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화 〉탐식마(貪食魔)
‘염병할, 힘만 다 되찾은 건가?’
류 현이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내뱉은 욕지거리와는 반대로,
투명한 물빛으로 이루어진 비아트리체의 몸은 생명체와 조각상 중간의 무언가로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용제 살바토르’가 생명체로서 보일 수 있는 강건함을 극한으로 보여줬다면, ‘해왕 비아트리체’는 그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연약해보이지 않았다.
극한의 조형미는 강건함마저 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바다에 잠겨있는 배 아랫부분은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믿음 아닌 믿음마저 느껴지게 했다.
완벽하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이 의미 없어 보이는 모습.
그 완벽함은 류 현에게는 감탄보다는 짜증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지만.
완벽한 외견이 놈이 되찾은 힘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라도 흠을 찾으려던 류 현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맺었다.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건가? 아니면 살바토르 놈과 종류가 달라서 저런 건가?’
류 현의 시선이 고정된 그곳에는,
그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조형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비아트리체가, 인간형인 비아트리체가 존재했다.
꼿꼿이 선 상체 부분만 해도 어지간한 빌딩 높이 인 터라,
갑옷을 두르고 있다기보단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었지만,
안쪽의 작은 비아트리체의 시선을 따라서 용의 시선이 돌아가는 것을 봐선 본체는 작은 쪽이 분명해 보였다.
‘최악은...아닌 거 같기도 한데. 본신이랑 완벽하게 융합까진 못 이뤘지만 그 전 단계쯤은 된다 이건가.’
류 현은 붙어선 승하의 어깨를 툭 쳐서 뒤로 물러나게 했다.
마법 하나에 2인이 휘말리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게 이번 공략의 원칙이었다.
류 현은 화련이 저격당했던 일을 흘러보낼 의향이 전혀 없었다.
“다시 제가 먼저 갑니다. 방어력이 생각이상이면 그걸 터뜨릴 테니까 제 신호 놓치지 않게 조심하십쇼.”
“야, 너 그거 까지 터뜨리면 몸이 못 버티...”
류 현은 듣지 않고 그대로 뛰어올랐다.
거대해진 비아트리체는 그가 아래턱 바로 아래까지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
쒹! 류 현이 허리를 뒤틀기 전에 바다에 잠긴 꼬리로 그를 쳐냈다.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날려간 그를 따라서 혈선이 그어졌다, 사라졌다. 왼쪽 어깨가 덜렁거릴 정도로 깊은 절상도 혈선이 사라지는 것만큼 빠르게 아물었다.
류 현은 핏물은 사라졌지만, 남은 피비린내를 침과 함께 탁 뱉어냈다. 맞는 순간 집중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왼쪽 어깨를 잃을 뻔한 것에 대한 짜증도 같이.
‘...저 꼬리 조지기 전에는 승하는 근처도 못 오게 해야겠군.’
그는 뒤쪽을 향해서 손을 내젓고는 검은 기운을 뭉클뭉클 피워 올렸다.
비아트리체가 저렇게 변한 것을 따라하려는 것 마냥 덩치를 불리고, 또 불렸다.
머릿속에서 몇 개의 핀이 날아가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다.
제 아무리 ‘강림’의 경지가 진일보 했다지만, 이 정도의 힘을 뽑아내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1단계에 묶어두고 있는 절제력에 이상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류 현은 거기에 다시 잠들려던 청뢰를 두들겨 깨웠다.
빠지직! 그에게 성을 내는 것처럼 청로의 기운이 날뛰었다.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날개가 그의 등에 자연스럽게 드리웠다.
다음 순간 류 현은 쏜살이 되었다.
푸앙! 콰르릉! 뻐어엉! 언제까지고 오연하게 서 있을 것 같던 비아트리체의 머리가 폭음과 함께 훽 젖혀졌다.
소리의 꼬리를 쫓아 올려다보면,
어느새 놈의 턱 아래에 시커먼 번개 구름 같은 것이 들러붙어 있었다.
폭발하는 검은 기운과 청뢰의 폭풍 속에서 류 현은 놈의 모가지를 쥐어뜯으려고 했지만,
비늘을 뚫고 끌어 모은 힘의 반절이 소모됐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이 미친 듯이 단단한 갑옷 속에 파묻혀 있는 인간형인 비아트리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어떤 네임드 몹이든 일단 그가 달라붙어서 게걸스럽게 제 생명을 탐하면, 반쯤 정신 줄을 놓고 떼어놓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게 생명체가 보여야할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런데 놈의 반응은 거기서 벗어난 걸 넘어, 방금 전까지의 혼란마저 정리한 것처럼 보였다.
비아트리체는 그렇다는 것을 사양치 않고 보여줬다.
[떨어져.]
꾸웅! 뇌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압력이 그를 짓눌러왔다. 류 현은 비늘에 박아 넣은 손가락이 빠지는 게 아니라, 찢어질 것 같은 압력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놈의 공격을 분석했다.
‘프레셔? 아니야...이건 누르는 게 아니라, 끌어당겨지는 거다. 눈인가? 아니면 물?’
비아트리체가 힘을 더 되찾지 못해도 물과 얼음이 있는 곳에서는 부분적으로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살바토르의 말이 떠올랐다.
바다에서 놈을 끌어낼 방법이 없는 입장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긴 했지만,
지금 당해보니 방법을 찾았어야 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승하나 그녀보다 더 몸이 약한 후열이 이거에 노출되면 도무지 답이 없다.
순식간에 도출된 결론에 류 현은 자신을 묶어두고 있던 절제력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그의 눈이 불이라도 붙는 것처럼 하얗게 백열했다. 그 빛이 안구 밖으로 뿜어질 것처럼 강렬하게.
카드드득! 우직! 뻐어억! 쒹!
다시금 비아트리체의 머리가 뒤로 돌아갔지만, 류 현도 이번에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떨어져라, 무례한 것아.]
주먹을 날림과 동시에 날아온 꼬리가 그를 빙하 깊숙이 쳐 박아 놓았다.
놈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쿠와악! 콰드득! 카라락!
인간형의 비아트리체가 가리키는 대로 얼음덩어리가 그가 쳐 박힌 구덩이로 날아들더니,
지층 아래로 처박아버릴 것처럼 수축하면서 아래로 계속 파고 들어갔다.
그 단순한 동작에 깃든 어마 무시한 마력의 파동에 승하가 바쁘게 검은 검기를 내쏘아대었으나,
퓽퓽! 놈의 시선을 돌리기는커녕, 일순간 물처럼 변화한 놈의 비늘에 먹혀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너를 고향으로 돌아갈 제물로 써주지.]
쿠직! 꾸직! 꾸드득! 류 현을 가둔 얼음덩어리를 중심으로 점점 가라앉는 얼음구덩이,
그 주변에서 새어나오는 심상찮은 마력에 후열들이 달려오려고 했지만 승하가 가까스로 손을 뻗어 그것을 말렸다.
‘류 현도 그 이상한 초능력 같은 거에 반응도 못했어.’
자신이라 한들 다를 것은 없을 터다.
힘의 크기마저 저 상태의 류 현이 떨쳐내지 못할 정도이니, 후열은 까딱하면 즉사일 터.
‘방어 벗겨내기 전에는 쓰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어디 공략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것이던가.
힐끗하고 비아트리체가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걸 다시금 확인한 승하는, 최대한 평온하게 심호흡을 하려고 했다.
“스흐읍...”
그때,
꾸웅! 쿠직! 콰직! 퍼어엉! 얼음구덩이에서 굉음이 터지며 시커먼 것이 확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섬뜩하지만, 반가운 기운도 같이.
좌반신 대부분이 벗은 몸으로 변한 류 현은 살벌한 기운과 함께 얼음구덩이를 박차 올랐다.
반면,
비아트리체는 이전과 별 다를 것 없는 공격에 심드렁하게 대응했다.
[떨어져라.]
쉭! 말로 일으킨 권능에 류 현이 움찔하면 꼬리를 휘둘러 바닥에 쳐 박아버린다.
방금 전까지 펑펑 써대던,
꽤 위협적인 화력을 보여주던 우레의 정수는 다한 것인지 흔적조차 없다.
온 몸에 두르고 있는 마신의 은총을 받은 것 같은 마력은 왜인지 몰라도, 그 정체성을 죄다 내다버린 것 같은 맹탕.
경계할 이유가 없다.
방심도 뭣도 아니다.
“세 번 당하겠냐.”
씹어 뱉듯이 내뱉은 류 현이 다음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렸을 때도 별로 변한 건 없었다.
스스로 자세와 호흡을 무너뜨렸으니,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을 터.
눈밭에 한 바퀴 구른 류 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뛰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줄행랑을 치든 말든 해야 할 일은 같았으니.
등을 보이면 오히려 치기에는 좋았다.
기다린 꼬리를 먹이를 덮치려는 뱀처럼 내쏘아,
류 현의 허리를 끊어놓으려는 순간,
슈슉! 그의 모습이 약올리는 것처럼 100미터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났을 때도 짜증 이상의 뭔가는 없었다.
그러나,
“충전 완료.”
뛰다말고 멈춰선 류 현의 손아귀에서 이미 힘이 다 해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짙푸른 번개가 들끓고 있는 것을 보고나자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한 것이 아니었나? 정말 이 낙후된 곳에서 온전한 정수를 뽑아내었단 말인가?
그녀가 다음 생각을 진행하기 직전,
“극뢰.”
콰르릉! 빠지직! 짜자작!
하늘과,
구덩이,
류 현의 손아귀에서 터져 나온 세 줄기의 푸른 번개가 비아트리체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지는 못했다. 방어에만 전념하는 그녀를 뚫을 수 있는 자는 지금은 사라진 ‘살바토르’ 뿐이니까.
그럼에도 그녀도 마냥 무시하기 힘든 엄청난 전력 때문에 몸을 굳히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냥 몸으로 받는다고 치명상 같은 걸 입을 리는 없겠지만, 괜한 틈을 내주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그 방어하는 와중에도 번개가 약해지자마자 방출을 그만두고 달려드는 류 현의 모습은 훤히 볼 수 있었다.
건방지고 무모한 인간놈을 다시 땅바닥에 쳐 박고 다져주려던 비아트리체는,
류 현이 제 본신 위에 올라타고 나서야 이상을 감지했다.
너무 뜨거웠다.
아무리 초월자의 은총을 받았다고 한들 인간이,
이 낙후된 세계의 인간이 낼 수 없는 정도의 화력이 비늘 위로 느껴졌다.
‘살바토르’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사결을 나누었을 때나 느껴봤던 끔찍한 열기.
[떨어ㅈ...]
비아트리체가 ‘권능’을 발해 그를 떨쳐내려던 순간,
쿠아아앙!
지상에 내려앉은 태양 같은 폭발이 둘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