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화 〉탐식마(貪食魔)
“승하 씨, 얘기 했던 대로 왼쪽 눈에 한 발.”
키아악! 대답보다 빠르게 튀어나간 검은 검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카아앙! 비아트리체의 왼쪽 눈 부근에 명중했으나, 눈에 닿지는 못하고 굴절되어 지평선을 향해 날아갔다.
류 현은 놈이 젖혀진 고개를 되돌릴 때, 물빛 비늘 같은 것이 비쳤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살바토르, 놈의 말대로군. 이름을 되찾은 여파인지 뭔지 때문에 애매한 공격은 그냥 몸으로 받고 보네. 반응속도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그 때 일을 생각하면 그건 아니겠지.’
지금 떠올려도 몸서리 쳐지는,
화련의 피습 사건이 떠오르자 류 현은 곧바로 회색 오러를 일행에게 덮어주었다.
자신이나 승하가 좀 더 간을 볼 수도 있지만, 이번만큼은 그 틈 아님 틈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벌써?”
“그냥으로는 이빨도 안 먹히는 거 보셨잖습니까. 놈의 공격 범위를 생각하면 간 보는 것도 꽤 큰 리스큽니다.”
“흐응...”
승하가 뒤쪽의 화련을 대놓고 돌아봤지만 류 현은 못 본채 했다.
“집중합시다. 저 말곤 스치기만 해도 최소 전투이탈입니다.”
“알아, 알아. 뭐 때문에 그 이상한 훈련을 했는데. 근데, 저거 생각보다 반응이 얌전하다?”
정말로 그랬다.
다짜고짜 화련을 빈사상태로 만든 첫 대면이 무색하게, 놈은 얻어맞은 왼쪽 눈 부근을 손으로 짚은 채 고개를 갸웃하는 중이었다.
[죽은 게 아니고 숨어있었던 건가? 어떻게?]
놈의 의문에 대답해줄 정보는 충분했지만, 그는 전혀 그럴 의지가 없었다.
후욱!
‘강림’!
류 현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가진 에이스 카드를 빼들었다.
거대한 충동에 몸을 내맡기지도,
검은 기운 운용에 전력을 다 하지도 않은,
스스로 세분화한 3단계중 가장 낮은 1단계 수준이었으나 벌써부터 일전에 입은 내상이 꿈틀거리는 듯 했다.
‘살바토르’와 대화 때문에 입었던 내상이.
일주일.
아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어도 다 나을 수가 없는 시간동안 쉬기는커녕, 열심히 힘을 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잘한 내상 따윈 아무래도 좋아.’
그보단 움찔거리는 놈의 반응에 더 집중했다.
‘저 놈도 뭔가 알긴 아는 거 같은데...중간중간 보이는 반응 외에는 뭘 캐내긴 무리겠지.’
그리 생각하며 슬쩍 발을 굴렀다.
후욱! 카앙! 순식간에 200미터 가량의 거리를 좁힌 류 현의 주먹이 놈의 안면에 직격했으나, 들려온 건 파육음이나 살을 때리는 소리가 아닌 금속성 소음이었다.
타격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소리였으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놈의 안면에 비치는 물빛 비늘에 들러붙은 검은 불꽃같은 안개를 살폈다.
곧 실망하게 되었지만.
‘내구성인지 항마력인지...때려선 안 먹힌다 이거로군.’
붙었던 건 맞는건가 싶을 정도로 별 영향이 없는 모습.
그의 발이 땅을 디뎠을 때, 놈은 그대로 굴러 류 현이 좁힌 거리만큼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비틀비틀 일어서는 모양새가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놈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을 터다.
류 현은 쉬지 않고 검은 기운을 끌어올렸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뒤따르듯이 튀어나온 검은 안개들이 넘실거리며, 그를 거인처럼 보이게 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기로 했다.
류 현은 체인에 꿰어 목에 걸고 있던 반지를 움켜쥐었다. 청뢰를.
움켜쥔 손 안으로 검은 기운이 좀 집중되는 듯 싶더니,
치지직! 빠직! 주먹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 윤곽에 푸른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해방된 청뢰의 기운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미쳐 날뛰었다.
류 현이 다시금 뛰어올랐다.
[우뢰의 정수...? 죽은 신의 시체라도 얻...]
콰직!
들어갔다. 그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류 현은 내뻗은 주먹을 펴 놈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상체를 당겼다. 놈의 상체도 같이 딸려 들어왔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수족보다 더 자연스럽게 그의 의지를 따르는 검은 기운이 추진체가 되었기에 보일 수 있는 움직임.
뻐억! 그대로 앞차기까지 먹은 놈의 몸이 바람에 채인 연처럼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놈을 그대로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흐읍...”
과시하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서 내뿜어지던 검은 안개가 뭉쳐진다.
비행흔처럼 뒤로 늘어진 그것 위로 틀을 잡아주는 것처럼, 검은 기운과 푸른 번개가 뒤덮는다.
허술하게나마 망치 같은 형상이 된 그것을,
슉! 날려가던 놈에게 돌아보기도 전에 던지듯이 꽂아 넣었다.
콰르릉! 꾸릉! 귀가 멀 것만 같은 굉음과 함께 마른 눈과 얼음조각이 시야를 뒤덮었다.
류 현은 멈춰선 채로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었다. 내상이 있는 채로 해방된 청뢰를 다루니, 아무리 ‘강림’을 조절하고 있어도 별 수가 없었다.
‘1단계서도 타격을 줄 수 있으니 나쁘진 않긴 한데...왜 이렇게 맹탕이지?’
방어력은 끔찍한 수준이긴 했지만, 반응이 이상했다.
반격은 고사하고, 회피조차 제대로 하려는 의도가 느껴지질 않았다.
‘살바토르’. 약화된 상태에서도 장담할 수 없었던 놈이 저보다 강하다고 한 대상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류 현은 ‘살바토르’에게 들은 것에서 평가를 최소 0.5단계 가량 더 높여놓은 상태였다. 그 이상은 한 번 쳐보고 나서 올리면 올렸지 내릴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 여겼었다.
지성이 있는 인간수준의 소형괴수라는 점이 그런 평가를 내리게 만들었다.
덩치로 밀어붙이는 놈들이 쉽다는 건 아니지만, 팀의 전력이 그런 식으로 개발되어 있었으니까.
인간 사이즈의 뭔가를 상대하는데 도가 튼 승하나, 전생보다 더 강해진 자신의 존재를 감안해도 그랬다.
하얀 분진이 가라앉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의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비아트리체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사파이어로 짠 것 같은 드레스는 상체부분이 거의 다 날아간 상태였고, 피부가 상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위를 덮고 있는 물빛 비늘은 멀쩡한 부분보다 깨진 부분이 더 커보였다.
얼굴에도 언뜻 비치던 물빛 비늘이 사라지지 않고 군데군데 깨져있는 모습은, 처량해 보기까지 했다.
어떻게 봐도 큰 타격을 입은 모습.
‘뭐지?’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류 현의 발은 빙하를 박찼다. 다시금 그의 오른팔을 손잡이 삼아, 검은 것들과 푸른 번개가 뭉쳐졌다.
애초에 별로 떨어져있지도 않았기에 순식간에 사정거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구심과 함께 놈을 짓뭉개기 위해서 있는 힘껏 내려쳤으나,
푸쉬쉬- 치지직! 파캉!
놈의 가느다란 팔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물빛 팔에 가로막혔다. 당황한 류 현이 팔을 비틀어 그것을 빼내려고 했으나, 놈이 힘을 주자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담겨있는 힘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
하지만 류 현의 놀람은 다른 쪽이었다.
‘본신을 끌어낼 정도라고?’
콰긱! 류 현의 의문에 대꾸해주는 것처럼 놀고 있던 다른 팔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용의 팔이 그를 띄워 올렸다.
밑에서 살의를 활활 불태우며 용의 팔을 늘어뜨리고 있는 놈을 보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류 현은 비아트리체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놈의 거대한 두 손이 파리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맞부딪히려는 순간,
지직- 슈슉! 류 현의 몸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화련의 옆으로 떨어졌다.
“아니 저거 대체 뭐래요? 진짜 깜짝 놀랐네. 팔 튀어나오는데 딜레이도 없었다고요.”
“저라고 알겠습니까. 우리가 준비하는 동안 저쪽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진짜, 편하게 가질 못하네.”
“세팅은 끝내셨습니까?”
“이제 거의 다 끝났어요. 다행히 좌표 밀리는 것 정도는 보정이 되네요. 예상보다 더 수월해요. 그러니까 마스터도 끌어당겼죠.”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비아트리체는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살의를 불태우던 모습이 무색하게,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거 왜 저래? 아까도 그렇고 뭔가 좀 이상한데?”
“글쎄요, 저도 들었던 거랑 달라서 충분히 당황스러운지라.”
“흠...그래서 얼마나 단단해?”
“승하 씨 기준으로는...3단계? 근데 저 팔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최소 1.5단계는 더 단단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더럽게 단단하네 진짜. 나도 뭐 아티펙트 구해봐야 하나?”
“승하 씨 성에 차려면 전에 말한 그게 나타나야 할 걸요.”
“젠장, 그거 진짜 실존하긴 하는 거야? 대체 어느 놈이 꿍쳐두고 있는 거지...”
[어떻게...? 너희가...성을...?]
“허, 마스터도 그냥은 못 보는 걸 보네?”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라, 일행들 위에 떠있는 천공성을 본 모양이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내용은 별 쓸모가 없었지만, 놈이 화련이 흉내 낸 차폐 상태를 꿰뚫어 보는 건 분명해 보였다.
‘쯧...’
황당해 하는 화련만큼이나 류 현도 속이 쓰렸다. 척 봐도 상태가 좋지 못해 보여, 전력을 다 드러내지 않고 돌려 깎기 식으로 안전하게 말려죽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멘탈적 문제는 몰라도 인지능력이나 사고능력은 그대로라는 게 드러난 것이다.
사투에서 멘탈적 문제가 사소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덩치가 비슷할 때나 치명적으로 작용할 일.
더욱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걸 이용하기도 힘들었다. 방금 전만 해도 모든 의욕이 날아간 그런 상태가 아니라, 적을 쳐 죽일 의욕은 충분해 보였으니까.
‘...그래, 요행은 살바토르 선까지만 해도 넘치긴 했지.’
다시금 기운을 가다듬으며 나서려 할 때, 화련이 불쑥 치고 나왔다.
“마스터, 블링크 트리거(blink trigger) 세팅 끝났어요.”
손을 탁탁 터는 그녀의 손끝마다 거미줄 같은 파란 마력의 실이 일렁거렸다. 제 눈에는 당장 보이진 않지만, 천공성과 연결되었던 선일 것이다.
격려의 말을 건네려던 류 현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거대한 존재감의 변화를 느꼈다.
“고생하셨...”
이전에 느낀 바가 있는,
두 번 다시 느끼지 않고 싶어서 편집증적으로 준비하게 만든 공격마법의 전조.
류 현은 반사적으로 화련의 앞을 가로막고, 마력을 돋웠다.
하지만,
파캉! 쩌엉! 그런 류 현의 의지가 무색하게, 마법은 저번과는 다르게 공간을 뛰어넘어 화련의 복부를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