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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6화 〉탐식마(貪食魔) (326/429)



〈 326화 〉탐식마(貪食魔)

“혼자 있어도 되요. 다친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오늘 제일 편하게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가서 일 봐요.”
“음...티 많이 나?”

백혜라는 고개만 작게 끄덕거렸다. 승하는 허허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언니가 티내고 다닌 것보다는 화련 언니가...”
“아...봤니?”
“많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왜 그런지 알아요?”
“그걸 몰라서 지금 갈까 말까 고민하던 거라서. 글쎄 걔가 저렇게 화날 만  건 대충 다 확인 해봤는데 별 이상 없었거든. 류 현은 내상이 좀 크긴 한데 저런  한두 번도 아니고, 희란이는 탈진했지만 조금만 쉬면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이고.”
“직접 알아봐야겠네요.”
“응, 뭐 그렇지. 이 놈의 팀은 조용한 날이 없다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같은데...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그냥 먼저 자고 있어.”
“내가 무슨 혼자서 못 자는 애에요? 이제 어디가도 그런 소리 안 들어요.”
“내가 보기엔 별 차이 없어.”

백혜라가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다. 승하는 그 모습을 보고 낄낄 웃으며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도, 프론트를 지나칠 때까지 그녀의 미소는 지워질 줄 몰랐다.
건물 입구를 보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버렸지만.


“쟨 대체 왜 저러는 거래...”

누구도 들어줄 이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승하는 출입문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출입구에 난 짧은 계단 앞에 서서 말했다. 건물 입구를 떡하니 막아선 채로 살기에 가까운 적의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고 있는 작은 여자를 향해서.

“넌  왜 그래?”
“......”


반응은 두 박자 가량 늦었다. 순식간에 적의를 갈무리한 화련은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승하는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그녀의 옆에 앉았다. 화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이씨, 옆에 앉지 말라니까.”
“넌 다른 것보다  입이 마이너스야. 누가 너  작다고 뭐라고 하디? 그 얼굴이면 그런 것보다는 헌팅을 더 자주 당했을 텐데.”
“내 기분이 별로 라고요. 다리도 더럽게 길어선.”

화련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거리를 벌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는 적의가 사라진 시선으로 멀찍이 떨어져있는 임시 막사를 바라봤다.
적의는 사라졌지만, 누가 봐도 긍정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승하의 고개가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왜 그러는데?”
“......”
“야아, 왜 그러는 건데에.”

승하가 똑같은 말을 말꼬리를 늘어뜨려 가며, 엉겨붙어오자 화련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의 볼을 슬쩍 밀어냈다.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승하의 거리감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합류 초기에는 꽤 심하게 틱틱거렸었는데.


“우리 보낸  때문에  현한테 혼났어? 류 현 표정보니까 화냈어도  주의 주는 정도였을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에요.”

후우. 화련은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승하는 잠자코 기다렸다.


“아까 복귀하면서 미군들 표정 봤어요?”
“응? 어...아니. 복귀할 때 좀 정신 없었어서 기억 안 나는데.”
“마스터랑 저랑 같이 움직인 놈들은 아주 대놓고 괴물 보는 얼굴이더라고요.”
“어...”


승하는 눈알만 데룩데룩 굴렸다. 플레이어가 괴물취급 받는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화련이 새삼스러운 사실로 괜히 짜증을 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짜증이 나더라도 상황이 해제된 이후에 풀 이였다. 가뜩이나 도움이  되는  같다고 불안해하던 화련이었다. 컨디션 조절에 문제가 생길 행동을 별  아닌 이유 때문에 하진 않을 터.


“...마스터는 신경 안 쓰셨지만.”
“걔는 무신경한  진짜 월드 클래스니까. 가끔 보면 너네 어떻게 그리 챙기는 지 신기할 정도라니까. 자기네 누나보고 배운 건가?”
“부정은 못하겠네요.”
“그래서 그놈들이 뭘 어쨌는데? 류 현이 신경 안 썼다고 그게 별일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알아야  같이 해결하든 말든 하지.”
“스프링필드에서  둘러쳐놓고 화룡들 반 가까이 잡아 죽였잖아요.”
“어...응.”

승하는 가까스로 움찔하지 않고 화련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그 때는 자신도 화련이 성토하려는 병사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으니까.
다음이 없는 것처럼 전력을 쏟아 붓던 류 현은 그 정도의 위압감을 보여줬었다.


특히 희란에게서 청뢰를 받아든 직후 10분 가량은...승하는  장면을 떨쳐내기 위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화련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녀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 때 걔들 반응 살필 정신이 있었어? 너도 은근히 정신이 쇠심줄이네.”
“...그  내가 한  뭐가 있다고 바빴겠어요. 언니야 희란이랑 혜라 커버한다고 바빴겠지만.”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류 현이 끝나고 나서 뭐라고 칭찬 안했어? 걔 성격이면 끝나자마자 안 뻗었으면 뭐라고 해줬을 텐데. 막 학원 선생님같이.”
“이상하게 엄청 와 닿는 표현이네. 언니 학원도 다녔었어요?”

화련의 질문은 순수하게 다녀봤느냐가 아니라, 그걸 기억하느냐 쪽이었다. 승하가 ‘대소환’ 이전에 같이 살았던 가족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알았으니까.
승하는 그 때 즈음에 배웠을 것들에 대해서는 묘하게 어색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여러모로 대놓고 묻기는 뭣했기에 이리 물은 것.


“어, 이상하게 그건 기억이 남아있어서. 학원 선생이었던 사람 이름이나 얼굴도 기억나서 뭐라도 물어볼까 찾아봤는데 죽었더라고.”
“아...”


승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픽 웃었다.


“괜찮아.  때는 좀 김빠지긴 했는데, 살아있었어도 뭘 물어보긴 어려웠을 거야. 난 내 이름도 기억 못하던 상황이었으니까.”
“음...”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고.  현이 아무 말도 안 해줬어?”
“하기야 하셨죠.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런 게 아니잖아요.”
“너나 류 현이나 뭐 그리 복잡하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 누가 봐도 기여도 2순위는 너야. 1위랑 차이가 좀 많이 나긴 하지만, 류 현도 네 보조가 없었으면 그렇게 갈아버리진 못했을 테고.”
“한 번 뿐이었잖아요.”
“그 한 번이 너 말고는 못 하는 거였으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전에도 들었잖아. 너한테 무슨 괴수 머리통을 한 번에 으깨버리는 위력을 바라는 게 아니라고.”


승하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화련의 표정은 펴질  몰랐다. 승하가 화련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래서 병사들이  어쨌는데? 복수든 뭐든 뭘 할 거면 류 현 자는 동안 후딱 해치우자고.”
“누가 그러제요. 그냥 좀 화가 나서...”
“에헤이, 속에 담아두면 화병 나. 그리고 누가 두들겨 패제? 그냥 살짝 감봉 정도 되게...”


그녀가 말한다면 감봉이 아니라 진급이 막힐 수도 있지만 그건 그녀가 알바가 아니었다.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승하는 그런 것을 신경 쓰면서 살 예정이 없었다.
나쁜 짓을  것도 아니고, 목숨 걸고 지켜줬더니 화련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의 행동을 했다면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만 했다. 이쪽에 개차반 이미지가 박힌 것도 이런 부분에서는 절대 양보 같은 걸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별 거 아니었어요.”
“에헤이, 왜  말을 바꿔? 일단 들어나 보자.”
“...스프링필드에서 우드스탁으로 갈  잠깐 시간이 있었잖아요.”
“아, 그 때?”
“네, 언니랑 희란이 먼저 출발하고 마스터랑 저랑 잠깐 남아서 쉬었을 때요.”
“계속 해봐.”
“거기 건물 다 무너지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화룡한테 직접 당한 인원보다 건물에 깔려서 죽은 인원이 더 많을 정도로.”
“어, 그랬지. 처음에는 그냥 병사들부터 다 잡혀 죽을  알았는데, 너랑 류 현이 거의 반 잡아 죽이니까 놈들이 벽 풀리자마자 정신 나가서 마구잡이로 도망갔잖아.”

승하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상황에서도 류 현은 검은 날개로 서부 방향으로 도망가던 놈들 열을 찢어발겼었다. 그 때의 흉흉함은 정말 괴물이라는 말이 괴수보다 더 잘 어울릴 정도였다.
그마저도 ‘구멍’에서 튀어나온 앞발을 상대하면서 화룡의 반을 찢어죽이고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에서 한 일이었다.
승하가 화련의 억지에 따라준 것도 그 모습을 보고서였다. 네임드 몹을 상대하면서  그랬던 적은 없었지만, 저토록 필사적인데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때 타고 갈 폭격기에 문제가 생겨서  지체 됐었거든요. 그 잠깐 동안 마스터가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건물에 깔린 사람들 꺼내주기 시작했었어요.”
“걔도 참 특이해. 어떨 때는 듣기만 해도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그냥 별 생각 없이 여유 있으니까 하신 것 같아요. 그랬으니까 건물 치우고 손 내밀었을  기겁하고 도망간 인간이 셋이나 나왔는데 별 반응 없으셨겠죠.”
“엥? 도망? 민간인이었어?”
“아뇨. 위쪽으로 화살표 두  요. 그거 이등병 아니죠?”
“정확하게는 기억 못하지만 상병인가? 병장인가. 그럴걸.”
“빼도 박도 못하는 군인 맞네요.”


화련은 한탄처럼 한 숨을  내쉬었다. 승하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화낼  했네. 왜 이런  혼자 끌어안고 끙끙 앓았어? 더 묵혔으면 내상에도 영향 갔겠다.”
“뭐 좋은 일이라고. 마스터가 못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고...”
“그래, 아주 이해 안 간다는  아냐. 그런데 말을 해줘야 풀든 말든 할 거 아냐.”
“...미안해요. 나 화난 거 식히기 바빠서.”
“에이, 누가 사과 받겠다고 이러니. 근데 좀 기다려야겠다.”
“네?”
“아마 그 놈들이 곧 찾아올 거야. 음 길어야 한 사흘?”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냥 내 경험인데 걔들이 신병이면 모르겠지만, 짬밥 먹은 것처럼 보이는 놈들이니까...곧 찾아올 거야. 류 현한테.”
“점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조만간 걔들이 사과하러 올 거라고.”
“엥?”


화련은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내었다. 승하는 더 설명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틀 후, 승하의 예언은 이루어졌지만 화련은 그 일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류 현이 ‘구멍’ 넘어온 앞발들을 공격해서 미본토에서 내쫓아버린 천공성이, 화룡 쉰 마리와 함께 롱아일랜드를 박살내면서 뉴욕으로 돌아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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