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화 〉탐식마(貪食魔)
[이곳에서도 인간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나 보군. 너 정도의 존재가 초대장을 보고도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신의 사도여, 다시 말하도록 하지. 나는 너와 싸울 의향이 없다.]
놈의 목소리에 멈칫한 것은 평소의 그라면 허용치 않았을 틈이었다.
괴수가 인간의 말을 지껄이든 말든 상관없다. 괴수에게 줄 것은 주먹과 죽음뿐이다.
여태껏 류 현을 지탱해온 원칙이었다.
전생에서는 인간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아니라, 피아식별만이 들어간 원칙이었지만.
그조차 괴수를 더 잘 잡아 죽이기 위한 일이었으니, 괴수에게는 그 어떤 변동도 해당사항이 없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강림’상태라면, ‘강림’이 이전 같았다면 놈이 뭐라고 지껄이든 일단 턱주가리를 갈기고 봤을 것이다.
‘강림’상태야 말로 그가 마음속에 세우고 있는 그 원칙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상태였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초월적인 충동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상태로 싸우면서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류 현이 멈칫한 2초가 채 안 되는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더 괴수를 잘 잡아 죽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인한 것이었다.
끊임없는 수련과 발전을 통해 ‘강림’을 발동해도 이성이 날아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나온 틈.
류 현은 그 사실에 스스로 경악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날려가는 것처럼 몸을 뒤로 빼내었다.
순식간에 양자간의 거리가 이십미터 가량 벌어졌다.
비행능력이 있는 용종괴수를 상대로는 자충수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그가 몸을 날리면서 우려한 일은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놈은 류 현을 맞이한 모습 그대로였다.
도무지 전투태세라고 볼 수는 없는, 포갠 앞발 위에 턱을 괸 모습 그대로 그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자신이 지껄인 말대로 싸울 의도가 없다는 양.
[초대장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닐 텐데. 분명 그것을 열어본 자와 접촉을 한 것을 관측하였거늘.]
거기에,
혼잣말이었지만 놈이 지껄이는 말에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놈이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했으니까.
현존 인류 중 놈이 부리는 마법을 해석할 수 있는 건 그의 누나 류세아 뿐이니.
[표정을 보니 내 추측이 맞았나보군. 놀라운 일이야. 마신의 사도가 된 자에게 친족이 남아있을 수가 있다니. 생텀조차 없는 닫힌 곳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가?]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끼어있었다.
서로 찢어 죽여야 하는 대상이 지껄이는 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봐야 손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결국,
당초의 결심과 다르게 놈에게 대꾸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아닌 자신의 멘탈을 위해서.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는 여기서...”
[아니면 너의 XXXX XXXX...음? 이 정도도 막아놓은 건가? 이곳에 걸린 XX XXX...안 되겠군.]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아닌 노이즈에 류 현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놈이 세아 얘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할 일인데, 칼리프 그 여자가 보여주었던 그 이상한 현상까지 똑같이 재현하다니?
그가 느낀 동요는 몸 위로 맹렬하게 휘돌고 있는 검은 것의 형태가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놈이 몸을 일으켰을 때 류 현이 바로 반응하지 못한 것은.
화룡의, 파충류와 새의 것을 합친 듯한 안쪽으로 움켜쥐는 것 말고 뭘 할 수가 있을까 싶은 앞발가락이 딱하고 튕겨졌다.
따악! 화르르!
소리와 함께 솟구친 불의 장벽은 하늘 끝까지 닿을 것 마냥 힘차게 치솟았다.
류 현의 대응은 매우 간단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불의 벽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어떤 괴수도 그냥 무시할 수 없는 파쇄권이 그가 다루는 모든 힘이 뒤섞여 터져나왔다.
퍼엉! 후르르!
하지만 불의 벽은 뚫리지 않았다. 일순간 형태가 허물어질 것처럼 크게 뒤틀렸다가 다시 원형을 되찾았다.
류 현을 놀라게 만드는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안 뜨거워?’
전혀 뜨겁지 않았다. 몸을 회색 오러와 검은 안개로 감싸고 ‘강림’을 발동시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투 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열어둔 감각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불의 벽을 후려칠 때 나간 마력 말고는 다른 소모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류 현이 내지른 파쇄권의 위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너라 해도 힘으로 그것을 잡아 찢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반쪽짜리지만 힘으로 공간격리를 잡아 찢을 수 있다면 이런 곳에 눈과 귀가 막힌 채 갇혀있지도 않겠지. 밖에 있는 무녀 중 하나가 곁에 있다면 모를까.]
놈이 5키로미터 거리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동료를 언급하자 류 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지만, 그는 곧 그 기세를 거둬들여야만 했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결이...끊어졌어?’
수 천 키로미터를 떨어져 있든, 한 쪽이 던전에 들어가든 굳건히 그의 팀을 지탱해주던 희란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집중해본 결과 라인이 막힌 것이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자신의 마력 원조가 없이는 팀의 화력은 급감할 테고, 무엇보다 ‘연결’이 막혔다는 사실 자체가 팀원들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었다.
좋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골 때리는 놈이었군. 팔을 꺼냈을 때 무리를 해서라도 치명상을 입혔어야 했어.’
의도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든, 아니든 간에 이런 능력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큰 위협요소.
거기에 놈의 발언으로 볼 때, 용잡이 팀의 전력 구성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듯 했다.
전투가 장기화 된다면? 놈이 용잡이 팀이 돌아가는 방식을 눈치 못 챌 가능성에 거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마음 편하자고 한 짓에 팀원들이 죽어나갈 수도 있다.
그리고 희란을 딱 집어서 공략하진 못하더라도 공간격리인지 뭔지를 이용하면 그에 준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 터.
류 현의 머릿속에서 도주라는 선택지가 천천히 작아져갔다.
‘잡아야 해. 핵이 문제가 아니라, 도망가서 비아트릭스인지 뭔지랑 정보 공유를 하면 답이 없어진다.’
그런 류 현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놈은 여유작작한 태도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뭐가 떠올렸다는 듯이 입가를 찢으며 웃었다.
류 현이 보기에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무언가였지만.
[그렇지, 내가 그걸 깜빡했군.]
따악! 재차 터져 나온 소리에 류 현의 경계태세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변화는 놈의 몸 옆쪽에 나타났다.
불로 테두리 장식을 한 것 같은 창에는 그가 잘 아는 이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승하와 희란, 백혜라, 화련과 웨인 크로이츠.
류 현이 싸우다시피 해서 겨우 뒤에 대기시킨 이들.
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로 불의 벽에 공격을 날렸다가 서로 뭐라고 말을 나누기를 반복했다.
대화 내용이 듣지 않아도 들리는 듯 했다.
특히 방방 뛰고 있는 화련은 얼굴이 안 보여도 표정이 눈에 선했다.
류 현이 당황에서 빠져나와 적개심을 불태우기 직전에 놈의 말이 끼어들어왔다.
[네 동료...라고 하는 게 맞겠지? 네 동료들은 보다시피 아무문제 없다.]
“......”
[아직도 믿지 못하는 눈치로군. 하긴, 네 입장에서는 갇힌 꼴이니. 허나 어쩔 수 없군. 나 또한 좋아서 이렇게 무리한 공간격리를 펼친 게 아니니. 이 행성, 아니 세계는 제한이 너무 많아서 대화가 진행이 안 될 지경이니 양해 바라마.]
놈은 그리 말하고는 일으켰던 거체를 다시 편히 눕혔다.
편해진 몸뚱이만큼 차분히 가라앉은 기세는 전투의 가능성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류 현의 능력을 한 번 본 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
류 현은 그런 놈의 행동에 혼란을 느꼈다.
놈의 행동은 괴수의 행동원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가 해온 일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으니까.
괴수가 대화를 청하고, 무방비한 상태를 내보인다?
그것도 자신에게 접근을 허용하면 어떻게 될지 뻔히 다 본 놈이?
류 현이 스스로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입을 연 것은 그래서였다.
스스로도 무엇에서 가능성을 봤는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는 이것이 기회라고 느꼈다. 사냥꾼의 감이 처음으로 그에게 사냥이 아닌, 질문을 유도했다.
“너는...뭐지? 괴수가 아닌 건가? 칼리프 그 여자 같은 그런 존재인건가?”
[...칼리프?]
놈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자칫 공격태세로 보일만한 살벌한 모습이었지만, 류 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거리라면 놈이 날아올라도 닿을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지만, 놈의 반응에서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지? 아니, 네가 말하는 게 그녀가 맞긴 한 건가?]
“네가 아는 그녀가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맞다면.”
[...믿기 힘들군. 이렇게 닫힌, 외떨어진 세계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오래 전에 사라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보고나서 바로 사라졌어도 5년은커녕 3년도 안 됐을 텐데.’
입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의문을 류 현은 억눌렀다.
어쩌다보니 응하게 되긴 했지만, 괴수에게 정보를 내주고 싶진 않았다. 인류를 상대로 정보전 우위를 점하고 그걸로 협박을 할 수 있는 놈이라면 더더욱.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던 놈은 뜬금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대화를 재개했다.
[이해하긴 힘들지만, 모든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격리가 생각보다 약한 듯 하군. 돌아가서 네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자면 아니다 다. 그녀와 같은 반열의 존재들은 이런 장난질에 휘말릴 일이 없지. 내가 아는 한은 그렇다. 혹여 가능하더라도 이 작은 행성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애초에 버텨내지 못하겠지. 내 열화판의 존재도 제대로 버텨내지 못해 세뇌가 이리 불안정한 걸 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열화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머릿속에 주워 담으랴, 놈의 동태를 살피랴 정신이 사나웠던 류 현의 입에서 제지할 틈도 없이 물음이 튀어나갔다.
[그래, 열화판이지. 너의 눈앞에 있는 ‘나’의 존재는 나의 고향 [에레츠]에 있을 나의 열화 복제다.]
류 현이 전혀 뜻밖의 말에 얼이 빠져있는 사이 놈은 아예 쐐기를 박았다.
[그것도 복제와 동시에 세뇌되어, 이곳의 인간들을 죽이라고 보내진 복제지. 자세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건 내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지고 가야하는 의문인 것 같군.]
놈이 터뜨리겠다고 협박한 핵폭탄 대신 다른 폭탄이 류 현의 머릿속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