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화 〉탐식마(貪食魔)
전생, 현생 통틀어 류 현은 언제나 자신을 과신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계속해서.
거의 강박에 가까운 태도는 과신으로 인한 피해를 봐서가 아니라,
홀로 대적해온 상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
류 현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이루어도, 그의 적은 비웃는 것처럼 인류의 주요 거점을 짓밟았다.
결국 마지막에 두 다리로 선 것은 그였으나 상처뿐인 승리 정도가 아니라,
전략상 패배가 언제나 그를 맞이했다.
이 또한 ‘대소환’과 괴수들이 인류를 말살하려는 침략자로 봤을 때 성립하는 얘기이긴 했지만.
강박이 생기고 난 뒤에 들어온 정보는 강박자체를 없애주진 못했다.
오히려 나중에 들어온 정보 때문에 강박이 다른 방향으로 강해진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비아트리체에게 화련이 저격당해서 사경을 헤매고,
‘용제 살바토르’에게 그것이 우연이 아니며 재발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듣고 난 뒤로 류 현은 후열을 안전에 대한 강박에 휩싸였다.
사실, 이전에도 후열에 대한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비 동작이나 캐스팅 문제로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힘든 후열은,
보통의 경우에는 피지컬 계열이 자주 맡는 전열에 비해서 내구성마저 떨어지기까지 한다.
괴수와 플레이어 간의 스펙 격차를 생각하면 이러나저러나 한 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수준급 플레이어들은 제 나름대로의 방어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괴수와 플레이어 간의 스펙 격차 때문에 모든 공격을 회피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스트라이커 중에서는 유리몸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승하마저 본인의 컨트롤 능력으로 몇 번이고 고비를 넘겼으니까.
문제는 후열은 맡고 있는 포지션상, 그 포지션에 주로 배치되는 능력상 그런 대응이 힘들다는 점이었다.
용잡이 팀은 화련의 존재 덕에 후열의 방어력이 준수한 편이긴 했으나, 상대가 그 방어력을 종잇장 취급할 수 있는 네임드 몹이었다.
그 이하는 접근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네임드 몹도 보통 괴수들처럼 인간만 보면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에게 눈이 돌아갔고,
거기에 류 현의 능력까지 더하면 후열로 눈이 돌아갈 새가 없었다.
몇 번인가 압도적인 공격력 때문에 뚫릴 뻔한 적이 있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류 현의 강박도 방어용 아티펙트를 쥐어 주는 것으로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아트리체와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화련의 저격사건 이후 류 현은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다.
존재감을 감춘 것도 아니고, 가장 뒤에 있던 화련을 핀포인트로 노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이걸 대처할 수 있을까.
‘용제 살바토르’는 거기에 대한 해답을 주었지만 류 현에게 있어서 흡족한 수준은 아니었고,
그래서 류 현은 놈의 조언 증 가장 큰 부분을 제 좋을 대로 바꾸기로 했다.
비아트리체의 공략의 열쇠가 될 살바토르의 마력 심장.
놈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카운터 술식을 새겨놓고 간 그것을 저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후열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유가 그것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팀원들을 설득할 때 거론한 해방 청뢰로 인한 체력 소모 문제나, 해방 유성우의 컨트롤 문제는 그가 정말로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들이긴 했다.
가장 큰 이유가 강박증이었을 뿐.
확정시키기 전에 여러모로 확인해보기도 했다.
백혜라에게 시험기동까지는 아니어도 시동을 넣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게 지시도 내려 보았고, 그 과정에서 이걸 자신이 흡수하면 최소 일주일간은 꼼짝없이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 뒤에도 이걸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살바토르의 예상보다 자신이 가진, 자신의 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류 현은 짚어 넘겼고, 다른 위험이 보이지 않자 더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적극적으로 취할 생각도 없었다.
내친 김에 작전일에는 제대로 쓰지 못할 거, 보험으로 뒤로 빼두자는 그의 주장은 꽤 잘 먹혔다.
그렇게 백혜라의 손에 키 아이템 중 하나가 넘어간 것이다.
개인적으로 흡족한 전개였지만 동시에,
류 현은 되도록 저것을 쓸 일이 없길 바랐다.
비아트리체가 제 본신을 끌어올리고 맞붙었을 때 체감한 방어력은 그의 결심을 흔들리게 했지만,
그 직후 확인하게 된 해방 유성우와 검은 기운의 폭발력은 그에게 다른 희망을 보여주었다.
저 위험한 걸 쓰지 않아도 놈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호를 주겠다고 얘기를 해놓긴 했지만, 류 현은 후열이 위협받기 전에는 어지간해서는 신호를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야 살바토르 놈이 남긴 말에 대한 신뢰도가 꽤 생기긴 했지만, 저건 놈이 제 기준으로 만들어 놓은 일회용 아티펙트였다.
류 현을 기준으로 맞췄음에도 그 본인이 흡수한다고 한들, 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물건.
저게 함정이라서 폭발하는 것이든, 현재 팀의 역량에 과분한 물건이라서 터지는 것이든 위험은 위험.
놈에게 주먹을 먹인 횟수보다,
복강과 심장이 파열로 잠깐 의식이 날아간 횟수가 배는 더 많아졌음에도 류 현이 신호를 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것이 패착이 되었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재생 속도가 저하되고 항마력이 두 단계 이상 약화되었다는 것,
그것이 소리 없이 전장에 내리 깔린 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놈의 눈이 후열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제야 류 현도 변화를 눈치 채었다.
한기에 대항하는 것처럼 천공성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용광로 같은 마력을.
백혜라가 신호가 오기도 전에 살바토르의 심장을 움직인 것이다.
사전 계획대로 돌아가는 레이드가 어디 있겠냐만은, 이건 위험했다.
놈은 후열을 눈 깜짝하기도 전에 주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시선을 끄는 것 자체가 모든 걸 어그러뜨릴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속으로 탓할 새도 없었다.
가뜩이나 사이사이 후열로 시선을 보내던 비아트리체가 망설임 없이 후열로 탄환을 쏘아 보낸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그의 피를 머금어서 새빨갛게 변했을 그 탄환들을.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지, 입을 열어 그 초현실적인 염동력까지 동원했다.
[떨어져.]
류 현은 몸을 날려서 그것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의 몸에 천천히 쌓인 한기는 모든 움직임을 저해시켰다.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던 블링크 트리거의 발동조차.
류 현이 괴성을 내질러 뒤늦은 경고라도 내뱉으려던 찰나,
후르르! 치이이익! 불의 장벽이 치솟으며 그것들을 증발시켜버렸다.
물리적인 탄환과 말과 함께 내쏘아지던 권능인지 뭔지하는 초능력도.
‘아니 저게 어떻게...’
류 현이 당황한 만큼 비아트리체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동안의 당황을 치명적인 실수라고 탓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살아있었나?]
딱 그 정도의 말을 뱉을 정도의 지연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그렇게 넘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후르륵! 치이이! 보고만 있어도 살이 익어버릴 것 같은 붉디붉은 불꽃들은 천공성 위로 뭉쳐지더니, 영근 과실처럼 말끔한 구를 이루었다.
두 번째 태양.
그리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위광.
‘...몸이 버틸 수 있나?’
보는 이를 경도시키는 초자연적인 광경 앞에서 류 현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품었다.
살바토르가 말하길 그녀의 권능을 약화시킬 술식을 짜 넣었으나,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고 했다.
비아트리체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니 천천히 좀 먹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힘겨루기는 아예 논외라고.
그 말인즉슨, 그 괴물 같은 놈도 제 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써야할 정도로 힘겨운 술식을 누군가가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게 류 현이 저걸 적극적으로 사용할 마음을 접은 이유기도 했다.
가뜩이나 마법과는 담을 쌓은 일자무식인데, 접촉해서 느껴봐도 답이 안 나오는 걸 무턱대고 흡수하고 썼다가 효율이 안 나오면 제 전력 깎아 먹기가 될 게 뻔했다.
잠깐 느낀 것만 봐도 저 미쳐 날뛰는 열기는 속편하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흡수할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혜라에게도 신호를 주겠다는 말과 함께,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해 놓은 것이고.
그런데 저 태양 같은 것은 뭐란 말인가.
모양새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좀 먹고 있던 한기마저 살라먹고 있지 않은가.
류 현은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류 현이 그 걱정을 본격화하기도 전에, 천공성에 떠오른 작은 태양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라앉는다고 느낀 것은 작은 태양의 움직임이 힘이 다해서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쿠우- 치이이익! 그가 받은 느낌대로 작은 태양은 아주 자연스럽게 빙하위로 스며들었다.
빙하를 녹이며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위로 녹아서 뒤섞여버린 것이다.
그 존재가 허상이 아니었다는 듯, 전장에 만연했던 한기가 수증기와 함께 증발했다. 빙하 위로 허연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전장이 된 빙하 곳곳에 다 타고 남은 장작 위에 맺힌 잔불 같은 것들이 일렁거렸다.
마치 타오르던 불꽃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은 모습.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전장에 깔린 불의 결정이 녹이는 건 비아트리체에게서 계속해서 뻗어 나오는 한기뿐이었다.
한기가 뻗어나오면 결정에서 불길이 일어나, 수증기와 함께 한기를 증발시켜버리고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잠깐 동안 빙하 위로 작은 불줄기 몇 십이 솟구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류 현은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제 발 밑에 있는 불의 결정을 내려다봤다.
‘아니, 이건 약화정도가 아니잖아. 대체 뭘 했기에...’
올려다 본 비아트리체 또한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를 노예 삼기라도 했나? 아니...그런 술식은 이곳에 있을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