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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0화 〉탐식마(貪食魔) (330/429)



〈 330화 〉탐식마(貪食魔)

지벡 건터는 지난 일을  후회하는 편은 아니었다.
앞뒤 없고, 위아래도 없는 개망나니라는 세간의 평과 달리, 그가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과거로 날아가는 마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그 짓에 시간을 할당할 예정은 없었다.
자신이 후회할 짓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여간해선 후회하지도 않는 남자. 지벡 건터는 지금 이전에 없을 정도로 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현에게 자신을 의탁한 일을 말이다.

‘젠장, 그늘에 숨은  아니라 폭풍 한가운데로 뛰어든 꼴이 됐잖아.’

지벡이 류 현에게 스폰서들을 팔고, -팔았다고 하기에는 아는 게 없었지만- 그에게 의탁한 이유는 간단했다.
본인이 좋든 싫든, 그가 시대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최소한 트렌드 메이커로는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벡 건터는 지중해의 리치성을 보고 인류가 또 다른 기점에 도달했음을 느꼈고, 남극에서 네임드 몹을 상대하고 나서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곧 폭력의 시대가 도래  것이며, 그건 이전의 폭력이 지배했던 시간들보다 더 혹독할 것이라고.
단순히 서열을 가리거나 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생존을 겨루는 시대가 도래 할 테니.

그 판단을 내린 직후, 지벡은 류 현에게 의탁한 자신의 판단에 축배를 올렸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 때 마셨던 술을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지만.

‘멍청한 새끼.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애초에 날 챙겨줄 의무도 없는 놈이잖아.’


그 당사자   명인 류 현이 이 속내를 알았더라도 지벡을 탓하기 어려울 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눈’을 담당하던 지벡 건터가 뉴욕에 심어둔 ‘눈’ 때문에 역으로 장악당할 위기였으니까.
아니, 이미 장악당했다고 해도 무방한 상태였다.


‘젠장, 브라질에서 그 꼴을 봤을 때 내뺏어야 했어. 뭘  잘 보이겠다고 나대다가 이런 꼴을...’

처참한 심경과는 별개로 그의 내부에서 마력이 꿈틀거렸다. 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움직임이었다.
지벡으로선 그저  흐름에 반항하지 않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해도 내장이 휘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지만.

‘이런 씹...!’

지벡의 내부에서 외부로 흘러나온 마력은 순식간에 마법을 짜내었다. 이런 상태만 아니었다면 정신없이 술식을 훔치려고 애썼을 정도로, 깔끔하고 우아한 솜씨였다.
결과물은 더 놀라웠다.


[다 모였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인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입’이 말했다. 괴기스러운 모습과는 상반되는 위엄에 찬 음성이었다. 평소였다면 듣자마자  놈 사기 하나는 기똥차게 잘 치겠구나 생각을 했을만큼, 신뢰감을 팍팍 올려주는 그런 음성이었다.
성대도, 그곳에 공기를 밀어 올려줄 폐도, 이빨도, 공기를 조절할 혓바닥도 없었지만 허공에 뜬 입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지껄였다.


입 위로는 하나 뿐인 안구와 콩알만 한 구슬 같은 것이 떠있었다.

그것들 모두 지벡의 마력을 쥐어짜 만든 마법의 부산물임을 말할 것도 없었다.
피착취자 지벡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눈알을 굴려서  현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애썼다.
‘됐다고 해! 제발!’


이전에 겪었던 고통들에 비하면, 통증이랄 것도 없는 상태였지만 끔찍함으로 따지면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했다.
사지가 묶인 채로, 내장이 휘저어지며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마력이 멋대로 주물러지는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지벡은 이 형언할 수 없는 엿같은 상태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현은 그 기대에 응해주었다.


“와야 하는 사람은 모두 온  맞아.”
[그러한가?  늙은 인간이 나갈 때까지 기다려줄 수도 있다만.]

‘입’이 지껄이는 말에 던컨의 어깨가 움찔했다. 어떻게 봐도 ‘늙은 인간’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좌우로 시립해 있는 경호원들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할 리는 없으니까.
류 현은 던컨을 한 번 돌아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건 네가 참견할 바가 아니야.”
[정말이었군. 저런 무방비한 늙은 인간이 이 땅의 대표였어. 너희가 만든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실감이  나서 말이다. 가끔 멍청한 왕이 나오긴 했어도 그놈들에겐 혈통과 왕이라는 힘이 있었으니.]


방안에 자리한 이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입’이 지껄이고 있는 것은 최악의 가정이 사실임을 말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사흘 전에 시작된 전자기기 도둑질이, 단순히 신기한 물건을 수집해 간 것이 아니라 정보 수집에 성공했다는 의미.
거기에 적이 그렇게 모은 정보를 취합할  있는 이성도 남아있는 상태는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괴수에게 뒷방 노인네 취급받고도 화낼 생각도 못하고 있던 던컨은 저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신이시여. 저희가 그토록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류 현은 그보단 더 현실적이었다.

‘염병, 그냥 훔쳐간 게 아니었군. 거기서 정보를 빼낸 거였어. 어디까지 알아낸 거지?’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긴 했지만  자리에서 가장 골치 아파하고 있는 사람은 류 현일 것이다.
인류의 취약점을 인지할 수 있게  괴수가 얼마나 골치 아픈지 아는  그 뿐이었으니까.
용잡이 팀원들은 그에게 듣긴 했지만, 이런 문제는 그냥 듣는 것과 겪은 것의 차이가 천지 차이였다.

군수시설을 습격한 괴수 군단의 반을 갈아버리고 왔더니, 그 사이 식량 생산 시설이 박살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는 상황은 그냥 끔찍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놈이 전생의 아지다하카가 그랬던 것처럼, 화룡 무리를 운용한다면? 놈을 잡아 죽이더라도 전쟁에서는 지는 끔찍한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끔찍한 시나리오가 짜여가는 것을 류 현은 고개를 내저어 떨쳐내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입’은 제 좋을대로 계속 지껄였다.


[너희가 만든 기록장치에 적힌 것을 봤을 때도 신기했지만, 직접 봐도  믿기지가 않는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늙은 인간이 종족전체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존재라니.]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우릴 긁은 건가?”
[확인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였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마신의 사도인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어서 말이야.]
“......”


류 현은 멍청하게 마신의 사도? 라고 되묻진 않았다. 이쪽의 정보를 읽을 수 있는 놈에게 이쪽에는 정보가 없다는 걸 티낼 필요가 없으니까.


[나의 제의를 확인하지 못한 것인가? 확실히 확인을 한 개체는 하나뿐이었다만, 사도씩이나 되는 존재가 간단한 눈속임도 못할 것 같지는 않고. 옆의 무녀들도 그대의 휘하로 보인다만.]


류 현은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물고 싶었지만, 티가 날까 싶어 그러지도 못했다.
세아의 존재를 확인했을 거라는 화련의 추측이 사실이었다는 게 드러났으니, 놈에게 다른 추측의 여지를 줘서는  되었다.

[그래도 설마 생텀에 대한 욕구도 억누를 정도일 줄은 몰랐군. 마신과의 연결이 강한 덕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연결이 느껴지지 않고, 그대 개인의 역량인가?]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 정중하게 초대장을 보내고 거기에 응할 사이였지? 적어도  우리를 향한 살의 외에는 다른 건 못 느껴봤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그대의 존재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고, 이 세계의 금제인지 모르겠지만 꽤 곤란한 제약이 씌여버려서 말이다.]
‘제약?’
[그 일을 사과할  해서, 그대가 와주었을 때는 생텀 건설에도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이 별은 상당히 메말랐으니 방법을 알려주더라도 그대 혼자서는 꽤 애를 먹을 것 같아서 말이다.]

류 현은 ‘입’이 지껄이는 말을 전부 머릿속에 우겨넣으면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당장 세아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일방적으로 이쪽의 정보를 뽑아간 놈에게서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과 알지도 못하는 말에 허술하게 반응해서 놈에게 세아라는 존재를 상기시켜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줄다리기 중이었다.


‘모른다는  티내면 놈의 관심이 누나에게 돌아갈 수도 있어.’

모른다는 사실을 크게 티내지 않고 살살 정보만 긁어낼 궁리를 짜내고 있는데, 놈의 말이 머릿속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놨다.


[헌데 내 상상이상이었군. 어찌 이럴  있나 싶지만, 그대는 생텀이 뭔지도 모르는 듯해. 그렇지?]

묻는 말이지만, 대답을 필요치 않는 물음이었다. 괴수의 화법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말을 사용하는 놈은 더 없이 확신에  어조였다.

“...뭐?”
[그대의 반응은 생텀이 뭔지 아는 자의 반응이 아니야. 알았다면 내가 건설을 도와준다고 말했을 때 저 무녀들도 물렸겠지. 보아하니 무녀들도 생텀이 뭔지 모르는 듯 하고. 어찌 이럴 수 있나 싶긴 하나, 이미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따져봐야 별 의미가 없겠지. 마신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아주 불가능하진 않은 일이고.]

놈은 굳어있는 류 현을 내버려두고 제 좋을 대로 계속 진행해 나갔다.

[플레이어라고 했나? 그대들이 그걸 통해서 지금에 이르렀다면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들이로군. 직접 뜯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놈이 흘리는 불길한 웃음에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지벡 건터를 돌아봤다.
지벡은 하얗게 질려서 숨을 몰아쉬던 모습에서, 갑자기 목 주변 핏줄이 전부 일어나서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류 현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에게 회색 오러를 둘렀다. 지벡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더니 격렬하게 기침을 해대었다.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호오, 왕의 권능까지? 그대는 보통 사도가 아니로구나. 그보다는...화신, 화신에 가깝군. 허나 마신은 이미...아니지,  자리에서 그걸 논하는 건 의미가 없겠군. 그대, 정말 내 초대에 응할 생각이 없는가?]
“개소리도 적당히...”

류 현은 욕지거리와 함께 ‘눈’을 향해서 손을 내뻗었다.
회색 오러까지 내보이고 말았다. 이전 싸움에서도 쓰긴 했지만, 놈에게 장악당한 지벡 건터에게 둘러주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고,  생각은 적중했다. 좋지 않은 쪽으로.

그러니 놈에게  이상 정보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놈의 지적능력으로 봐선 이쪽이 정보를 캐내긴 요원해 보였으니, 노출되는 정보만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그딴 초대 없어도, 그렇지 않아도 잡아 죽이러 갈 예정이었다. 그만 꺼져.”
[그 날을 고대하지.]

콰직!  현의 손이 둥둥 떠다니던 ‘눈’과 ‘입’을 허연 연기로 흩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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