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0화 〉탐식마(貪食魔) (340/429)



〈 340화 〉탐식마(貪食魔)

“쿠흡...뭐야...멀쩡..하잖아?”


그리 말하는 승하는 평온함을 가장했지만, 겉보기부터가 평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평소와 다르게 왼팔에 검을 쥐고 있었고, 그 왼팔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전체가 무슨 조립장난감처럼 이음새 같은 금이 죽죽 그어져있었다. 상처 사이로는 새빨간 피가 아니라, 시커먼 피가 맺혀있어서  기괴해 보였다.
입과 눈가에도 시커먼  같은 것이 흘러내리는 것이 척 봐도 무리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녀는 ‘가방’안에서 주둥이가 긴 호리병같은 것을 꺼내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류 현은 이따금씩 흘러내리는 내용물을 보고 그것이 엘릭서 C-03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걸 마셔? 결국 내상이  크게 터지니 신중히 마시라고 했었는데.’


뜨악하는 류 현의 반응과는 다르게 승하는 겉보기로는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입과 눈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피는 멈추었고, 팔에 죽죽 그였던 금같은 상처도 아물었다.


하지만 류 현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엘릭서 C-03은 세아가 복용 중인 엘릭서 A타입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A타입이 치료제 역할에 충실한 물건이라면 C-03을 위시한 C타입은 전투용 도핑제 성격이 강했다.


장기 요양 말고는 확정적인 치료법이 없다시피  내상을 잠깐이나마 아물게 해주고,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은 도핑효과마저 주는 물건.

원래 엘릭서를 정제하다가 나온 부산물이었지만, 그 유용성을 눈여겨본 강찬이 단독 스폰서가 된  현에게 도움이  거라고 여겨 아예 특화 개발 중인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내상이 동반되는 장시간 전투와 퇴각 시 유용할 거라고 생각해 류 현도 추가 생산을 요청해서 비축해둔 터였다.
회색 오러버프를 얻고 나서 전투 유지력이 비약적으로 늘어서, 미국에 온 뒤로는 칼같이 판단할 상황이 안 나와서 쟁여두기만 한 물건.

‘젠장, 이걸로 저거 여파가 감당될지 모르겠네.’


후욱!  현은 우선 승하에게 회색오러 부터 덮어주었다. 그녀의 안색이   나아진 것 같았지만, 전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제 옆으로 날아와서 딱 붙어있는 화련과 희란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둘을 포함해서, 앞에서 경계하고 있는 웨인과 백혜라에게도 회색 오러를 둘러주었다.
불의 장벽 안쪽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저 하늘의 괴현상 때문인지 보통 때처럼 수발이 자유롭지가 않았다.

모두에게 버프를 주고 나서야 류 현은 입을 열었다.

“승하 씨, 대체 뭘...”
“뭘 하긴 뭘 해. 콜록, 너만  안에 갇혀있으니까 일단 뚫었지.”
‘끙, 오래 끌긴 했지.’

놈이 내뱉는 소리 하나하나가 너무 충격적이라서 잊고 있었다.
작전 돌입 전에 패퇴해서 도망치는 걸 기정사실인양 겁을 주고 혼자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문제 생기면 팀을 이끌어야할 사람이...’


저지른 게 있으니, 뭐라고 불평할 순 없었지만.


“...저거 왜 안 덤비고 저러고 있는 거에요? 마스터 무슨 일 있었던 거죠?”
“아.”

화련이 속삭이듯이 묻는 말에 류 현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놓고 천기누설 중이었던, ‘용제 살바토르’를 올려다봤다.
놈은 별 불편한 기색 없이, 자신과 대화하던 자세 그대로 몸을 반쯤 눕힌 채 일행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위로 펼쳐진, 시커멓게 타들어간 하늘이 갈라지고 있는 모습은 놈의 태도와 상관없이 일행들에게 위압감을 선사했지만, 류 현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하늘 모습과 승하가  원인이 되는  불의 장벽을 뚫었다는 사실, 놈의 갑작스러운 침묵.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듯이 반복해서 언급하던 태도.

“...대화는 이걸로 끝인 건가?”

놈은 고개를 까딱여 긍정을 표했다.

‘진짜 저  말대로 아슬아슬 했었나 보군.’


우습게도 옆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대는 동료들이 있으니, 갑자기 욱여넣어진 정보들로 들끓던 머릿속이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거래는...정말인가 보군. 그걸 거래라고 불러야 될지는 모르겠다만은.’

그렇지 않다면 일행이 가장 취약했던 돌입 직후를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는 신뢰가 생기는 듯 했다.
괴수에게 신뢰라는 걸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기에 확신이 생기려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좋아. 그 거래 받지.  말대로 그럴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좋다. 아부하는 것 같다만, 나는 가망성이 없는 일에는 걸지 않으니 좀  자신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건 되어봐야 아는 일이고...이 자리에서 해야 하나?”
[그래. 세뇌가 풀렸다곤 하나, 이 장벽을 거두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 네 동료 그랜드 마스터가 뚫은  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고 봐야겠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소모가.]
“이해했다. 모두들 이리로  와주시겠습니까? 희란 씨가 ‘연결’을 하기 편하도록. 예.”
“마, 마스터 지금 이게 무슨 상황...? 세뇌라뇨?”
“당장은 시간이 없으니 일이 정리되고 나면 제가 다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하니. 희란 씨?”
“네에, 네엣. 어? 왜 이게...”
“평소처럼 하시면  안 될 겁니다. 예전에 처음 이었을 때처럼 하셔야...”
“아, 알겠어요. 아, 됐다.”
“승하 씨는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상이 부담도시면 그냥 빠지셔도 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빠지긴 무슨. 저거 잡으려는  아냐?”
“맞긴 한데, 무리를 감내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 못한 방향으로 잘 풀려서.”
“됐어.”


툭 내뱉듯이 대꾸한 승하는 목을 좌우로 꺾어서 뚝뚝 소리를 내더니 검을 쥔 손을 바꿨다.
엘릭서C 로 도핑하고도 감각이 회복이 안 된 것인지, 검을 쥐고 있던 왼손을 오른 손으로 하나하나 펴서 바꿔 쥐었다.


그 모습을 보고 류 현은 뜯어말리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고집하곤.’

당장 그녀를 단시간에 체념시킬 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번 싸움이 이번 네임드 턴의 끝이 아니라는 것도 꽤 크게 작용했다.
놈은 어디까지나 모의전 상대니까. 비아트리체 전의.


류 현은 한 숨을 삼키곤 담담하게 머릿속의 말을 읊었다.

“놈의 정면은 평소처럼 제가 맡습니다. 승하 씨와 웨인 씨는 실수로라도 저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거리를 벌리는 것에 신경 써 주십쇼. 제가 신호하기 전에는 진입하지 마시고, 후열을 지키고 계셔야 합니다. 제가 신호하기 전에는 진입하시면 안 됩니다.”


제각기 다른 대꾸가 돌아오자 류 현은 옆에 붙어있던 둘을 떼어내고, 앞으로 나섰다.
놈의 앞발 범위 안까지 도달한 그는 많이 사그라지어 있던 ‘강림’의 기운을 다시 끌어올렸다.


그저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무리가 안 된 건 아닌지 약간 가슴이 따끔하는 내상의 전조가 느껴졌다.
왠지 조금 손해 본  같은 기분에  현은 자신을 달래는 것처럼 되뇄다.

‘놈의 말 전부가 거짓말이더라도 사체만 취해도 남는 장사다. 놈이 제 말처럼 협조해준다면 이 정도 내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느 새 거구를 일으킨 놈을 올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시작하지.”
[들어오라.]

아래를 향해 축 늘어져있던 놈의 앞발이 움켜지며, 그 위로 덧바르는 것처럼 하얀 불꽃이 확 타오르기 시작했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지만, 류 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뛰어올랐다.
있는 힘껏 뒤튼 허리와 당겨진 오른쪽 어깨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용제 또한 피하지 않았다.

꾸웅! 불기둥이 치솟았다.

***

[살바토르...?]


비아트리체는 북극해를 향해 떠내려가는 중이었다. 50평 남짓한 얼음덩어리에 몸을 맡긴 채로 그린란드 해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어떤 방해도 없었다.
원래도 미국도 추적의 애를 먹던 존재가 작정하고 추적을 피하니, 인접 국가들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전자기기를 먹통으로 만드는  능력 때문에 아주 흔적이 남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정보로 추적을 행할 수 있는 건 미국뿐이었다.

그 미국은 이미 화룡(가칭)과 비아트리체의 위력을 보고 난 뒤, 추적도 조심 또 조심하고 있는 터라 방해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평온한 항해 중이었던 비아트리체의 고개가 향하는 방향은 뉴욕이었다.
자신의 생사대적이었던, 지금은 임시 동맹이 된 동족 살바토르가 새로운 둥지를 튼 것으로 보이는 땅.

[사라...졌어?]

자신에게 정보전달 겸, 신경 쓰이는 마신의 사도에게 초대장 보내는 등 시답잖은 짓을 하던 존재의 존재감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세계에서 증발해버린 것처럼.

비아트리체는 뉴욕으로 향한 시선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은 거리를 뛰어넘어 뉴욕 한복판에 닿았다.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하늘 끝에 닿을 것처럼 치솟은 거대한 불의 장벽이었다.


[공간 격리? 어째서?]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다.
원래의 세계에서도 그는 어지간한...


[음? 어지간한?]

부자연스럽게 끊어진 생각의 끈을 붙잡으려던 비아트리체의 몸이 갑자기 굳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녀의  중에 유일하게 눈꺼풀과 눈만이 미친 듯이 떨이고 이리저리 굴러갔다.

이윽고 그것이 멈추었을 때, 비아트리체는 다시 자연스럽게 뉴욕을 주시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찾던 끊어진 생각의 끈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성을 가동시킬 방법을 찾은 건가?]
[...아니야, 혼자서는 가동이 불가능해. 그렇다면 시험기동? 그조차 위험이 없진 않을 텐데?]
[나에게 비밀로 하기 위해서? 아니야,  세계에는 비슷한 눈가림 거리도 없어.]

자문에 자문을 거듭해 봐도 만족스러운 답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눈에 힘을 더 했다. 그래봐야 공간 격리를 꿰뚫어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만큼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보는 수밖에 없나.]


인간의 도시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 이상한 충동이 다시 끓어오를 게  하니까.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심겨진 건, 그로 인해서 의미 없는 살상을 벌인 후 광경을 보게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구역질이 날만큼 끔찍했다.

자신의 동족은 그리 생각하지만은 않은 듯 했지만.
비아트리체가 얼음덩어리에서 내려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때였다.

[모이고 있어?]

뉴욕까지 확장시켜놓은 감각에 작은 마력 덩어리들의 움직임이 걸렸다.
살바토르가 성과 함께 같이 끌고 온 일족의 하인들.
자신에게는 어떻게 해도 해를 끼칠  없는 존재였지만,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상당한 타격을 입은 살바토르 입장에서는 마냥 쓸모없다고  수 없을 전력이었다.
인간들을 박멸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전력.


그리고 제물로도 차고 넘치는 것들이었다. 이 세계 기준으로는 대체할 것도 없을 터다.
그 마신의 사도의 배 안에 있는 걸 꺼내지 않는 이상에는.


[누구를 치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텔레포트를 준비하던 손이 뚝 멈췄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살바토르가 노선을 변경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만 했다.

온전치 못한 상태서 펼치는 텔레포트를 감지한 살바토르가 모아놓은 제물들로 공격을 가한다면?
텔레포트 과정이든 직후든 꽤 큰 타격을 각오해야할 터였다.


놈의 성정 상 제 말을 쉽게 바꾸진 않겠지만, 지금 이 상황자체가 비정상적인 상황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는.

그래서 비아트리체는 얼음덩어리를 움직이는 식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조바심이 날만큼 느릿했지만, 존재감을 숨긴 채 몰래 상륙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3시간 후 뉴욕 해안에 도달한 비아트리체는 더  의문을 안게 되었다.


[사라졌어...?]

그녀가 해안선 부근에 도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의 장벽이 사라졌다.
분명 그 안에 있었을 살바토르와 그의 성도 함께.

도시 곳곳에 남은 불의 흔적과 핏자국들만이 그것들이 이곳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불기둥이 치솟았던 자리는 아예 거대한 구멍이 지하로 뚫려있어, 무슨 일이 있었음을 증언했다.


[어떻게?]


그녀의 물음이 공동을 공허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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