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8화 〉탐식마(貪食魔) (348/429)



〈 348화 〉탐식마(貪食魔)

파스스!
용의 앞발을 한 번의 검격으로 터뜨려버린 순간, 승하는 비아트리체보다 더 긴 한 순간을 느끼고 있었다.
투명한 물빛을 띄는 물질로 이루어진 비아트리체의 앞발의 파편들이 굴절시키는 빛줄기들을 모두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있는 비아트리체의 얼굴을 보고 평도 남길 수 있을 정도였다.


‘왜 괴수가 저렇게 예쁘게 나온 거야? 아, 쟤도 원본이 있다고 했지.’


의도적으로 트랜스 상태에 돌입한 그녀의 시간감각 속에서 시간은 기괴하게 흘렀다.
그녀가 가진 모든 감각이 손을 뻗어 시간을 잡아당겨 늘리는 것만 같았다.

보고 따라오라는 듯 자유롭게 유영하는 검의 길을 제외한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는 그녀 자신조차.
정신만이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날뛰고 있는 검의 길 따라 내달렸다.
아니, 그보다 앞서 달리며 자신의 감이 내놓은 검의 길을 평했다.


방금 전의 올려 베기는 수십 개의 검의 길을 지웠다가  내키는 대로 휘두른 것이었으니까.


짧아, 안 닿아.
너무 느려, 꼬리가 올 거야.
너무 무거워, 검이  버틸 거야.

수 없이 많은 검의 길이 그녀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승하는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오래갈 수도 없고, 오래가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지는 아직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는 걸,
육신도, 정신도 온전히 버텨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력이 아닌 류 현에게서 힌트를 얻고, 그에게 도움을 받아서 편법으로 엿보게 된 경지니까.


이윽고,
그녀는 모든 검의 길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한 번 더,
그저 빠르게,
다른 불순물을 섞지 않고 깔끔한 내려 베기를.


스읏- 올려 베기가 시간조차 끊어내려는 것 같은 일섬이었다면,
이번 내려 베기는 나긋나긋한 산들바람이었다.

이전의 내려 베기가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 더 완벽해진 내려 베기.


나긋나긋한 동작과 달리 검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느려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연스러운 동작인 것처럼 검의 궤적을 막아서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느릿한 검격이 끝남과 동시에 승하는 트랜스 상태를 벗어났다.
머리가 핑 돌며 손발의 감각이 사라졌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눈앞의 적을 노려봤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다.
전투 중에는  치명적인 패널티이긴 하나, 감수하고도 남을 메리트가 있을뿐더러 그녀는 뒤에 있는 남자를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한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다.

푸훅! 파아악!
비아트리체가 몸을 담그고 있는 빙하가 깨진 부분에서 바닷물이  치솟으며 용의 형상을 띄었다.
용의 머리처럼 모습이 변한 그것들은 검격의 궤적 안으로 몸을 던져대었다.
방파제와는 다르게 막는 쪽에 마구 부서지고 흐트러지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영원히 나아갈  같던 검격도 계속 되는 투신에 기세를 잃어갔다.

결국에는,
카앙! 궤도까지 틀어져 인간형의 목을 치는  아니라, 놈의 본신 비늘에 기다란 칼집을 내는데 그쳤다.


“쯧...”


혀를 차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궤도수정을 해 보이는 승하의 목덜미를 확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켁...류 현?”
“어쩌자고 그걸...”
“아니 그럼  당하는  보고만 있으...으갹-”


 현은 승하가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다시 날개를 전개해 튕겨져 나오는 것처럼 몸을 뒤로 빼내었다.
비아트리체는 선뜻 쫓지 못하고 그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일순간의 방심으로 입은 타격이 상당하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쉽사리 쫓긴 어려울 터였다.


바닥에 내려앉기까지 10여초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현은 안도의 한 숨을 속으로 삼켰다.
놈은 분노에 미쳐서 달라붙지 않고, 저를 방어할 방벽을 바닷물로 세웠다.
이번만큼은 놈의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라서 다행이었다.

안도감은  짜증에 가까운 뭔가로 변했고,


그것을 땔감 삼아 승하에게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냈다.


그 사이에 핼쑥해진 낯빛의 승하는 슬쩍 그를 못 본  하려고 했지만,
외적, 내적 방비가 전부 풀어진 그녀가 저항할  있을 리가 없었다.


“본인이 그거 쓰고 나면 무방비가 된다고 해놓고 잊으셨습니까?”
“아, 아니...난 그게...”

잠깐이지만 그녀의 기준에서 일반인 바로 위까지 굴러 떨어진 승하는 류 현의 기세에 눌려 식은땀만 흘렸다.
더 했다가는 정말 탈이 날거 같아 류 현은 다시금 한 숨과 함께 화도 삼켜야만 했다.

“전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
“...나도 알아.”

이전의 대 네임드 몹 전들을 복기하곤 하는  현은,
진형이 다른 요소보다는 자신의 부상 때문에 동요한 팀원들로 인해서 붕괴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모르진 않았고,
재발 방지 차원에서 과거 얘기를 꺼내놓았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정리한 후 길지 않았던 사이사이 휴식기 동안.

스스로도 인간, 아니 생명체가 맞나 싶을 정도의 치명상들을 입은 상태로 도망치거나,
그대로 네임드 몹의 멱을 딴 이야기를.
이 경우는 그 때 입은 부상정도가 주력이었다. 반도 풀지 못하고 그만 둬야했지만.


이야기를 그녀들이 온종일 안색이  좋거나 식사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져서,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입에 올릴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였으니 막연한 이미지라도 남아있으리라고 여겼다.
복강과 흉부의 내장이 거의 다 타버린 상태에서 심장을 스스로 주물럭거리면서 움직였다는 이야기 하나만 대강 기억하고 있어도, 정말 죽고 싶어도 죽기 쉽지 않은 몸이라는 걸 파악하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지금 보면 아무런 효과도 없고 기분 나쁜 기억만 늘려준  같지만.

“저놈 공격 속도에 승하 씨도 반응 못하시잖습니까.”

승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트랜스 상태에 돌입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건 자신의 온전한 전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바로 무방비가 돼서 의미도 없을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저도 제대로 대응은 안 됩니다. 아까  탄환은 이걸 써도 대응될지 모르겠고요.”

 현은 아직도 피부가 벗겨져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에서 타오르고 있는 검은 불꽃을 가리켰다.
이건 방어용으로 쓰더라도 방어용이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몸이  먹히고 있는 판이니까.


“저놈 저거 어글 관리도 안 됩니다. 그 상태에서 공격이 먹힌다는  다행이긴 하지만, 그  무방비 상태를 제가 평소처럼 커버해드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빨도  들어가는 검은 검기로 놈이  현에게 집중 포화를 쏟아 부을 때 어그로 끌어보겠다고 용 쓴 거긴 했다.
방어를 깎아내기 전까지는  이상의 힘은 쓰면 안 되니까.


어그로 문제도 문제지만, 북극 근처에서 뉴욕의 이상을 느끼고 달려온 놈이 트랜스 이후 무방비 상태를 눈치  챌 리가 없으니.
눈치  채더라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단박에 목을 못 치면 승하 본인이 뼈도  남기고 죽을 테니까.

답답하고 짜증나도 그런 문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참아온 것인데, 순간적으로 방비가 풀린 채로 노출된 류 현을 보고 눈이 돌아버렸다.

원했던 효과는 확실하긴 했지만, 놈의 반응을 보니 어그로가 제대로 박혀버렸다.
다시 놈에게 접근해서 트랜스 모드에 들어갈 틈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용틀임하는 바닷물 소용돌이 속에서 조용하게 살의를 발하고 있는 놈의 눈이 소름끼칠 지경이다.


“...미안.”
“미안할 일도 아니고, 데미지 박히는  확인했으니 나쁘기만  건 아니죠. 계획대로 갑시다. 블링크 트리거 스택 몇 남으셨습니까?”
“아까 다섯 썼으니까...넷?”
“열 번 쌓일 때까지는 접근하지 말고 후열로 가는 탄환이 있나 경계만 해주십쇼. 그게 후열로 날아가면 진짜 답도 없으니까.”
“알았어.  근데 혜라한테...”
“아까 화련 씨한테도 한 말인데, 절대 안 됩니다. 잘 못하면 도망도  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거 제가 당장 흡수할 수도 없고요. 그리고 지금 준비중 일겁니다.”
“끄응...알았어. 신호는?”
“제가 안 해도 알아서 오실 거면서. 긴가민가하면 제가 부르겠습니다.”
“나 이제 날파리 짓도 못 해줘. 알지?”


승하는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는  손을 들어보였다.
무방비 상태에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좋지 못한 건 변함없었다.
트랜스 모드 자체가 류 현이 하던 짓을 모방해서 찾은 편법에서 시작한 것이니 몸이 성할 수가 없었다.
두 번이 한계. 세 번째 부터는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다.

류 현이 화내는 걸 그대로 받아낸 건 이 부분이 꽤 컸다.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이 나선 것 자체를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여유 좀 생겼으니 안심하시죠.”

턱짓으로 비아트리체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자 승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슈슉! 그대로 천공성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 후열로 날아갔다.

혼자가 된 류 현은 비아트리체를 올려다봤다.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오를 것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둘을 노려보던 비아트리체는 이제 대놓고 짜증을 표출하고 있었다.

제 본신을 무처럼 써는 것도 아니고, 일검에 터뜨려버린 존재가 화련이 복구시킨 천공성의 차폐 능력 아래로 가 버렸으니 신경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겠지.
그렇다고 저쪽에 집중하자니, 자신의 방어력을 연달아 두 번이나 뚫은 괴물이 정면에 있다.


류 현은 비아트리체의 짜증을 이해했고,
그래서 바로 뛰어올랐다.

바로 검은 불꽃을 충분히 불러일으킬 정도로 회복되진 않았지만, 그걸 알 도리가 없는 비아트리체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촤악! 츄륵! 쿠그긍! 바닷물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용들이 대가리를 내던지는 것처럼 들이밀어 왔다.


척 봐도 일전의 탄환 공격이나, 발판을 파내서 가두는 공격보다는 담긴 힘의 차이가 꽤 나보였다. 좋은 쪽으로.


‘그래, 네가  배 많든 뭐든 무한한 건 아니니 바닥이 있을 수밖에 없지.’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소모가 없지 않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자 삐거덕거리는 몸에 활력이 도는 듯 했다.

류 현은 사납게 미소 지으며 검은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이번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었다.
오랜만에 탐욕을 허락받은 검은 것들이 오른 팔을 기점으로 삼아, 폭발하는 것처럼 부풀어 올라 망치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양 측이 맞붙기 직전,
이상을 감지한 비아트리체가 힘을 거둬들이려고 했으나 류 현의 팔이 그보다 빠르게 망치를 내려쳤다.

콰르릉! 파창! 얼음과 물로 이루어진 폭풍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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