비호 아래에서 신경을 긁어대고 있는 것들을 단숨에 치워버린다.

그러고 나면 마신의 사도를 천천히 여유롭게 말려죽일 수 있으리라.
당초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방향이긴 하나, 전투라는 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계획대로 모든 것이 흘러간다면 그건 상대가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나약하기 때문일 터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비아트리체는 확신에 차있었다.

하지만,
그건 종언의 불을 목도하기 전의 이야기.

그녀가 전투를 통해 계속해서 보완하며 쌓아온 확신과 자신감은,
열화되었긴 하나 종언의 불이라고 확신할  있는 불을 보자마자 땔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용의 멘탈을 태워버릴 정신적 불꽃의 땔감이.


[그를 노예 삼기라도 했나? 아니...그런 술식은 이곳에 있을 수가...]

단박에 저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지만, 그래서 혼란은 더했다.
그런 미개한 인간들이기에, 무슨 가정을 넣든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당장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꼬리에 꼬리를 문 망상에 가까운 추측들이 계속되진 못했다.

즈즉! 콰아아! 저도 모르게 몸을 장악하고 있던 한기에서 해방된 류 현이 분풀이 하는 것처럼 맹렬하게 달려들었으니까.
비아트리체는 코앞까지 다가온 끔찍한 열기에 강제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떨어ㅈ...]

치이익! 말을 통한 권능의 발산은 류 현에게 닿기도 전에 검은 불꽃에 살라 먹혔다.
한기에 할당했던 힘은 한기가 증발했다고 돌아오지 않았고,
술자인 비아트리체의 정신이 흔들리고 있는 판이니 구현 속도도 매우 느렸다.

그 느려진 것조차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질 정도로 빨랐지만,
탐욕스러운 검은 불꽃은  주변으로 모여든 목적 없는  덩어리를 그냥 두지 않았다.
콰아아! 용의 힘마저 먹어치운 검은 불꽃이 더욱 미쳐 날뛰었다.

결과적으로, 류 현은 비아트리체의 제지에 더욱 탄력을 받았다는 소리였다.


뻐억! 콰앙!
물빛 비늘로 이루어진 용 형태의 요새의 가슴부분에서 검은 불꽃이 피가 쏟아지는 것처럼 터져 나왔다.


용의 힘마저 삼킨 검은 불꽃은 한참은 더 뻗어나갈 기세였지만,
이전처럼 그 정점에서 비디오 테잎 되감기 버튼이 눌려진 것처럼 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비아트리체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이런 부분에 둔한 류 현마저 느낄 정도로 노골적인 제지였으나 비아트리체는 그걸 반길 여유조차 없었다.
류 현은 폭발에서 몸을 빼내지 않고, 여전히 그녀의 앞에 서 있었으니까.
검은 불꽃을 폭발시키는 순간 무방비가 된다는 그녀의 가설을 여실히 증명하는,
전신이 탄화된 모습이었지만 은근한 안광을 머금은 하얀 눈동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극뇌.”


빠지지! 콰르릉!
순간 세상이 점멸하는가 싶더니, 하늘에서 빛의 창이 내리꽂혔다.


이전의  방향 공격보다는 약했지만, 순간 본신과의 연결이 약해진 비아트리체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그것을 막아야만 했다.

[이 미친...]

방어에 전념해야한다는  알았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질만한 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레를 불러들인 류 현의 팔도  영향을 피하가지 못하고, 탄화된 덩어리들이 툭툭 떨어져내리더니 오른팔이 아예 떨어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오른팔뿐만 아니라, 그의  곳곳에서 전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들이 감지되었다.

물론 그 뿐이라면 비아트리체가 이리 경악하진 않았을 것이다.

“같이...떨어지자고...!”


류 현은 탄화된 살덩어리가 툭툭 떨어져나가는 몸으로 숄더 태클을 날렸다.
정말로 다리가 부러져나간, 온힘을 다한 태클이었다.


비아트리체와 류 현은 뒤엉킨 채로 빙하 위를 나뒹굴었다.
떨어진 높이를 생각하면 그냥 사망 정도가 아니라, 사지가 제자리에 붙어있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지만 두 괴물은 몇 바퀴 구르다가 움직임이 멈추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비아트리체만 그렇게 했고  현은 일어나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아트리체는 질린 눈으로 류 현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려고 했다.


슈슉! 순식간에 사라진 류 현의 몸이 어디로 갔는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비아트리체는 핏발 선 눈으로 천공성 아래를 노려봤다.


쿠그그! 빠지직! 꾸직! 그녀의 손 지휘를 따라 빙하가 떠오르고 압착되었다.
검은 불꽃으로 인해 손실된 피부 수복은 생각도 하지 않고, 비아트리체는 탄환을 날렸다.
저것들을 쳐내는 것이 급선무다. 그녀의 판단은 옳게 보였다.
천공성 아래에 모인 세 여자와  남자는 화련이 끌어온 류 현의 상태에 놀라서 그녀의 공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치이익!
그러나,
고통과 틈을 감내한 보람도 없이,
천공성 코앞까지 도달한 탄환은 보이지 않는 열기의 벽에 가로막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비아트리체는 그 사실에 절망하진 않았다.
어차피 급조한 탄환이며, 저 열기의 한계치를 방금 전에 가늠할 수 있었다.


저건 온전한 종언의 불이 아니다.
모든 권능을 막지도 못할 것이니,
더 크고, 단단하게 냉기를 집중시키면  일.

역설적이게도,
위기에 노출된 덕에 이성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고 그녀에게 최선의 공격루트를 계속해서 하달했다.


비아트리체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망부석처럼 서있던 본신이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역시나 연결이 심하게 약화되었다. 모든 동작이 부자연스러웠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차고 넘친다.  거대함과 무게, 단단함이 모든 것을 벌충하고도 남을 것이다.
비아트리체는 확신했다.

투수의 투구 동작의 흉내 낸 듯한 역동적인 비아트리체의 움직임을 따라서, 용의 본신이 짧은 비행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슈슉!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간을 뛰어넘어 비아트리체의 뒤로 날아온 승하의 검이,

콰각!
용의 눈을 갈라놓았다.


푸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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