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탐식마(貪食魔)
백혜라는 고요 속에서 자신을 차분하게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우습게도 그녀가 하고 있는 다른 행동들은 전부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애썼다.
없는 집중력도 쥐어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플레이어 최초로 아티펙트로 인한 폭발사고 1호가 될 판이었으니까.
치이이! 그녀의 몸 위로 허연 수증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몸 주변이 열기 때문에 일그러져보일 지경이었다.
피부 위로 듬성듬성 피어났다가 사그라지는 반점 같은 붉은 기운은 그녀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짐작케 했다.
그녀의 속은 말 그대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최고의 빙결 마법사라고 자부해도 이의를 제기할 이가 없을,
젊다 못해 어린 마법사인 백혜라는 생판 처음 다뤄보는 뜨거운 마력을 품고 끙끙 앓는 중이었다.
그녀라고 처음부터 빙결마법만 쓰고 불덩이를 던지는 다른 계열의 초급 마법을 못 써본 건 아니었지만, 그건 체외에서 술식에 따라 불을 댕기는 것이었지 마력 자체의 성질이 이렇진 않았다.
더군다나 그냥 뜨거운 마력도 아니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정련된 마력이었다.
여태 유지해온 마법관이 박살나고도 남을 정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불을 일으키기 충분한 이미 마법을 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마력.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 보다는 족쇄 같은 커다랗고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빛 구체.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었다.
네임드 몹, ‘용제 살바토르’가 스스로 남긴 마력적 심장이었던 아티펙트는 끊임없이 그런 마력을 뿜어내었다.
무한 동력도 아니고, 이미 죽은 것이니 언젠가는 멈추긴 하겠지만 백혜라에게는 무한한 것과 다름없었다.
미친 듯이 냉기를 쥐어짜서 퍼부어도 진정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제 몸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이런 커다란 힘을 억누르는 건 그녀에게 매우 낯선 일이기도 했다.
마법사이긴 하나, 그녀는 승하와 비슷한 과였으니까.
처음부터 마법적 재능을 깨우쳐서, 혹은 상대적으로 마력 방출과 마력통 재능 때문에 마법사가 된 통상 마법사들과는 좀 달랐다.
마법적 재능을 알아서 깨우친 건 맞는데,
전자의 경우에도 떨어지는 정밀도를 범위와 화력으로 채우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면,
그녀는 상대적으로 모자란 마력량과 방출 능력을 정밀도로 채워 넣었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스트라이커 중에서 따질 것도 없이, 피지컬 계열 중에서는 동급 평균에서 조금 쳐지는 스펙을 가진 승하가 기술로 다른 것들을 채워 넣고도 최정상급이 된 것처럼.
그녀 또한 가장 가까이 있는 멘토를 흉내내왔다. 그게 정답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어린 나이에 던전 솔플을 밥 먹듯이 하며 급격한 성장세를 이룰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승하가 가족처럼 여기든 말든 팀에 붙어있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렇게 성장했기에 일전에 화련이 저격당했을 때 그녀를 구해낼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사였다면 화련은 목숨을 읽었겠지.
하지만 지금,
백혜라는 여태껏 밟아온 성장루트 때문에 더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이만한 크기의 힘을 다뤄본 적이 없었다.
희란의 ‘연결’로 류 현의 마력을 마구 퍼서 써본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 역량 내에서의 일이었다.
또 희란의 ‘연결’은 상냥하다는 말이 어울리게 대상자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었다.
팀에 합류한 초반에는 밀려드는 페이스가 빨라서 좀 버겁긴 했으나, 희란이 백혜라에게 적응하고 나자 그런 것도 사라졌다.
마력도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번 걸러져서 오며, 공급되는 속도도 개개인에게 맞춰준다.
지금 이 미쳐 날뛰려는 마력덩어리랑 비교할 게 아니었다.
그냥 크기만 한 힘도 다뤄본 적이 없는 백혜라에게 있어서 큰데다가 밀도도 엄청나며,
성질마저 상극인데다가 마구 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그냥 접촉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겨내야만 했다.
이걸 다룰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으니까.
어느새 자신과 승하가 편입되어버린 팀의 대장은 이걸 문자 그대로 먹어치워서 흡수할 수 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냥 흡수 여파에만 보내게 될 정도로 너무 짧았고, 당장 그걸 흡수하는 것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받았다는 게 이유였다.
결정적으로 그는 이번 원정에서 큰 위험에 노출될 후열 보호에 더 신경 써주고 싶어 했다.
가장 전방에서 싸우는 이가 가장 위험하다는 상식 하에 모두가 그에게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류 현은 꿋꿋했다.
해방 상태의 청뢰와 유성우만 해도 다 감당하기 힘들 거라는 그의 말이 설득력이 영 없지는 않아, 이 위험한 아티펙트는 그녀에게 할당되었다.
그리고 지금, 백혜라는 고통 속에서도 류 현의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아트리체의 거체를 향해서 날아가던 류 현의 몸이 중간에 격추되었다.
추락하는 동안에도 류 현의 몸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탄환이 거의 반으로 갈라놓았다.
아마 제 허리를 부여잡지 않았다면, 상하체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놈의, 비아트리체의 공격방식이, 가진 공격력이 너무도 상정 외였다.
갑자기 자살 선언과 다름없는 소리를 하고 모의전까지 치르러 준 ‘용제 살바토르’와의 모의전이 무색할 정도로.
비아트리체의 공격방식은 점점 류 현에게 치명적이게 바뀌고 있었다.
전투를 통해서 그를 무너뜨릴 방법을 학습했다기보다는, 잊고 있었던 사용법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점점 동시에 사용하는 힘의 가짓수가 늘어나고 있으니까. 익숙해지기 위한 과정도 없었다.
‘거기다가 이 한기...조용히 밑작업을 하고 있어.’
얼음바닥에 피보다 내장조각을 더 많이 쏟아낸 류 현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백혜라는 점점 기온이 내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정확히는 플레이어의 몸뚱이에 침투할 수 있는 한기가 자연환경인양 천천히 깔리고 있음을 느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범인은 비아트리체일 것이다.
단순히 추워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류 현이 갈수록 저 탄환공격과 이상한 염동력 같은 능력에 맥을 못 추는 것도 아마 이 한기 탓일 터였다.
한기가 주변을 장악하는 것과 맞춰서 그가 재생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검은 불꽃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한기의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천공성의 보호 아래에, 이 미쳐 날뛰려는 불덩어리를 곁에 두고 있는 자신도 저 한기의 영향을 아예 피해가지 못하고 있으니까.
‘확실히 후열을 계속 보고 있어. 류 현 씨한테 아예 정신이 팔린 게 아니라.’
그의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놈은 열화판이긴 하나, 천공성을 이용한 차폐막 아래에 있는 후열을 계속해서 힐끗 거리길 반복했다.
승하가 이탈하고 나선 화련이 류 현에게 블링크 트리거를 할당하고 있지 않음에도,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양.
백혜라는 이를 악물고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는 불덩이 같은 마력을 억누름과 동시에 제어할 수 있는 만큼만 끓어오르게 했다.
몸을 보호하는데 마법으로 짜낸 냉기를 다 때려부어도 물 끓는 주전자마냥 수증기가 피어올랐지만, 이겨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정말로 자신 외에는 당장 이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이가 없으니까.
상극인 냉기로 불덩어리를 제어한다.
단순하다 못해, 당연한 명제 같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죽을 만큼 힘에 부쳤다.
화련이 손 본 천공성의 연산보조와 손 놓고 있어도 알아서 마법술식으로 마력을 부어주는 수준의 희란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이 근처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용제 살바토르’가 이 안에 술식을 짜놓고 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접근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다 완성된 술식과 그를 위한 마력 덩어리에 접근하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고도 실시간으로 내장에 화기가 미쳐 익어버린 곳이 느껴지고, 마력을 돌리는 통로가 갈라지고 있어 이후에는 뭘 할 것도 없이 꼼짝없이 침대신세를 져야겠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됐...다...!’
끊임없이 수증기만 피어 올리던 그녀의 몸 위로 이글거리는 화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가물가물 감기려던 그녀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불꽃이 튀었다.
적당히 정제한 화기를 통하게 하는 통로는 실시간으로 익어가는 중이었지만,
그녀는 엘릭서로 도핑해서 그것을 틀어막았다.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끌어올려진 기력이 그녀의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온다!’
백혜라가 아티펙트 제어에 성공함과 동시에 비아트리체 또한 이상을 느꼈다.
비아트리체는 류 현의 사지를 반쯤 뜯어놓고, 이제는 완전히 오체불만족으로 만들기 위해 날아가던 탄환들의 방향을 훽 틀었다.
후열을 향해서.
정확히는 갑자기 열기가 솟구친 천공성을 향해서!
후르르! 치이이익!
백혜라의 대응은 매우 간단했다.
천공성 바로 앞에 치솟은 불의 장벽은 탄환을 증발시켜버림과 동시에,
비아트리체의 이성도 반쯤 증발시켜버렸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살아있었나?]
잠깐의 지체.
백혜라는 그 잠깐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힘을 쥐어짜내었다. 그녀를 땔감으로 삼은 것처럼 불길이 끊임없이 치솟았다.
정말 온몸이 땔감이 된 것 같은 작열통이 그녀를 감쌌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백혜라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주먹을 거머쥐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던 불길이 천공성 첨탑 위로 모여들어 영글기 시작했다.
구심점이 생기자 열기는 그곳으로 알아서 빨려드는 것처럼 뭉쳐졌다. 백혜라의 몸에서 열기가 빨려나가는 듯했다.
무한히 계속 될 것 같던 방출과 흡수는 채 10초가 되지 않아서 끝을 고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백혜라는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뿜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인상적인 것이었다.
지금 이 싸움을 보고 있을 전 세계인들은 물론이요,
생사투 중인 비아트리체 또한!
북극의 하늘 위로 두 번째 태양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