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화 〉탐식마(貪食魔)
일주일 전.
류 현은 방에서 혼자 제 오른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란하다고 자꾸 술병을 들고 엉겨 붙는 승하도 억지로 쫓아버린 그는, 조용함을 얻었지만 작은 두통거리를 얻었다.
정확히는 그 두통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한 것이지만.
‘기동해 보긴 해야 하는데...’
두통의 원인은 천공성이었다.
‘용제 살바토르’와의 거래에 응하는 대가로 얻게 된 또 다른 대가.
거래주체의 목숨이 날아가고, 이쪽은 아무런 담보도 잡히지 않은 것을 거래라고 불러도 될지 의문이긴 했지만.
‘한 번 증명되긴 했지만...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용제 살바토르’, 놈은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선언이 무색하게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에서도 꽤 많은 정보를 내놓았다.
마치 이 상태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죽어가는 상태에서 전투종료를 선언하고 이런 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자신이 남긴 천공성을 당장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도 그 조언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는 그녀가 들이닥치자마자 괴멸당하겠지. 길게 가진 못하겠지만, 그녀의 눈을 피할 수 있게 해주마.]
[일주일이다. 그녀가 위화감을 느끼고 기억을 일부나마 되찾는다면 더 짧아질 수 있겠지만,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겠지. 찾을 가능성도 지극히 낮을뿐더러, 그리 된다면 상처 없는 승리가 아니라, 승리 그 자체도 장담할 수 없게 될 테니. 그런 걸 고민할 여유는 없겠지.]
[이후, 성은 동면 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상처 입고, 세뇌 당해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나와 동급의 동족의 눈을 속이는 일이다.]
놈이 쓰지 않고 숨겨두었던 기능인 차폐능력.
단순히 보이지 않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 입장에서는 아예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정도의 강력한 능력이었다.
놈이 제 입으로 자신보다 강하다고 자평한 비아트리체를 속여 넘길 수 있을 만큼.
이 기능의 존재를 듣게 된 류 현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놈이 세뇌에서 벗어나면서 되찾은 기억에 이 차폐기능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에 하나 애매하게 기억을 되찾거나 세뇌 상태에서도 쓸 수 있는 능력이였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 덕에 그 꼴은 면하게 되긴 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지닌 능력이 아니고, 성에 딸린 능력이긴 했지만 그런 능력을 보유한 놈이 대놓고 저보다 강하다고 한 비아트리체의 무력이 나쁜 의미로 가늠이 되었으니까.
[...중계기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다만. 뭐에 쓰려는 지 알 수가 없군. 자체 연산능력은 일주일 후에는 멈출 거다. 딱 그 정도가 한계 일거다. 그녀 다음으로 언제 다음 ‘네임드 몹’이 나타날지는 모르겠다만, 기존의 간격을 생각하면 차폐기능은 다시 쓰기 어렵겠지. 애초에 다음 ‘네임드 몹’에 이것이 먹힐 지도 알 수 없는 문제고. 이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다.]
네임드 몹이 다음 네임드 몹을 운운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일행들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 덕에 류 현은 아주 편하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공간 격리는 바로 거둬지진 않을 거다. 일족의 하인 중에서도 급이 낮긴 하나, 이 세계에서는 제물로는 차고 넘치는 녀석들을 바쳤으니 너희가 몸을 피할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버틸 것이다. 그녀도 이 격리가 유지되는 동안은 쉽사리 날아오지 못할 테지. 거리가 가까웠다면 모를까,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더군.]
[아마 그녀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내 존재가 별 소란 없이 사라졌다는 것, 하인들을 누가 봐도 제물로 쓸 목적으로 끌어 모으고 사라졌다는 점, 그 직전에 공간격리를 펼쳤다는 점도 그녀의 발목을 붙잡겠지. 이 세계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네가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다면 말할 것도 없지. 찾을 수 없는 연관점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될 터. 그녀는 그 세뇌를 받고도 인간들을 찾아다니진 않았으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너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겠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라도 그것이 치명적인 틈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테니. 너와 같이 생명체의 적 다운 권능을 물려받은 존재가 있다면 더더욱.]
중간중간 저런 소리를 해대서 따져 묻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목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피를 꾸역꾸역 쏟아내며 죽어가는 놈의 모습은 그런 말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듯 했기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모의전이라고 하긴 했다만, 전투에 한해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영지로 만드는 능력은 소실되었을 거라 생각한다만은, 내가 천공성을 가지고 이곳에 오게 된 것처럼 ‘난이도 조절’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니.]
[만에 하나 그녀가 그 능력을 보유했을 경우에도 그 영역이 그리 넓지 않을 테니, 만에 하나 그 경우라면 그 부분을 노려야할 것이다.]
[두 번째는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내 세뇌가 깨진 것에 네가 끌어다 쓴 권능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그래, 처음으로 직접 교전했던 그 때 말이다. 내가 ‘대소환’과 너의 존재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 이유기도 하지.]
[그녀가 그것으로 세뇌가 깨지고 나와 같은 판단을 한다면 너에겐 더할 나위 없는 호재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녀의 원본은 지금도 이름을 되찾은 여파를 수습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아마 제대로 돌아갈 상황이 아니지.]
[원본과의 제대로 된 소통이 없다면 기억을 되찾는 건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애매하게 기억만 찾은 채로 미쳐 날뛰면 너는 몰라도 다른 인간들은 버티지 못할 터.]
[그러니 되도록 두 번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낫다. 애초에 불가피한 상황에 처하지 말라고 이 모든 것들을 주는 것이니.]
평생 적이라는 생각 이외에는 해 본 적 없는 존재에게 전투에 대한 조언을 듣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대충 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전투를 지양하는 것이 좋다.
언뜻 보면 나쁠 것 없는 조언 같지만, 플레이어와 네임드 몹간의 스펙차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스펙 차를 감안하면 한 번 뺄 걸 가정하고 싸운 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했지만, 류 현의 방식이 그러했다.
하는 말로 봐선 ‘강림’ 혹은 검은 안개 쪽이 문제인 듯 했으나, 안다고 한들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게 없이는 전투자체가 성립되질 않았으니까.
‘무조건 그놈 말을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서도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생각보다 이번에 얻은 게 많아. 천공성만 해도...아직 완전히 믿긴 힘들지만 무사히 그 자리를 뜬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지.’
삼일 전 뉴욕을 뜰 때부터 전부 놈의 말처럼 되었다.
불의 장벽은 그와 일행들이 뉴욕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뉴욕까지 달려온 비아트리체는 폐허가 된 뉴욕을 조금 뒤적이는 듯하다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더니 떠나갔다.
그동안 류 현은 틈틈이 모니터링에 참가하면서도,
팀원들을 설득하고, 다독이고 훈련 매뉴얼을 짰다.
급조된 훈련이고 시간이 촉박한 탓에 만족스러운 수준까지는 끌어올리긴 무리겠지만,
‘살바토르’로부터 얻은 것들이 상당하니 그것으로 커버가 될 듯 했다.
지금은 그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인 천공성의 사용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성능은 진짜가 분명한데...상황이 녹록치가 않으니.’
신뢰도 부분은 대부분 충족되긴 했지만, 그건 차폐능력 부분이었다.
류 현이 눈여겨 본 중계기 역할은 시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평범한 새 아티펙트를 얻어도 시험가동은 필수인데, 생전 처음 보는 성 규모의 아티펙트라 운용 경험도 없는데, 시험가동도 해 볼 수가 없다니.
‘이 상태로도 돌아갈 거 같긴 한데...그게 아니면 일주일도 날아가는 거니...’
부족하게나마 번 재정비 시간이었기에, 그것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꼭 필요한 전력은 아니지만 쓸 수 있다면 꽤 큰 전력이 될 텐데. 놈과의 모의전 양상대로 흘러간다면 상당히 클 거다.’
‘살바토르’는 희란과 화련의 능력을 대강만 파악하고 있었기에 의아해 했지만, 류 현은 거의 확신했다.
“끄응...별 수 없나.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겨야겠지.”
급조한 대 드래곤 훈련 매뉴얼대로 구를 준비를 하고 있을 화련에게는 미안했지만,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합리화 했다.
***
-현재 시각, 17시 08분. 타겟의 좌표를 전송 합니다.-
“확인했습니다. 이제 출발 카운트 들어가겠습니다. 앞으로 120초 후 출발.”
무전을 마친 류 현은 떨떠름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눈앞의 노인을 바라봤다.
제럴드 던컨.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국방부장관이 사령부에서 무전을 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굳이 직접 배웅하겠다며 따라나섰다.
류 현은 기꺼움보다는 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놈을 죽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가 아니라, 여의치 않으면 그냥 도망쳐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살바토르’가 두 번째는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긴 했지만,
준비기간 동안 자신감을 충전한 류 현은 다시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두 번째도 마다치 않을 생각이었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이 말 밖에 해줄 게 없군요.”
“그간의 도움과 약속해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악수를 나눈 후 돌아선 류 현은 동료들의 면면을 재확인 했다.
저마다 주요 장비들을 들어 보이며 이상 없음을 어필해왔다.
화련을 볼 때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긴 했지만, 그는 애써 그 불길한 기억을 떨쳐냈다.
녀석을 잡아야 그런 일이 다시없을 것이다.
그래야 이 불안도 완전히 떨쳐낼 수 있겠지.
“화련 씨, 시작해주시겠습니까?”
화련이 손을 하늘로 내뻗자 아무 것도 없던 하늘에 천공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류 현이 그것을 받듯이 오른 손바닥에 마력을 집중시키자, 천공성의 몇 안 남은 첨탑 꼭대기에서 푸른 마력이 솟구쳐 온 하늘로 퍼져나갔다.
그것을 본 화련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볼 것도 없이 대성공인 듯 했다.
류 현도 그에 마주 미소 지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훈련 외 시간에 화련과 밤이 새도록 머리를 맞대서 얻은 성과.
오늘 승리한다면 이것이 일등공신이 될 것이다. 류 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걸로 퇴로 확보 걱정은 덜었군.’
“현재 시각 17시 10분. 용잡이 팀, 전송된 좌표로 이동합니다. 모두들, 행운을 빕니다.”
그 말을 끝으로,
슈슉! 용잡이 팀을 비롯한 원정대는 리치몬드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슈슉! 거의 같은 순간 북극에 한 무리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소환’ 이후 무인의 땅이 되어버린 그곳에 발을 들인 그들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의 타겟의 존재를 느꼈다.
반대로 그녀도 그들의 존재를 느꼈다.
[마신의 사도...?]
류 현은 그 잠깐 사이에 존재감이 더 강렬해진 듯한 적의 끔찍함에 속으로 치를 떨면서 겉으로는 매우 태연하게 말했다.
“승하 씨, 얘기 했던 대로 왼쪽 눈에 한 발.”
키아악! 대답보다 빠르게 검은 검기가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