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화 〉탐식마(貪食魔)
[캬아아!][크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유혈이 하늘을 수놓았다. 화련은 그것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음료수 병을 기울였다.
비리고 찝찔한 피냄새와 이온 음료가 뒤섞이자 입안 상태가 더 끔찍해졌다. 화련은 몇 번 우물거린 후에 퉤하고 내뱉었다. 피는 냄새만 남기고 증발한지 오래라, 이온 음료만 쏟아졌다.
그거라도 넘기고 싶을 정도로 목이 탔지만, 긴장 상태가 조금이라도 풀리면 일어나기 힘들 거라는 걸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퍼질러 앉아있던 화련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뒷머리가 띵하고, 앞머리는 지끈거렸지만 그녀는 쉴 수 없었다. 저 위에서 그가 아직 싸우고 있었으니까.
[캬아아아아!][크에에엑!] 쿵! 서로를 물어뜯는 것처럼 엉켰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다섯 마리 용 중 두 마리가 지상으로 쳐 박혔다. 머리부터 쳐박힌 화룡 두 마리는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피만 흘려대었다.
거의 코앞에 떨어진 수준이었지만 화련은 숨이 끊긴 것만 대충 확인하고 시선을 위로 되돌렸다. 그녀의 시력으로도 안력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류 현이 내뿜고 있는 검은 것들의 기세가.
화련은 입술만 짓씹어 대었다.
‘지금이라도 빠지자고...아냐, 들으실 리가 없지.’
화련은 괜히 주변을 향해서 눈을 흘겨대었다. 꾸물꾸물 화룡의 시신을 향해서 다가오던 병력들이 화련이 흩뿌린 기세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움찔거렸다.
그녀는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에게 심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마스터도 이젠 한계야. 너무 마력 낭비가 심했어.’
류 현의 전투 방식은 효율적인 낭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활용도가 높은 공격용 능력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지만, 류 현의 전투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끔찍할 정도로 낭비가 심한 것이 맞았다.
류 현은 전투 시에 남들이 하는 세부 컨트롤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파쇄권이나, 검은 안개, 최근에 추가된 엘더 리치의 마법 흉내까지. 마력만 왕창 밀어 넣어서 효과를 내는 게 류 현의 방식이었다. 효율만 따져서 재무표를 작성하면 아마 빨간색 일색을 터였다.
승하처럼 류 현의 1/100도 안 되는 마력을 가지고 네임드 몹의 멱을 딸 수 있는 공격력을 가진,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어도 그랬다.
동시에 그게 류 현이 가진 강력함의 근원이기도 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마력통과 그 마력통을 다 비워낼 수 있을 정도로 효율 따위라고 말하는 것 같은, 효과만 보는 공격방식. 그것이 류 현이 괴수와의 격차를 좁히는 방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류 현은 그 공격 방식 때문에 거의 탈진 직전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이곳 우드스탁에 오기 전에 확인했으니 확실했다. 화련은 화룡의 시체 처리에 바로 돌입하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병력들을 보곤 혀를 찼다. 그것을 들었는지 병력들이 후다닥 움직였다.
‘너무 많이 지키려고 했어. 이런 일에서 감정에 휘둘릴 사람이 아닌데 대체 왜...이러고 나서 앓아 누워버리면 결국 똑같아 지는데.’
화련은 스프링필드에서 있었던 혈전을 떠올리고는 주먹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꽉 쥐었다. 그곳의 전투에서 소모가 너무 심각했다.
결과적으로는 그 순간에 하지 않았으면 낼 수 없었을 어마어마한 전과를 내긴 했지만, 그 전과를 내기 위해서 류 현은 그 이상의 소모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 결과물이 저 시인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미약해진 검은 기운이다.
그의 힘은 저지력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는 것에 특화되어 있으니 당연했다. 그 정도로 마력을 흩뿌리고도 아직 뻗어버리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아마 청뢰의 변화가 없었다면, 아무리 그라도 스프링필드에서 뻗었을 것이다.
[끄르르륵-][끼에에엑!] 남은 세 마리 화룡도 버티지 못하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예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놈, 날개가 뜯겨져 나간 놈, 외상은 없는데 몸이 팍 쪼그라든 놈. 죽어가는 꼴도 가지각색이었다.
꾸웅! 시체 수습반이 일제히 나뒹굴었다. 상태가 좋지 못한 화련도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주저앉지 못하고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류 현도 추락을 시작했으니까.
“마스터!”
화련이 반사적으로 외쳤지만 추락은 멈추지 않았다. 화련은 실핏줄이 다 터져나간 눈을 부릅떠 류 현의 모습을 쫓았다. 그녀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토혈과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무시하고 마법을 완성시켰다.
슈슉! 화련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류 현의 조금 아래 공간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0으로 좁힌 류 현을 그녀가 받아내었다. 체격차가 말도 못할 정도였지만, 화련은 안정적으로 그를 받아내었다.
“마스터! 정신 좀 차려봐요! 마스터!”
“다, 다음...”
귀를 바싹 옆에 붙이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 내용이 이렇지 않았다면 화련은 그냥 날숨을 내뱉는 소리로 오인했을 것이다.
그녀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제정신이에요? 지금 이 몸으로 뭘 하겠다고...!”
“아직...할 수 있습니다.”
류 현은 이거 보라는 듯이 팔을 슬쩍 들어 올려, 손아귀를 펴보였다.
치지직! 그의 손아귀에서 불꽃이 확 튀는가 싶더니, 푸른 번개 세 가닥이 그 안에서 뛰놀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에서 얻은 유일한 성과인 청뢰의 해방 상태였다.
류 현은 아직 마력이 남아있음을 어필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역효과만 났다.
“마력은 남아있는데 재생력이 발동 안 될 정도로 몸이 축났다는 거잖아요. 절대 안 돼요! 이 상태에서 움직이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래요 대체!”
“...지금 안 움직이면...피해가...”
“그 피해 막겠다고 이렇게 까지 했으면 아무도 불평 못할 거에요. 아니, 불평하면 뭐 어쩔 건데. 제발 좀. 네?”
“......”
화련은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그를 보고 강렬한 의구심에 휩싸였다.
‘미국이 아무리 전생에 아군이었다지만...이렇게 무리할 건 아니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는 그 질문을 입밖으로 낼 수 없었고, 그 대신 그를 설득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이미 핑계도 만들어 두었다. 류 현이 알면 화내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웨인 크로이츠나 그 개망나니, 승하언니랑 희란이 둘 씩 묶어서 마스터가 짚었던 곳으로 보냈어요. 아직 통신은 안 왔지만, 그 넷이라면 충분히 수습 가능해요. 마스터가 거의 다 틀어막았잖아요. 미군도 있고.”
그 정도도 못 막으면 망해버리라지. 꽤나 흥분 상태였기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류 현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 화룡 200여기 중 거의80프로에 이르는 156마리를 떨어뜨렸다. 화련의 백업 없이 거의 혼자서.
화련의 주장대로 그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화낼 수 있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류 현은 그 말보단 그 앞에 온 말에 더 집중했다. 머리에 뭘 괴어주기만 하면 그대로 못 일어날 것 같던 그의 눈이 빛을 되찾았다.
“설마...하셨습니까?”
화련은 자괴감과 약간의 분노, 미안함, 걱정스러움이 뒤섞인 그의 표정을 보고 미안함과 동시에 약간의 기쁨을 느꼈지만 그것을 티낼 수는 없었다.
“네, 썼어요. 텔레포트. 가까운 거리라서 별 무리는...”
“화련 씨!”
“아, 진짜...그렇게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나만 손을 놓고 있어요!”
“손 놓고 있으셨던 게 아니잖습니까. 분명히 개전 때 벽을 둘러친 게 화련 씨의 역할이었습니다. 그 이상은 해서는 안 됐고요. 제가 그 때 그렇게 오더를 내렸지 않습니까.”
그랬다. 화련은 류 현의 오더에 따라 개전과 동시에 가장 큰 부담을 떠안았고, 그것으로 역할을 종료해도 될 만한 상태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사방으로 퍼져나갔을 화룡들을 30분 가까이 묶어두고 류 현이 그것들을 도살하도록 무대를 만들어주었으니까. 그녀가 아니었다면 동부가 아니라, 미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훌륭한 오더였고, 훌륭한 역할 수행이었다.
그러나 화련을 전투에 참가시키는 게 내키지 않았던 류 현으로서는 정말 상황의 강요로 인한 결단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 몰래 또 무리를 했다니.
“알아요. 아는데, 마스터가 그 때 저랑 같이 상황을 봤으면 똑같이 하셨을 거에요. 봐요, 제가 지금 마스터가 우려하던 그 상태인 것 같아요?”
아니었다. 류 현이 보기에도 화련은 꽤 심하게 소모된 것 같긴 했지만, 내상이 터져서 다시 옴짝달싹 못하는 그런 상태에 몰린 것 같진 않았다. 냉기가 다시 튀어나온 것 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아, 아,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프리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이동했을 때보다 더 멀쩡하다고요. 내상 조금 터진 건 처음 벽 둘러쳤을 때 터진 것 외에는 터지지도 않았어요. 가까운 거리라서 무리 안 왔다니까요.”
“...후우.”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를 뜯어보던 류 현은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별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가 물었다.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맨체스터랑 우스터요. 찍으셨던 곳 중에서 그 두 곳에서 제일 먼저 통신이 들어왔거든요. 사실 확인 끝내자마자 보냈죠.”
“...다음부터는 절대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빠르게 보내신 건 잘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다시는...”
“네네, 알겠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건성으로 대꾸하는 모습이 탐탁찮았지만, 류 현은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 다른 곳으로...”
“절대 안 돼요. 마스터 더 움직이면 누워있는 시간 동안 날 피해랑 오늘 막은 피해랑 비슷해 질 거에요. 나머진 미군들이랑 네 사람한테 맡겨요.”
“그런데 희란 씨는 안 그래도 이전에 쌓인 피로도가 너무 높아서...”
“걔가 마스터 같은 줄 아세요? 그리고 승하 언니도 붙어있으니까 알아서 빠질 때 빠질 거에요. 그 언니 대책 없는 무대포 같아도 옆에 지켜야 하는 사람 있으면 이거저거 잘 재니까.”
류 현이 제 말대로 해줄 것 같이 굴자 화련은 그제야 천천히 고도를 낮추어갔다. 지상에서 약 5미터 높이까지 낮아지자, 화련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화련이 땅에 내려앉은 생각을 않자 류 현이 물었다.
“피로하실 텐데 왜...?”
“...지금은 이러고 싶어서요.”
류 현의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지만, 내려가자고 우기진 않았다. 화련의 말대로 그는 너무 지쳐서 지금 잠들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 류 현은 화련이 아래에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병력들을 화련이 흘겨보는 것도, 두려움에 찬 시선을 보내던 이들이 그녀의 시선을 받고 불침 맞은 것처럼 달아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