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탐식마(貪食魔)
“이걸 대체 뭐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물음은 있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평소라면 미합중국의 대통령의 물음에 이런 반응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던컨은 그리 이해했다.
자신도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던컨은 이미 수 십 차례 반복해서 확인한 영상에서 시선을 떼었다. 이 이상은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헛것을 보았기를 기원하며 반복 재생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지겨울 정도로 확인한 후였다.
현실은 냉정했고, 그의 현실은 그에게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내라고 종용했다. 대통령이라는 현실 앞에서 던컨은 자포자기도 할 수가 없었다.
던컨은 대통령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그의 18번인 비전문가답게 떠오른 대로 말하기.
“그 덩치 큰 친구가 지구 문화에 감명 받아서 넷플릭스를 보려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차마 웃지도 못하고 무반응으로 있을 수도 없었던 이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던컨의 후계자로 불리는 부통령, 제프에게로.
심각한 상황에서 농을 던지길 좋아하는 상관을 응대하는데 도가 튼 제프는 어깨를 한 번 들먹거리고는 말했다.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 친구 덩치를 보면 팝콘 값만 해도 백악관 운영비보다 더 많이 들 겁니다.”
자리한 장관, 고위직 관료들이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던컨은 만족했다.
“그 정도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내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내줄텐데...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문제겠지.”
던컨은 거의 책자형태까지 이른 보고서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직도 모니터에 출력되고 있는 기괴한 도둑질 장면에 대한 장대한 설명과 분석이 실려 있는 보고서를, 던컨은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었다.
화룡들이 온갖 전자기기를 훔쳐서 뉴욕으로 나르고 있음.
그가 보기에 당장은 그 이상의 해석은 있을 수가 없었다. 뉴욕은 지금 대정전 사태 때보다 더한 어둠에 잠긴 상태였다.
시각적인 어둠이 아니라, 사람이 살았던 도시로서의 어둠에.
정찰기를 접근시켜 보려고 해도 외곽도 못 가서 이상을 일으켜 추락하기 일쑤였고, 인력을 투입시키려고 해도 일정 수준의 플레이어가 아니면 거품을 물고 쓰러져 나갔다.
그렇다고 상위 플레이어들을 무턱대로 투입하기에는 지난 ‘레드 드래곤 웨이브’ 때 입은 피해가 너무도 컸다.
단시간에 벌충할 수 없는 병력이 갈려나간 것만 해도 속이 쓰린데, 그 소식이 알음알음 퍼지는 분위기라 서부에 대기 중인 플레이어 통제도 점점 버거워지는 판이었다.
류 현이 굳이 병력 손실을 감수하고 캐볼 필요는 없다고 말리지 않았다면, 꽤 곤란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도 던컨은 진작 계엄 선포를 했었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류 현이 강요하든 하지 않던,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국 영토가 땅 위의 섬 꼴이 된 걸로도 모자라, 그 안에서 적대적인 고지능 생명체가 문명의 이기를 끌어 모으고 있는 상황인데 어찌 확인을 안 해볼 수가 있겠는가?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지.
그 적대적인 고지능 생명체가 거느린 무리의 위력을 본 바가 있는 던컨은, 누군가 핵으로 저것들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만 주면 당장이라도 미사일 버튼을 누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든 이 끔찍한 중압감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젠장, 아니지. 안 돼. 자꾸 핵으로 결론을 유도해서 뭘 어쩌잔 건가. 죽는다는 보장도 없어.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제럴드 던컨.’
답답해진 던컨은 셔츠 단추를 두 개 풀고는 넥타이를 아예 풀어버렸다.
갑자기 침묵하더니 생각에 빠져있던 던컨의 안색을 살피던 이들은 그 신경질적인 몸짓에 움찔했다. 던컨은 못 본채 하고 입을 열었다.
“당장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정보는 이게 다 인 것 같군. 이 이상 모은다고 시간 끌어봐야 시간 손해가 더 클 것 같으니.”
“각하, 하지만 이 정도 정보로는 그 팀에서 다른 요구를 해올 수도...”
“어쩌겠나. 아쉬운 건 우리고, 그쪽에서 부탁한 정보 수집도 빈말로도 잘 했다고는 말 못할 수준이니. 그래도 정보 부족을 핑계로 아예 드러누울 자들은 아니니 다행 아닌가.”
엿새 전, 뉴욕에 네임드 몹으로 추정되는 화룡 무리의 우두머리가 나타난 것을 확인한 날.
류 현이 당장 출격하는 것을 거부한 이유 중 하나인 정보 부족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다는 걸 자리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보 부족을 운운하면서 뒤로 뺄 거였다면 애초에 한국을 떠날 필요가 없는 이들 아닌가.
정보 부족을 운운한 것은 자신들이 언론에 슬쩍 흘릴 핑계를 쥐여 준 것이리라.
그 증거로, 용잡이 팀은 뉴욕 주 밖에 잡았던 숙소를 다시 올버니까지 당겨온 상태였다. 화룡 무리가 보인 기동성을 생각하면 뉴욕 시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던컨은 그 소식을 접한 후 일말의 불안감마저 털어버렸다. 자신이 포기하기 전에 포기하고 도망갈 이들이 아니라고.
그들이 등 돌려 도망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리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까지 그들이 해준 것만으로도 우린 다 갚기도 힘든 빚을 지지 않았는가.”
좌중은 침묵으로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럼 이 최종 검토본을 건네주기로 하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네만은.”
“각하 지금이라도 탐사대를 꾸려서...”
던컨은 단호하게 국방부 장관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인명을 갈아넣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안 되네. 일이 터지자마자 투입했으면 모를까. 무슨 일이든 간에 진작 끝났을 지금 와서 그 사지로 귀한 목숨들 밀어 넣어봐야 뭘 얻을 수 있는지도 미지수 아닌가. 류 현 그 친구도 그러지 않았나.”
“각하...”
“슬프게도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괴물들이 긁어간 것들을 제대로 사용 못하길 비는 수밖에 없군.”
씁쓸한 얼굴로 마무리하는 던컨의 소망과는 반대로, 뉴욕에서는 그들이 알았다면 머리를 쥐어뜯었을 광경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치직! 우웅! 찌지직!
그건 철과 플라스틱이 뒤엉킨 산이었다. 기판이 완전히 박살났거나, 반만 부서진 전자기기들이 작은 동산을 이루었다.
그 산 위로 인간들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전자기기들이 허공을 노닐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번쩍거리는 스파크와 푸른 기류가 그것들이 그냥 떠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거대하고 붉은 동체의 화룡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삼분지 일도 안 되는 덩치의 작은 화룡들이 호위를 서는 것처럼 떠있거나, 건물에 걸터앉은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다 떠있던 전자기기들이 외곽부터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퍼걱이나 쨍 하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매웠다. 용도를 다한 물건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폐기처분하는 모양새였다.
금세 작은 동산이 하나 더 생겨났다.
거기에 맞춘 것처럼 뉴욕 밖에서 작은 화룡들이 날아들었다. 전자기기들을 한 아름씩 안은 채로.
화룡들은 전자기기들이 둥둥 떠다니는 경계면에 도착하자 미련 없이 그것들을 놔버렸다.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전자기기들은 허공에 안착해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중심에 있는 화룡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치지지직! 푸쉭! 힘차게 회전하던 전자기기 들이 일제히 검은 연기를 뿜어내더니 부스러져 내렸다. 순간 화룡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가루의 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물론 화룡이 그 더러움에 노출되는 일은 없었다. 부스러기들이 그 주변을 피해서 쏟아져 내렸으니까.
이내 화룡의 눈이 뜨였고, 황금빛 눈동자 또한 드러났다. 이지와 위엄이 가득한 황금빛에 닿은 작은 화룡들은 황송하다는 듯이 몸을 움츠렸다. 화룡은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곳이군.]
육성 이라는 말로는 도무지 형용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종교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목 놓아 제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을 것이고, 종교가 없는 이도 그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였다.
초월자만이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만드는 위엄이 가득한 소리였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을, 몸 안쪽을 뒤흔드는 듯한 무게를 가진 소리.
거대한 화룡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소리를 내었다.
[생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곳에 도구만 이토록 발달하다니...이전까지 침략도 받은 적이 없는 모양이로군.]
[볼수록 이상한 곳이로군. 이토록 무방비함에도 침략 받은 적도 없는데다가, 처음 맞닥뜨린 공격이 침식이라니. 아니, 그 반대인가? 건너편에서 이곳으로 힘이 옮겨져 오기만 하는 것 같군. 단순히 부서진 세계가 달라붙는다고 하기에는...너무 합병과정이 부드러워.]
[부서진 쪽 주민들이 받고 있는 패널티도 나와 비슷한 것 같고. 여러모로 알아볼 것들이 많겠군. 이상한 충동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화룡은 잠깐 고개를 남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렸다. 네임드 몹, 해왕 비아트릭스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에겐 말해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전투능력에만 치중되어 있던 몸이 건너오면서 감각 소실도 심각한 모양이니. 괜히 상심시켜서 분쟁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을 터.]
[그렇다고 아무것도 전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 이걸 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 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그 마신의 사도 정도면 알아볼 지도 모르겠군.]
화룡의 의지에 따라서 전자기기들을 놓아버리고 주변에서 파도치던 푸른 기류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어떤 줄기는 바람을 타고 나는 민들레 홀씨처럼 느긋하게, 어떤 줄기는 한계까지 높이 치솟았다가 먹이를 향해 내리 꽂는 매처럼 빠르게 목표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기묘한 마력 파장을 마구 흩뿌리면서.
이 날 전 세계 던전 탐지 레이더들이 일제히 혼선을 일으키며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분위기에 박차를 가했으나, 원인을 아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봐야 그들 또한 뉴욕 방향에서 그것이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네임드 몹의 소행임을 추측하는 정도였다.
정확한 진의까지 파악한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유일한 인류인 류세아는 한창 꿈나라를 헤맬 새벽에 놀라서 깨어나, 류 현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