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3화 〉탐식마(貪食魔) (333/429)



〈 333화 〉탐식마(貪食魔)

‘흠...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방음막을 친지 한 시간쯤 지난 것을 확인한 화련은 슬쩍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쪽에서는 밖을  수 있는 줄도 모르고, 대놓고 병실 안을 들여다보는, 아니 들여다보려고 노력 중인 병원 관계자들이 꽤 되었다.
이상이 있다고 알린 것인지, 병원 주변에 배치된 호위병력들도 달려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긴 한국에 있는,  현이 사들이다시피 한 병원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런 반응이 병원 내에 있는 vvip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맞는 반응 일 것이다.
그렇다고 화련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화련은 슬쩍 불투명막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달려오던 호위병력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고개를 가로 젓는 것으로 의사 표현을 마친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막을 아예 실루엣도  수 없는 검은 색으로 바꾸었다.

화련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류 현은 드물게도 온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눈에 띄게 오르내리는 어깨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런  현 앞에 있는 세아는 말할 것도 없이 쪼그라들어서 그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와중에도 곁눈질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  되는데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 좀.’

화련은 입가를 주무르는 척을 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입김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지만  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거  되겠네.’


어떻게 봐도 의도적인 무시다.


세아가  현에게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슬쩍 껴들어서 빼내준 전적이 있으니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받아줄 의향도 충분했고.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이런 역할은 영 별로지만.’


어쩌겠는가. 가족 일이라면 눈 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는 대장을 말릴 사람이 저 뿐인 것을.


다른 팀원들이 전부 이 자리에 있었어도 그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죄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든 사연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니면 아주 말할 거리가 없거나.
어찌되든 간에 자신에게 돌아올 공이었다. 화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전 같으면 이렇게 티도 안 내고 혼자서 끙끙 앓았을 텐데. 그래도 많이 나아졌네.’
“자자, 남매 다툼은 좀 있다 쉴  하시고.”


세아의 눈빛에 원망이 담겼지만 애써 못 본채 했다.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초대장 내용이 뭐였던 거에요?”

 현은 대꾸 없이 한 숨만  내쉬었다. 화련은 슬쩍 그의 앞쪽으로 돌아가서 고개를 기울였다.


“마스터?”
“...누나, 다시 설명해줄 수 있어?”


한 숨 함께 마지못해서 내뱉은 말에 화련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눈 돌아간 정도는 아니네. 저번에 말해둔 게 아주 의미 없진 않았나 보다.’


“어, 으응. 잠깐만.”

세아가 손을 몇 번 휘두르자 검붉은 마력들이 그 궤적을 따라서 흐느적거렸다.
그러자,


츠팟! 시야를 검붉은 마력이 가득 채우더니 반투명한 창을 띄웠다.
반사적으로 저주 대응을 태세를 취했던 화련은 아무도 모르게 한 숨을 삼켰다.


‘...재능은 언니 쪽이  나을지도.’


복잡한 심경을 접어둔 채,
화련은 창이 출력하고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곧 저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린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류 현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가 표정으로 물었다.
“마스터, 이거...?”

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라지 않던 대답이었다.


그의 대꾸를 이해했음에도 화련은 재차 물었다. 아니, 물어야만 했다.
도무지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마스터 이거 저번에...”
“예, 국방부 장관이 절대로 교전을 피하라던  자리들이 맞습니다. 다른 곳들도 아마...”

화련은 그대로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류 현도 그녀를 일으켜줄 생각도 못하고, 애꿎은 뒷머리만 헤집어 대었다.
그도 세아가 없었다면 좀 더 극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현은  숨과 함께 화련의 머리 위에 떠있는 창에 투사된 지도를 노려보았다.
지도 위에는 수십, 수백 개의 붉은 점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북미 대륙, 그중 미국에 집중되어 있는 붉은 점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기억에 언뜻 남아있는 위치들이었다.

레드 드래곤 웨이브를 막아내고 다음날,
미국방부 장관이 위경련이 온 표정으로 가지고 온,
꺼내기 직전까지 한 숨과 머뭇거리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꺼내놓은,
1급 기밀 인장이 찍힌 문서에 표시되어 있던 장소들과 매우 유사해보였다.



핵무기 관리시설들이었다.


***

“염병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압니까! 6시간! 6시간 내로는 누가와도  되니 그런 줄 아쇼!”

탁! 케인 트라웃은 거의 내팽개치듯이 스마트 폰을 내려놓고  너머의 거대한 구조물을 노려봤다.
원자로를 노려본다고 뭐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달리 할 게 없었다.
곧 이 모습도 보지 못하게  거라는 걸 수도 있다는 걸 수십  상기 당하고 있으니까. 연방요원들로부터 말이다.

꽉 다물린 그의 입으로 f나 s로 시작하는 말이 새어나오려는 찰나였다.


“또 닦달하는 연락이 왔습니까?”
“...위원장님.”

연방정부의 높으신 분이라도 사전 예고 없이 이 제어실에 들어오면 샷건을 겨눌 준비가 된 케인이었지만, 원자로를 포함한 이 연구시설을 새우다시피한 이에게 그런 원칙을 강요하진 않았다.

백발을 깔끔하게 옆으로 넘긴 초로의 학자는 케인이 내어준 자리에 앉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 휴대폰도 아주 불이 나는군요. 연방 쪽에서도 정신이 없나 봅니다. 하긴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요.”
“주정부에서 한 번, 연방 정부에서 한 번. 이놈들이 제대로 인수인계도  하는 건지 거의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닦달을 하는 군요. 젠장할.”
“이 상황에서 이쪽 일을 하던 실무자들만 배치되길 바라는 건 힘들겠지요.”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원자로를 바로 꺼버리라는 놈을...”


어휴, 케인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정치 감각이 영 꽝인 자신조차, 내려온 지시만으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유추할  있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젊은 친구들은 모두 내보내셨나 보군요.”


항상 너저분한 모습으로 분주함을 과시하던 제어실은 깔끔해지진 않았지만, 평소보다 휑한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집기와 옷가지들이 꽤 사라져있었다.
언제나 저 소파에 늘어져있던 연구원들과 함께.


“저야 무슨 일이 터져서 여길 무덤으로 삼아도 별 문제 없겠지만, 그놈들은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요.”

여상스러운 태도로 말했지만 케인의 표정은 전혀 펴지지 않은 채였다.

연방정부에서 처음 명령이 하달되었을 때, 대강 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부의 몬스터 대란에도 불구하고 계속 출근하던 놈들을 전부 피난길에 보내버린 것이다.


아직 동부 방어선이 뚫리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넉살좋게 출근하던 놈들도 더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하달된 명령이 시사 하는 바는 심상치 않았다.


‘무조건적인 원자로 가동 중단이라니...당장 끄기만 해서는 안전이 보장이 안 된다는  모르진 않을 텐데.’


원자로를 끈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공격당할 시 방사능 유출 위험은 여전하고, 전체 전력 공급 중 20%에 달하는 원자력 발전이 중단되면, 단순히 20%의 공급량이 줄어드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평시도 아니고, 동부가 사실상 정지된 상태고 거기서 피난민들도 쏟아져 나오는 중이니까.

‘다른 발전소에는 비상 대기명령만 떨어졌다고 했었지.’

저게 정상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하기는 했지만, 이건 과잉대응에 가까웠다.

넓디넓은 미국 땅은 탐지 레이더와 인력만으로 커버할 수는 없었기에, 미국 내의 발전소 관리자들은 일반인 군인과 군인이지만 공식적으로는 파견인력인 플레이어들과 연계하는  익숙했다.
퍼플 던전이 터져서 튀어나온 리치가 원자력 발전소 50키로 내로 접근한 적도 있지만, 이런 명령이 내려간 적은 없었다.
무지막지하게 비싼 탱크들로 놈을 유인해서 격멸한 적은 있어도.

끄고 튄다고 해서 뭐가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발전소는 놈들의 관심사도 아니었으니 자리를 비워도 되도록 조치를 취하고, 인원을 소개 시킨 뒤 유인책을 쓰는 게 정상적인 대응이었다.
동부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괴수 사태라면 위처럼 대응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부가 마비되어 분위기가 흉흉한데,
전력 공급의 20%를 날려버리고 안전도 보장하기 힘든 명령을 내린다?

‘우리 연구소 같은 소형 원자로까지 공문이 내려왔다. 이건 원자로 한정 명령이야. 뭔가  있다...’


천공성 사태 내내 굳건히 버티던 방어선이 뚫릴 수도 있다는 예측 이상의 것이 나왔기에 나온 명령일 터.

이 이상의 추측은 재료 부족으로 불가능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


“솔직하게 대답해주게 제프.”


제프 리어던은 대답 없이 자신의 멘토이자, 상관을 돌아봤다.


미합중국의 대통령 제럴드 던컨은 반년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핼쑥한 얼굴로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처음 천공성이 나타났을 때 그냥 핵공격을 내렸어야 했을까? 용잡이 팀의 마법사도 그러지 않았나,   실체화 상태였다고.”
“각하.”

던컨은 제프 리어던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그 때 핵을 퍼부었다면 낙진으로 도시 몇 곳은 버려야 했겠지만 적어도...”
“각하, 당시에 그런 명령을 내렸더라도 실행직전에 의회가 들고 일어났을 겁니다.”
“......”


던컨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있냐는 표정으로 그의 부통령을 바라봤다.
그의 부통령은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계엄령을 내렸을 때 상황을 떠올려 보십쇼.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민주당과 공화당이 손잡고 각하를 탄핵했을 겁니다. 드류 그 친구는 탄핵 접수보다 빠르게 각하를 찾아왔을 거고요. 자기 도끼와 함께요.”


존 드류가 거론되자 던컨은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얼굴을 벅벅 긁어대었다.

조금 정신이 돌아왔는지  숨과 함께 그는  마디 내뱉었다.


“미안하네. 젠장, 드류 그 친구가 이런 식으로 내게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원래 세상살이가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친구 도끼가 점잖은 선전포고문을 보내는 괴수에게도 먹힌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그 친구가 합중국의 대통령 정도가 아니라 세계 통합정부를 세웠겠죠.”
“그것도 맞아. 그 친구의 야망을 막으려면 열심히 머리를 짜내야겠군.”
“솔직히 저희가 뭘 끼어들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괴수가 핵무기를 협상 카드로 꺼내든 것부터가 전대미문입니다만, 일단은 초대장 형식이지 않습니까.”
“오지 않으면 핵무기를 비롯해서 발전소들도 터뜨려버리겠다는 협박이 곁들여진 것도 초대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젠장, 이걸 초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전에 이건 응해서는  되는 함정 아닌가.”
“글쎄요, 제 생각에는 용잡이 팀. 아니, 그들의 대장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더군요.”
“무슨 소린가 그게?”
“각하께서 혼잣말을 시작하시기 전에 잠깐 마주쳐서 짧게 대화를 나눴거든요.”
“아니...자네 그런 중요한 얘기를 지금 꺼내나?”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고 각하의 상태도 좋지 못 했으니까요.”
“...할 말 없군.”
“그리고 그 친구가 결정되는 대로 연락을 주기로 했습...”

그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리어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던컨을 돌아보자, 그의 상관은 목마른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다. 어서! 어서!
리어던은 그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스피커 모드로 전환시키고 전화를 받자마자 귀에 익은 것 같지만, 들을 때마다 긴장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류 현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