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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1화 〉탐식마(貪食魔) (331/429)



〈 331화 〉탐식마(貪食魔)
난장판.
그 외에는 이곳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에 꾸려진 컨트롤 타워의 분위기를 더 적절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배치된 관료나 군인들이 패닉에 빠진 채로 비명을 지르고 뛰어다니는 것은 아니었으나, 혼란스러운 분위기 자체를 감추진 못했다.
어디에서나 고성이 터져 나왔고, 결제판들이 날아다녔다. 좀 과격한 이들은 아예 전화선을 뽑아버리거나, 휴대폰을 변기에 빠뜨리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국가의 명운이 달린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차있던 그들이 갑자기 그 마음을 잃은 건 아니었다.


2차 대전 이후, 첫 계엄이라는 정치적 폭탄이 터진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침착한 편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곳에서 200마일 넘게 떨어진 임시 의회는 의자와 커프스 단추 같은 것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의원들의 보좌관들이 이곳으로, 휴대폰이 불나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업무 지옥에 빠져 있는 실무자들의 상관들도 상태가 좋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던전부 장관은 일주일 사이에 종단과 횡단을 두  감행해야 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캐나다와 멕시코도 다녀와야만 했다.
남은 국방부 장관이라고 편한 건 아니었다. 자리를 비운 던전부 장관이 해야 할 일까지 도맡아서 처리해야만 했으니까.


의회를 달래러 출발한 부통령도, 만일을 대비해서 그를 따라간 비서실도.
약간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죽을 정도의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매한가지였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렇게 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모두가 뉴욕에 똬리를  ‘화룡’이 인류 측 마법사를 멋대로 주물렀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놈이 지적 생명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짓을 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약간 비켜  있는 용잡이 팀도 마냥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매 네임드 몹 출현 때마다 겪은 일이기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는 것이 맞겠지만.
그렇다곤 해도 아주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니는요?”


욕실에서 머리를 닦으며 나오는 화련의 물음에  현은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늘 저녁쯤에 도착할 겁니다. 이륙하는 것까지 확인 시켜줬으니 이제 기다려야겠지요.”
“어휴, 그냥 제가 다녀온다니까.”
“아직 하늘이 닫힌 상황도 아니고, 당장 5분 후에 놈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기력을 온존해야죠.”
“중간에 걸리는 것도 없어서 별로 힘들지도 않다니까요? 미국이랑 한국 사이에 있는 거라고 해봐야 바다가 전부인데.”


당초 팀 구상  역할이 가장 달라진 것은 화련일 것이다.
류 현이 그녀의 영입을 염두에 뒀을 때는 괴수 상대로 저지력을 기대한 바가 컸는데, 끔찍한 사고를 당하지 않고 순조롭게 성장한 그녀는 그 이상이 되었다.
희란과의 공조가 있었다고는 하나, 류 현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인 기동력을 극적으로 채워주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섯이나 되는 네임드 몹 전투에 참가한 그녀는, 방해물이 없는 한 거리는 별 문제가 안 되는 경지에 올라섰다.
그녀의 말처럼 사이에 대양 외에는 별 방해물이 없는 한국까지는 가는 게 별 부담이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멀쩡할  얘기였다.
적어도  현은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화련 씨는 회복하신지 한 달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작은 변수라도 두고 싶지 않군요.”
“어...음...신경 써주시는 건 감사하긴 한데...”

 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화련은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는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도 방금 전에 냉기가 남아있나 확인하는 일과를 마친 참이었다.
매번 귀찮지 않냐고 장난치듯이 물어봐도, 그는  달은 무조건 채울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화련은 괜히 민망해져서 머리를 박박 닦는  했다. 급격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타개하나 고민하던 찰나, 별로 원치 않았던 구원의 손길이 들어왔다.

“감사하면 감사한 거지 뭐 그렇게 말이 길어? 류  너도 참 그래. 그냥 나은지 얼마 안 됐으니까, 쉬고 계시죠. 하면 되는 걸.”
“대체 왜 멀쩡한 자기 방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화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승하를 돌아봤다.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소파를 차지하고 있던 그녀는 까치집 꼴이 된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로 앉았다.

“...혜라한테 쫓겨났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했길래 그 착한 애가 그래요?”
“그냥,  현이 정  내키면 혜라한테 누나 호위 맡기고 싶다는 거 전해줬더니 길길이 날뛰더라고.”
“안 봐도 비디오네요. 언니 성격에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고, 세아 언니 옆에  붙어 있어. 이랬겠지.”
“흠흠...”


승하는 들리지 않는 척 딴청을 부렸다. 화련은  숨과 함께 머리를 닦던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휙 던져 넣었다.

“혜라가  끼어들길 원했으면 애초에 데리고 오질 말았어야죠. 다 데리고 다녀놓고 갑자기 빠지라고 하면 애 기분이 어떻겠어요? 말이라도 좋게 하면 몰라.”
“걔가 내 말 듣는  알아?”
“후우...전에도 말했었지만, 이젠 힘으로 눌러놓고 어디 가둬둘 거 아니면 혜라 떼놓을 생각은 접는 게 나을 거에요. 언니가 혜라면 위험하니까 집에 있으라면 듣겠어요?”

 말이 사라진 승하는 한 숨만 푹푹 쉬었다. 화련은 그 모습에 고개를 내젓고는 류 현을 돌아봤다.

“그런데 세아 언니 오시면 호위는 어쩌실 거에요?”
“웨인 씨가 키우던 팀이 있는데 그 분들이 맡아주실 겁니다.”
“아, 그 보스턴 터졌을 때 그 사람들?”
“예, 사정상 헌팅레벨 측정은 못한지 제법 됐다고 하는데 300 근접한 분들이더군요.”
“미국도 양심이 있으면 그냥 있지도 않을 테니 그 정도면 괜찮겠네요.”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국가 원수급 호위진이 될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세아 언니 아직도 그러세요?”
“예, 이리로 바로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다고 하더군요. 보안레벨 핑계로 넘어갔다고 인솔 담당자가 연락해왔었습니다.”

저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화련은 괜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둬도 세아의 재능이 알아서 자리 찾아갈 것이라고 말한 것이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다. 악담은 아니지만, 류 현에게는 악담같이 들였을 터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하긴 했지만, 그 날 회의가 파하고 류 현이 계속 침묵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화련이 위로의 말을 고심하려던 때였다. 노크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저어...들어가도 될까요?”
“희란아? 어, 들어와.”

방안으로 들어선 희란은 좀 어수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화련은 그 원인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희란이 안고 있는 세 개의 천 뭉치에서 발하고 있는 특이한 마력파장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응? 이걸  다 들고 왔어? 마스터가 다 들고 오라고 하신 거에요?”
“예. 희란 씨 고생하셨습니다. 이리로.”


소파 앞의 낮은 탁자에 천 뭉치들을 내려놓고, 네 남녀가 주변에 둘러앉았다. 머리를 틀어 올리며 화련이 물었다.

“갑자기 유니크 아티펙트들은 왜요? 개미지옥은 미군한테 대여해준다고  하셨어요?”
“그 전에 좀 확인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화련 씨, 방 안에 방어막  둘러주시겠습니까. 밖으로 작용하는 것 말고, 안으로요.”
“...알겠어요.”

화련이 슬쩍 손을 휘젓자, 방안의 공기가 일변했다.  현은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푸른 천에서 청뢰를 꺼내들고는,

후욱! 그것을 쥔 손에 검은 안개를 힘껏 일으켰다.
검은 안개는 순식간에 그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약되었고,
그 밑으로,


츠츠! 그보다 훨씬 짙은 검은색의 ‘강림’의 마력이 힘껏 휘돌기 시작했다.
화련이 기겁하며 뭐하려는 거냐고 벌떡 일어서려는 찰나,

쿠르르! 치지직! 그의 손아귀가 열리며 푸른 번개가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터져 나왔다.
물론 방안을 휘젓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류 현의 손아귀 크기 정도의 작은 공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스파크를 튀길 뿐이었다.

청뢰의 ‘해방 상태’.
류 현이 ‘레드 드래곤 웨이브’를 혼자 틀어막다시피 하며 얻은 청뢰의 진면목이었다.

“희란 씨.  상태로 다루는 연습을 해볼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에?”
“잠깐만요. 마스터, 형태도 무너졌는데 어떻게 양도하고, 희란이가 이런 걸 어떻게 감당해요?”
“형태는 이렇게 집중하면...”


츠즈즈! 치직!  현이 손 안에서 날뛰는 푸른 번개를 손바닥 위로 집중시키자, 번개로 이루어진 반지 같은 형태가 생겨났다.
끊임없이 형태가 무너졌다가 회복하길 반복하는 전격으로 이루어진 고리.

희란은 홀린 것처럼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그러다 손을 쑥 뻗어왔다.


“희란아, 잠깐만.”
“어? 언니?”
“마스터 일단 저부터 해 보죠. 형태 유지 되는  맞죠?”
“예. 뭐라고 설명은 안 되는데 이게 ‘묶어놓은’ 상태입니다. 풀면 출력은 올라가지만...”
“그 상태는 마스터도  감당  되잖아요. 승하 언니도 못 버틸 걸 제가 어떻게 감당해요. 뭔가 이상하면 그냥 던져버릴 테니까 준비나 해두세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화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른 침을 삼켰다. 청뢰의  ‘해방’때는  현도 미쳐 날뛰는 전격 때문에 마력보다 체력이 먼저 고갈됐었다.
 현이 바라던 화력은 충족시키지만, 동시에 그의 최대 강점인 지구력을 깎아먹고 마는 것이다.


당연히 이 해방 상태로는 희란도 화련도 청뢰를 다뤄본 적이 없었다. 류 현조차 제어가 안 된다고 틈틈이 던전에 들어가서 실험해보고, 거지꼴이 돼서 나오기 일쑤였으니까.

‘마스터 표정 보면 뭔가 실마리를 잡긴 한 거 같은데.’

자신의  상태가 우려돼서 누나를 데리러 가는 일도 막을 정도니, 안정성은 의심할 필요가 없긴 할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긴장되는 것은 별 수 없지만.
화련은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뻗었다.

집어 들었을 때  감상은 ‘내가 잡은 게 맞나?’였다. 아무런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찌릿 하는 예상했던 감각도 없었고, 아티펙트 마력을 빨아들이려는 느낌도 없었다. 왼손 중지에 끼고 나서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화련은 다른 의미로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어, 이거 청뢰 다루던 때처럼 하면 되는 거에요?”
“네. 다른 게 아니고 청뢰 그 자체니까요. 다루긴 오히려  상태가 쉬우실 겁니다. 원래 형태일 때랑 다르게 세부 컨트롤이 가능하거든요. 화련 씨 컨트롤 정도면, 제가 했던 것처럼 손아귀 안에 가둘 수도 있으실 겁니다.”
“으음...좀 불안한데.”


화련은 말로 그치지 않고 방안에 두른 방어막을  겹을 더 둘렀다. 이 정도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출력 청뢰가 아닌 이상 큰 문제는 없으리라.
단순히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격을 지면으로 흘려보내게 조치를 취했으니까.

“그럼 할 게요?”

류 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화련은 마력을 밀어 넣었다.

정말 아주 조금.
이전의 청뢰였다면 발동은 꿈도  꿀 정도로.


불행히도 그 정도의 조심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콰릉! 기다렸다는 듯이 푸른 번개가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화련이 쳐둔 방어막을 뚫고,  사이에 끼워놓은 유도선을 상쾌하고 무시하고, 특수 자재로 세운 벽마저 뚫고.
지평선을 향해서 날아가는 전격의 꽁무니만 본 화련은 바로 류 현을 향해서 눈을 흘겼다.


그리고 곧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꿔야만 했다.  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니 대체...뭘 하신겁니까?”
“그건 마스터가 아니라 제가 할 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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