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화 〉탐식마(貪食魔)
“막아아아아!!!”
토혈 할 정도로 마력을 담아서 외친 소리가 도시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류 현은 그것으로 일체의 계산을 그만 두었다. 망설임마저 소리를 내지르면서 같이 토해내었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후르르! 회색 오러와 검은 안개가 솟구치며 벽이 되었다. 흰자위와 서로 색을 뒤바꾼 류 현의 눈동자가 허연빛을 내뿜었다.
“화련 씨!”
“네에, 네엣!”
“벽을! 성 주변을 둘러싸는 가능한 한 넓고 튼튼한 벽을!”
방금 전만해도 화련의 상태를 수시로 살피던 그는 더는 없었다. 화련이 한 번 이상 움직이기 힘든 지금 같은 상태라면, 지금이 그 효율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끝난 그였다. 이번 전투에서 화련이 이 이상으로 움직일 일은 없을 것이다.
전부 자신이 감당해낼 생각이니까. 쏟아져 나오는 화룡들도, 저 ‘구멍’에서 뻗어 나온 팔도.
새하얀 빛으로 백열하는 눈동자와 달리 류 현의 몸 주변에선 검은 안개와 함께 진득한 투기가 흘러나왔다. 뒤편의 일행들이 놀라서 움찔할 정도의 짙은 투기였다.
우웅! 화련의 마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자 류 현은 오른팔과 연결된 채찍마저 거두고, 검은 기운을 날개 죽지로 돌렸다.
그의 인도를 따라 움직인 검은 기운은 양쪽 날개 죽지 부근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밖으로 돋아나왔다. 그가 양팔을 벌린 정도의 길이가 되자, 중간 지점에서 한 줄기, 그 줄기에서 또 한 줄기가 뻗어 나왔다.
가장 큰 줄기의 성장이 멈추었을 때, 그건 날개보다는 나무뿌리에 가까운 형상을 띠게 되었다. 깃털도, 근육도, 피막도 없었기에 앙상해보기이기까지 한 한 쌍의 날개는 겉보기와 달리 류 현의 의지대로 아주 잘 움직여주었다.
그는 그대로 검은 안개를 끌어올려 이전에 했던 것처럼 갑옷처럼 둘렀다. 그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곳이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두어 번 날개와 안개로 짠 갑옷을 움직여 본 류 현은 쏟아져 내려오는 화룡들을 한 번 힐끔 보고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화룡입니다. 뇌를 파괴한 후에 목줄기가 끝나는 부분에 있는 심장을 꼭 부수셔야 합니다.”
용잡이 팀원 외에도 두 명이 이 자리에 있었지만 류 현은 그냥 정보를 풀었다. 현 시점에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정보를.
웨인과 지벡이 의심할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둘이 의심의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류 현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곳에 포진한 미군들은 다 죽을 것이다. 처음부터 도망가게 했어도 3할이나 살까말까 한 상황에서 막으라고 난리를 쳐댔으니, 따르지 않고 도망가는 이들도 살 가능성은 0에 수렴할 터.
단지 그들이 죽기까지 걸리는 시간인 10여초를 벌기 위해 강요한, 개죽음에 가까웠지만 류 현은 그것을 진짜 개죽음으로 만들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는 그 10여초들을 한계까지 쥐어짤 생각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화룡의 무리를 바라봤다. 어떤 수를 써도 지금 저 많은 수를 다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 중 1/5만 날 수 있는 상태로 도망쳐도 동부는 쑥대밭이 될 터다.
시간을 투자하면 잡을 수야 있겠지만, 그 때쯤이면 도시는 무사한 곳을 찾는 게 더 빠른 꼴이 되었을 것이니 결국에는 패배한 것과 진배없었다. 괴수와 달리 인간은 문명이 쌓아올려 놓은 인프라 없이는 그냥 사는 것조차 힘드니까.
물론 그는 순순히 이번 패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너희가 이겼다만 너희도 웃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끼기긱- 키기기! 말라비틀어진 나무뿌리 같은 날개가 이번에는 단순 시범 작동이 아닌, 본격적인 용틀임을 했다.
그 볼품없는 외견과 달리, 본격적으로 그 힘을 뿜어내는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마나가 들썩거렸다. 본의 아니게 무리하고 있는 그녀에게도 영향을 끼쳤는지, 뒤편의 화련에게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서운 것 없이 쏟아져 내려와 이젠 눈 좋은 일반인의 시력으로도 입을 벌렸는지, 닫았는지 알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 화룡 무리마저 움찔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 멈칫한 틈을 놓칠 류 현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그는 쏜살이 되었다.
후웅! 갈가리 찢긴 날개를 편 검은 짐승은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두 번 펄럭일 필요도 없었다.
키이이! 키아아아! 순식간에 검은 살(矢)에서, 검은 유성으로, 유성에서 검은 섬광으로 화한 류 현은 붉은 용의 무리를 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
“젠장, 젠장, 젠장! 빌어먹으으을!”
조나단 베이커는 정신없이 달렸다. 눈앞을 쏟아졌다가 증발하길 반복하는 피가 끊임없이 가렸고, 허벅지에 난 손가락 두 개짜리 구멍이 도려내지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달렸다.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죽음이 그를 따라잡을 것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캬아아아!] 갑자기 앞이 막혔다. 화룡이었다. 그야말로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조나단이 전진 루트에 떡하고 내려앉은 화룡은 뱃가죽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지만, 그보다 더 상태가 좋지 못한 조나단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만전의 상태였더라도 혼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조나단은 한 순간에 열다섯 명의 중대 동료들을 잃으면서 수차례 확인하고 난 뒤였다. 저도 모르게 멈춰 설 정도로 조나단은 암담해졌다.
“크으으...”
쿵쿵! 뒤쪽에서도 조나단의 소대 동료의 반을 삼켜버린 괴물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신이 있다면 오늘 이곳을 조나단의 묏자리를 이곳으로 낙점한 것이 분명했다.
조나단은 이를 악물고 날 부분이 다 뭉개진 도끼창을 들어올렸다. 보급품 관리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던전부에서 오늘 점호 때 나눠준 도끼창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꼴이 된 상태였다.
그래도 남은 건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면 충분했다. 곧 죽을 놈이 끝내주는 무기가 왜 필요하겠는가? 조나단은 죽음을 각오했다.
간헐적으로 날숨에 섞여 흘러나오는 흐느낌은 그의 각오의 약함의 증거가 아닌, 분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이 순간에 저 대신 먼저 죽어나간 소대원들과 던전부에 들어온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분노했다. 던전부에 속한 이래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나날이 없었지만, 이 같이 무력한 죽음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스프링필드에 출현한 놈들 중 이곳으로 온 건 반도 안 된다고 했었지...’
스프링필드에 안착한 천공성과 그 위에 뚫린 ‘구멍’에서 신종 용종괴수가 쏟아져 나왔다는 통신을 받은 게 두 시간 전이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지 하나같이 많이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말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그곳의 관측병이 잘 못 본 게 아니라면 개 중 절반 이상이 스프링필드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머지가 또 뿔뿔이 흩어져서 이곳 맨체스터까지 날아온 놈들이 열이 조금 넘었다.
그럼에도 맨체스터에 주둔 중이었던 플레이어 2개 대대가 박살나는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과반수를 잡아 죽이긴 했지만, 끔찍한 패전임은 변하지 않았다.
이 전과를 류 현이 알았다면 과연 미국이라고 박수라도 보냈겠지만, 조나단이 그걸 알 도리는 없었다.
그는 정말 만일을 대비해서 배치되었던 부대라 숫자가 적어서 그랬다는 식의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놈들의 본대가 쏟아져 나온 스프링필드에는 플레이어가 스물도 되지 않았으니까.
직접 전투에 참가한 이들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듣기로는 용잡이 팀을 제외한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수발들라고 붙인 거니까.
그럼 이곳에 있는 이들의 1/20도 안 되는 인원으로 반수 이상을 막았다는 말이 되었다. 지금까지 괴수가 충원되지 않는 걸 보면, 지금도 막고 있거나 대부분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는 의미였다.
조나단은 그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자신의 나약함에. 동료를 지키지 못하고, 의무를 다 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죽어갈 자신의 나약함에 분노를 느꼈다.
분노는 가물가물해져가는 그의 정신을 다시 세워주었다. 도끼창 위로 푸른 마력이 넘실거렸다.
“한 놈은 머리통이든 염통이든 부수고 만다...”
빠드득! 조나단은 뒤에서 다가오는 지룡의 땅울림을 무시하고 뱃가죽이 다 뚫린 화룡을 노려보았다. 강함으로 따지면 뒤에서 다가오는 지룡에 비할 수 없겠지만, 놈은 크나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단숨에 쳐 죽이진 못해도, 머리통을 날리거나 심장을 부수는 것 정도는 노려볼 만했다.
아니, 그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지금도 피와 함께 의식이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조나단은 더 이상 긴장을 유지할 수 없어졌을 때 땅을 박찼다.
콰직! 화룡의 배 위로 몸을 날리려던 조나단은 파육음에 멈춰 서려다가 역동작이 걸려서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부상을 입은 오른쪽 허벅지가 찢어지는 듯 했다.
조나단은 욕지기를 삼키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화룡이, 여태껏 상대해 본 용종괴수 중에서 가장 악마 같은 놈이 머리통을 잃은 채 쓰러지고 있었다.
머리통을 잃은 놈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는 인영을 확인한 조나단의 눈이 부릅떠졌다.
“웨펀...”
[캬아아아!] 콰르르! 조나단이 그를 부르려는 찰나 그를 추적해 오고 있던 지룡이 5층 상가 둘을 박살내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놈은 긁힌 자국 몇 곳 빼면 아주 멀쩡했다. 화룡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고 있던 대대를, 지면 아래에서 습격해온 지룡이 대대를 일방적으로 유린했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조나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이제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허벅지를 쥐어박아가며 몸을 일으켰다. 저 빌어 쳐 먹을 놈의 습격에 소대 동료의 반이 당했다. 놈의 눈알 하나라도 취하지 않으면 죽어도 죽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웨인이 그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중력을 잊은 것처럼 아주 가볍게 날아올라 지룡의 화살표 모양 대가리에 사뿐히 착지하고는,
콰직! [케에에엑!] 우지직! [캬아아아!] 제 몸통만한 머리통을 가진 슬레지해머로 못질하는 것처럼 미간 부분을 후려쳤다.
화룡의 머리통을 박살낸 이의 공격 앞에 지룡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뒤채고, 창 같은 앞발로 웨인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웨인의 망치질에 앞발마저 박살나야만 했다.
그의 몸 위로 타오르고 있는 회색빛 오러는 그의 공격 한 번 한 번에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후폭풍을 밀어넣었다.
조나단은 해머 하나로 30미터가 넘는 대형 괴수를 찌그러뜨리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놈이 발광해대는 통에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쿠웅! 해머가 스무 번이 휘둘러지기도 전에 지룡이 몸뚱이를 땅에 뉘였다. 아직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닌지, 꿈틀거리긴 했지만 머리의 반이 터져나가서 골수가 찔찔 흐르는 상태였다.
조나단은 지면에 사뿐히 착지해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웨인 크로이츠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쳤다.
‘같은 인간이...맞는 건가?’
유럽의 최강자인 그의 무용은 듣기 싫다고 안 들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 정도로 유명했지만, 이제 헌팅 레벨 200대에 진입한 조나단은 현실을 알았다.
플레이어는 주먹질 몇 방에 적을 분쇄하는 슈퍼맨이 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그 사실을 되새기면서 일을 해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방금 전 펼쳐진 일방적인 살육은 조나단이 알게 된 현실이 우물 안 개구리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장면에 압도되어, 조나단은 웨펀마스터가 두 시간 전, 화룡이 쏟아져 나온 스프링필드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조나단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허벅지 부상 부위에서 격렬한 통증이 오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조나단은 자신의 코앞까지 걸어온 괴물을 바라봤다. 괴물은 몰골이 아주 험악했지만, 미소만큼은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괴물이 아주 친절한 어조로 물어왔다.
“일어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합니다.”
조나단은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