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탐식마(貪食魔)
놈이 내뱉은 뒤엣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잔잔한 호수에 돌이 던져진 정도가 아니라, 호수전체가 들끓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복제?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설마 칼리프 그 여자가?’
전생, 현생동안 그가 나름대로 모아온 ‘대소환’에 대한 정보들이 엉망으로 뒤엉키며 온갖 추측이 쏟아졌다.
류 현 스스로도 현 시점에서 이런 추측이 무의미하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쉽사리 멈출 수도 없었다.
강제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그의 생을 관통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세아를 죽게 만들고, 자신의 첫 번째 삶도 끝장내고, 두 번째 삶마저 지배하고 있는 일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
아니, 거의 유일하게 핵심을 꿰뚫는 정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에게 유효한 정보를 넘겨준 칼리프 드 오르시아마저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소리가 대부분이었고 정보의 범위 자체가 달랐으니까.
문제는 정보를 내뱉은 상대.
핵무기를 협박 소재로 쓸 수 있는 놈이 다른 정보를 무기로 수작질을 걸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있을까?
더욱이 류 현은 놈이 무슨 소리를 하든 검증이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해봐야 핵으로 협박하는 놈의 말을...”
[걱정할 것 없다. 의심 많은 네가 납득할만한 증거도 보여줄 생각이니.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우선이다.]
‘무슨 속셈이지?’
그 때,
그그그극! 굉음과 함께 발밑이 흔들렸다. 움찔하고 놈에 대한 경계를 확 끌어올렸던 류 현은, 그 끌어올린 감각이 잡아낸 또다른 이상을 느끼고는 경악했다.
‘하늘이...저주? 아니면 환영마법? 아니야...그런 게 아니다.’
하늘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이 뒤집힌 것 같은 이상현상은 전생에서 수도 없이 저주를 뒤집어쓰고, 독 때문에 사경을 헤매면서 지겹게 봐왔지만, 이건 그 어떤 상황과도 달랐다.
신경계가 헤집어 지면서 보게 되는 이상현상과 달리, 타들어가면서 뒤틀리고 있는 하늘은 완전 무장이라고 해도 좋을 류 현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마치,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용사]니, [사서]니 할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몸이 안팎으로 짓눌리는 느낌. 육체뿐만이 아니라, 존재자체에 작용하는 듯한 괴상한 감각이 류 현을 짓눌러왔다.
‘이게 대체 뭔...’
놈의 말대로 내놓은 정보가 뭔가가 있단 말인가?
아니면 놈이 이런 현상을 일으킬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말일까?
어느 쪽이든 유쾌한 기분이 아닐 건 분명해보였다.
[호오, 느끼고 있는 건가? 기묘하군. 이렇게 닫힌 세계에서 눈과 귀가 막힌 상태로 ‘그녀’의 존재를 아는 것도 놀라운 일 일진데. 생텀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도가 권능 대부분을 물려받고도 무사하다니.]
“...”
놈의 앞발가락 중 하나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건 너희의 세계가 닫혀있다는 증거다. 어지간히도 제한이 심했던 모양이로군. 불완전하긴 하나 이 몸의 힘을 대부분 쏟아 부어서 공간격리를 했거늘, 이 정도 반응이라니. 흠, 증거로는 저걸로도 충분해 보인다만은.]
“...네가 일으킨 환영마법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는데 뭘 근거로?”
[그랬다면 그거대로 근거가 되지 않는가. 너도 느끼고 있을 텐데, 저런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괴물이 굳이 네게 거짓말을 해서 볼 이득이 있을 거라고 보나?]
괴수 입에서 괴물이라는 말을 듣자니 묘한 기분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류 현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놈의 말대로 그런 능력이 있는 놈이 하는 거짓말이든 아니든 그에게 있어서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뭐 믿지 않겠다면 할 수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말을 하고 갈 수밖에. 별 쓸모없는 정보라도 말이지.]
“...대체 왜?”
[그걸 다 설명하면 이 작은 행성이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복제체인 나야 상관없다만, 너는 다르지 않은가. 아직 행성 밖에서 버텨낼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도 못할 터.]
장담을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행성이 버티지 못한다니, 가라앉았던 의심이 다시 들끓어 오르는 듯 했지만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것도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닌 듯 했다.
시커멓게 타들어가며 뒤틀려가고 있는 그 모습은 어디에서 들어본 지옥보다 더 지옥 같았으니까.
[어차피 너에게도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믿을 이유가 필요한 거라면 이유를 듣게 되더라도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나 또한 큰 기대를 걸고 하는 짓은 아니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놈은 다시 고개를 내려 입가를 찢으며 웃었다. 이번에는 류 현 또한 그것이 웃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훼방 놓는 것뿐이다. 나 또한 확실한 정보는 없다시피 하니,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뿐. 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냥 인간들을 말살했겠지. 이 충동이 이끄는 대로.]
“그 세뇌라는 건 대체 뭐지?”
[말 그대로 세뇌다.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 인간들을 잡아 죽이라는 충동질이 이 머릿속에 자리 잡혀있었지. 너도 이전에 이미 한 번 들었을 텐데? 비아트리체와 내가 대화한 걸 듣지 않았나.]
네가 도청한 것을 알고 있다. 류 현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동요를 드러내진 않았다.
놈도 별로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다.
[복제체라는 걸 깨닫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지.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뇌 자체는 강력하지만 동시에 그 강력함 때문에 생긴 구멍이 있더군. 나를 제외하면 알아챈 존재도 없는 듯하나, 내게 뚫렸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존재한 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를 제하더라도 이 세계의 인간들을 다 잡아 죽일 목적이라면 이건 너무 과한 수준이지.]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를 다 잡아 죽이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라도 있다는 소린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너희가 괴수라고 부르는 것들이 가진 무조건적인 적의는 너희 인간들을 말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질 않아. 그것들이 가진 장점 대부분이 사라지니. 오히려 너희에게 득이라고 해야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괴수 희생자 본인이나 유족들이 들으면 어처구니없어 하겠지만.
괴수가 가진 인간에 대한 살의는 너무 강한 탓에, 그 살의 때문에 목적 성취가 방해 받을 지경이다.
그나마 퍼플 던전 이하에서 등장하는 괴수 중 영향이 덜한 편인 오우거나 겁 많은 리치마저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 목숨을 파먹는 자살특공을 벌이기도 한다.
만약 놈들이 온전히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간을 향한 살의가 사라진다면?
아마 플레이어 사망률은 수치화하는 게 의미가 없을 지경이 될 것이다. 다른 전문가의 가설이나 통계 같은 걸 끌어올 것도 없이 류 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의 말은 류 현이 은연중에 혹시 하면서도 동시에 모른 채 하고 있던 생각 중 하나였으니.
괴수의 광적인 공격성은 인류 입장에서는 마냥 재앙인 것은 아니며, 던전의 유예 시간마냥 인류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
놈들이 인간을 죽이는 데 그렇게 미쳐있기 때문에 인류가 버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그이기에 가능한 생각이기도 했다.
홀로 동아시아 전선을 지탱하며, 네임드 몹마저 단독으로 찢어 죽였던 그였기에.
그마저 전생에 세아가 악룡 때문에 죽고 나서, 기억 속에서도 지워버렸던 것.
알고 있어도 딱히 그가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당장 인류를 멸종시켜버릴 수 있는 괴물을 눈앞에 두고, 저놈이 왜 손해 보는 행동원리를 버리지 못하나 고민하는 건 쓸데없는 낭비니.
[나 또한 내가 겪은 것과 너희 인간들이 단편적으로 모아둔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할 뿐 이다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군. 너희가 ‘대소환’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의 설계와는 달리 문제 꽤 많이 생긴 것이다. 외부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는 하나, 내가 세뇌에서 빠져나온 것부터가 세뇌 자체는 강력하지만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
“시스템 설계? 누가?”
물으면서 류 현은 칼리프를 떠올렸다. 신의 존재에 관심도 없던 그조차 초월적인 존재의 실존을 의심치 못하게 만든 존재.
‘대소환’이 누군가의 의도로 일어난 일이라면, 그를 신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해도 될 터.
[글쎄, 나라한들 초월자들의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너희가 ‘대소환’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너희를 위한 시스템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이 정도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로군.]
“우리를 위해서 라고? 이 대학살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류 현의 눈동자에 다시금 적의가 진득하게 차올랐다.
워낙 당혹스러운 상황의 연속이라 경계를 풀어버리고 말았지만, 눈앞의 괴물은 미동부를 정지시켜버리고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놈이었으니까.
[내 존재를 보고도 모르겠나?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지언정, 나를 상대로 저 약해빠진 인간들을 지킬 수는 없을 텐데. 내가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어중간한 지성만 남은 채로 계속해서 너와 싸웠더라도 그 핵이라는 건 이 대륙을 끝장냈겠지. 아닌가?]
“.....”
부정하기 힘들었다. 놈이 끌고 온 화룡무리만 해도 전부 저지하는 게 불가능했는데, 놈이 동시에 움직인다면 놈이 정보전을 벌이든 말든 미전역이 전장이 되었을 터.
그리고 그 급박한 상황에서는 핵무기가 근처에 있다고 장소를 옮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놈을 공략하는 것 자체가 막히진 않겠지만, 말 그대로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지는 꼴이 될 수도 있음을 그 또한 알았다.
[짧은 기간 동안 살핀 것만 봐도 이 세계는 너무 취약하더군. 그 핵만 봐도 너희는 가진 문명에 비해서 외계(外界)에 대한 대비가 너무 없어. 이 행성의 환경을 생각해보면 이상할 건 없긴 하지만, ‘대소환’ 이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이상할 정도지.]
“...그 생텀인지 뭔지 얘기인 건가?”
[아니, 그건 너에 관한 이야기다만...지금 보니 네게는 그리 필요한 정보는 아닌 듯 하군. 무엇보다 대가가 비싸서 힘들어.]
[중요한 건 이 세계가 이상할 정도로 닫혀있었다는 거다. 마나의 존재를 모르는 문명의 존재는 이상할 것이야 없지만, 그런 문명이 지배하는 행성이 여태 침략 없이 유지되었다는 건 그냥 낙후되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의미.]
[너희의 이 작은 행성은 보호받고 있었던 거다. 격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치고는 외부침략에 대한 방비가 확고했으니. 거기다 ‘대소환’의 존재를 감안하면 다른 해석은 그저 고집을 부리는 것이 되겠지.]
“...너는 ‘대소환’이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할 이유가 없겠지. 납득이 안 갈만도 하다만, 그런 감정문제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하나 묻지. 너희들의 시간으로 7년 전쯤에 본 드래곤이 등장했다면 막을 수 있었겠나?]
류 현은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