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탐식마(貪食魔)
후덥지근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그 불쾌한 감각에 지벡 건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플러처럼 생긴 방어구를 오히려 여몄다.
겉보기에는 이상한 행동이었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감각을 기반 하면 매우 올바른 대처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현실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리가 없으니까. 그 정도 되는 플레이어는 던전 내에서도 이런 불쾌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최소 블랙, 던전 난이도에 환경이 개판인 게 작용한 퍼플 정도일까.
어느 것을 기준으로 잡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건 분명했다.
이 열기에 미군은 전투기 두 대를 잃고, 저지선을 50키로미터 뒤로 물려야 했으니까.
뉴욕 시 위로 드리운 붉은빛의 반투명한 돔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위해성도 없어 보였다.
실제로도 그렇기도 했다.
경계면 주변에 있는 건물들은 망가진 그대로 다른 파괴를 겪지 않은 상태였고, 어제까지만 해도 접근을 차단하는 열기도 없었다. 어제까지는.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도착하자 이렇게 변한 것이다.
그 열기의 근원으로부터 20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에게 까지 영향이 닿는 것을 보면, 눌러두었던 의구심이 고개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들이야? 쉬지도 않고 괴수만 때려잡더니 전투 후유증으로 단체로 맛이 간 건가?’
눈을 찌푸리며 안력을 끌어올려봐도 보이는 건 등 뿐이었다. 네 여자와 한 남자의 등.
지벡 건터는 그들 중 한 남자가 류 현이 아니라는 것에 불만 아닌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깡이야 대체? 어제 언성 높여가면서 싸운 건 또 뭐고? 뜯어말리려고 싸운 게 아니었단 말이야?’
삼 일전 숙소에서 말다툼이 있었을 때 억지로 라도 엿들었어야 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벡은 곧바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피지컬 쪽도 아니고, 마법사인 자신이 용잡이 팀이 머무는 숙소에서 나오는 소리를 엿들으려면 화련의 마법을 뚫어야한다.
뚫을 수 있나 없나 이전에 행하지 않는 게 좋은 일임은 분명했다.
지벡은 스스로가 매우 애매한 위치임을 모르지 않았고, 동시에 그 괴물 같은 여자의 마법이 흐트러져서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황에서 이상한 짓(도청)을 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간간히 터져 나오는 고성들을 조합해서 전술 수립에 문제가 있는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애썼다.
그 와중에 웨인 크로이츠도 그 자리에 끼지 못했다는 점이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당분간은 이런저런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겠구나. 괜히 눈에 안 띄게 조심해야겠다. 입도 조심하고.
죽으러 나가는 것보다야 눈치 좀 보는 게 낫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벡은 그 날 호출을 받았고, 류 현의 입에서 황당한 공략 작전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자신에게 빠져도 된다는 말에 생각해보겠노라고 자리를 떴고, 사흘간 고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 과정에서 원 작전안이 폐기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수정된 안을 들려주지 않은 건, 저 안쪽으로 돌입할 예정도 없고 가장 늦게 합류를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정말 결행 직전에 슬쩍 껴들었으니까.
“진짜 돌겠네. 무전도 안 닿고...대통령놈은 대체 뭔 정신머리로 저걸 그냥 냅둔거야?”
지벡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미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도 류 현의 결정을 번복시키진 못했을 테지만.
유일한 동아줄이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결국 지벡이 할 수 있는 일은 들고 있는 커다란 캠코더를 놀려보는 것뿐이었다.
하나에 최신 전투기 값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하는 놈.
‘놈에게 쫓기기 시작하면 찍어달라니...정말 패퇴하는 걸 가정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럼 뒤에 최대한 화력을 끌어 모아야 하는 거 아냐?’
생각할수록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지벡의 기분을 웨인 또한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야야, 얼굴 좀 펴. 뭐 해보기도 전에 얼굴에 쥐나겠다. 련아.”
승하가 엉덩이를 툭 치자 화련은 눈을 흘겼다. 웨인이 보기에도 화련은 지나치게 고조된 상태였다.
그것을 탓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당한 상황인 것도 맞았지만.
‘...이해가 안 가. 왜 갑자기 공략 방향성을 확 바꾼 거지? 그것도 철퇴전까지 가정하고...’
전쟁 중에 가장 큰 피해가 나는 건 단연 후퇴 시 쫓기면서 나는 피해일 것이다.
같은 인간상대로도 그럴 진데, 인간보다 우월한 전투력을 가진 괴수라면 말할 것도 없다.
던전에서라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이요.
현실에서도 지연을 위해서 던져주는 것이 플레이어에서 기갑전력이 될 뿐이지 별 다를 것은 없다.
플레이어라는 보충이 지극히 힘든 전력을 희생시키는 대신 돈을 갈아 넣는 것뿐이다.
아마 이에 대해서는 미국이 가장 도통한 집단일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죄로 그들은 대부분의 일을 바닥이 아닌, 지하실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했으니까.
그런 미국조차 류 현이 ‘패퇴를 가정하고 병력 배치를 해주십시오.’라는 말에,
‘그게 되겠소?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그의 결심을 돌리지 못해서 그리하겠노라고 하기는 했지만, 동석한 국방부장관의 결의에 찬 게 아니라 반쯤 넋이 나간 낯이었다.
미국 곳곳에 비밀리에 보관중인 핵무기가 협박재료가 되었을 때,
더 놀랄 일이 없어보이던 국방부 장관은 류 현이 혼자 먼저 진입할 것이라는 말에 반문조차 못할 지경이었고 웨인 또한 그 심경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바였다.
‘대체 어떻게 설득을 한 건지...’
더 황당한 것은, 류 현을 제외한 용잡이 팀원들이 불만스러워하긴 해도 착실히 그의 작전안대로 따른다는 점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숙소에서 고성이 터져 나와서 이거 중재해야 하나 아침까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거지상만 했을 뿐 착실하게 그의 지시를 따랐다.
뉴욕 시를 맴돌고 있는 이 이상한 열기 때문에 최신 전투기 두 대가 먹통이 돼서 추락하고, 군병력이 예정보다 훨씬 뒤에 위치하게 되었을 때도 조금 짜증을 부렸을 뿐이었다.
웨인은 그 반응을 보고나서야, 패퇴할 것을 가정해두고 시작되는 이 작전이 과장 같은 게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자신이 실감하는 게 너무 늦었다는 것과 아직 다 실감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대체 왜...? 본 드래곤 이후로 한 번도 패퇴해 본적 없으면서 왜 뒤를 내주는 위험을 감수하는 작전을...’
패퇴할 것을 가정하고 돌입하는 것이 맞는 짓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웨인은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류 현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청해서 혼자서 위험을 다 감당하겠다고 나선 저 남자야 말로, 용잡이 팀의 핵이자 전부였으니까.
물론 용잡이 팀의 구성원 하나하나는 대체 불가한 자원임이 확실했다.
기동성과 저지력을 담당하는 화련이나, 팀원 전체의 화력을 끌어올리면서 보조 마법사 포지션도 맡은 희란 중 하나가 없었다면 레드 드래곤 웨이브는 동부를 완전히 끝장내고 중부와 서부도 사정권 안에 두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느새 용잡이 팀에 편입되어버린 승하는 말할 것도 없고, 백혜라는 그 화련의 구명했으며 스스로도 괴물이라고 칭해도 될 마법사.
하지만 그녀들 전부를 합쳐도 류 현을 대신하는 건 불가능 할 것이다. 웨인은 확신했다.
이제는 같은 인간이 맞는지 확신조차 안 서는 저 괴물이야 말로 인류가 최후까지 지켜야할 에이스카드라고.
그러니 웨인에게 있어서 류 현이 밀어붙인 이 작전은 리스크만 잔뜩 있는 자충수나 다름없었다.
그의 능력을 보면 몸을 빼낼 수 있다고 자신할 만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성공을 보장하진 않으니.
먼저 진입해서 상황을 살핀 후 어지간하면 몸을 빼내겠다니, 네임드 몹 상대로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것도 상대가 초대를 빙자한 협박으로 유도한, 함정일 게 뻔한 장소로 혼자 들어간다니?
류 현이 네임드 몹에 관해서는 권위자라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면,
아니,
괴수가 핵무기 폭파로 협박을 해오는 초유의 사태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나서서 반대를 했을 것이다.
가장 의문인 것은 그런 것 따위 상관없다고 외치지 않을까 싶었던 그의 팀원들이 그러고 있지 않다는 것.
‘...관계 악화를 감수하더라도 지금은 말려야.’
이마저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하며 움직이려는 그 때,
류 현이 움직였다.
***
“...보고 있었군.”
붉은 돔을 깨버리려고 손을 뻗자마자, 비켜주는 것처럼 돔의 일부분이 열렸다.
열린 구멍으로 안쪽의 열기가 쏟아져 나와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류 현은 혀를 차고는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일단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데...이 열기는...눈속임용인가? 차라리 그냥 들이받는 놈이면 좋겠는데.’
주변에 눈에 띄는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한 류 현은 눈을 감았다.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그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검은 안개가 피부 위를 기는 거머처럼 꾸물꾸물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몸 윤곽을 점한다.
다음은 회색 오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으면서도 뒤섞이려는 것처럼 서로 위치를 바꾸기를 반복했다.
류 현은 계속해서 걸었다. 걸음을 멈추자, 그의 눈이 뜨였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동공과 흰자위가 서로 색을 바꿔치기 한 상태였다.
하얗게 백열하고 있는 동공은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떨리고 있다.
‘강림’. 페이스 배분을 생각하면 후순위로 미뤄둬야 할 카드였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말한 것처럼 패퇴를 최우선 순위 옵션으로 둔 것도, 놈의 공격방식을 관찰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위험을 무릎 쓰고 혼자 먼저 나선 가장 주된 이유는 해왕 비아트릭스가 보여준 화련 저격이었다.
그런 것을 봤는데, 함정일 게 뻔한 곳에 아무 대책 없이 동료들을 끌고 들어갈 순 없었다.
그 대책이 자기 몸으로 그걸 찢어발기는, 리스크 계산은 개나 줘버린 것일지라도.
류 현은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동공으로 붉은 것을 바라봤다.
인간을 협박한 최초의 네임드 몹을.
놈의 머리통에는 ‘염왕 살바토르’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놈이 자신의 타겟이라는, 무엇보다 명확한 증거.
류 현은 그대로 뛰어올라 놈의 턱주가리를 후려갈기려고 했다.
그보다, 놈의 말이 더 빨리 그의 머리를 울렸다.
[이곳에서도 인간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나 보군. 너 정도의 존재가 초대장을 보고도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신의 사도여, 다시 말하도록 하지. 나는 너와 싸울 의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