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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화 〉탐식마(貪食魔) (321/429)



〈 321화 〉탐식마(貪食魔)

“젠장 죽겠네.”

지벡 건터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일반인들이 보면 마임이라도 하는 것인가 했을 테지만, 그는 지금 총 수물  가지 마법을 운용하는 외줄 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다수의 마법 융합이 그의 특기라지만, 전에 비슷한 도전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지벡은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미국을 탈출할 때도 이 정도로 많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한 적은 없었다.  때였다면 스무 가지를 채우기도 전에 반발력을 감당 못해서 몸이 터져죽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지벡 건터는 지금 뇌혈관이 끊어질 것 같은 과부하를 견뎌가면서 마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물은 지벡의 앞에 놓은 탁자 위로 떠오른 상태였다.

홀로그램 영사기가 없음에도, 거울 같은 판이 떠올라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지벡은 끙끙 앓는 소리를 삼키며 옆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의 왼쪽에는 미합중국의 부통령, 제프 리어던이 앉아있었다. 전대 정권에게 호되게 부려 먹히기만 하다가 망명을 빙자한 탈옥을 감행한 지벡으로서는 처음 대면하는 이였다.


‘전에도 듣긴 했지만 진짜 특이한 인간이네.’

그리고 지벡이 보기엔 그가 처음 보는 제대로 된 권력자 같기도 했다.


보통 높으신 분들은 플레이어의 마법 앞에 노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라가 주술사나 리치가 다루는 저주처럼 무형무색의 살상 마법을 재현한 마법사는 없어도, 기본적으로 마법은 통상의 경호 방법이 통하지 않는 이형의 힘 아닌가?

요즘 세상에 플레이어 경호를 두지 않은 권력자가 없다지만, 권력자들은 특히 마법사의 마법에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수를 숨기는 걸 마법사 보다  잘하는 인종은 없었으니까.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성장하는 게 쉽지 않은 대신, 이들은 제 전력을 숨기는  아주 쉬웠다. 마법 하나를 감춰두고 사람 죽일 때만 쓴다면 뒤처리를 내팽개치지 않는 이상 추적하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정부가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숨기고 억압하던 그 시절, 지벡은 유독 엄중한 감시에 시달렸다.

그런데 제프 리어던은 그런 당연한 경계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온전히 화면에 집중한 상태였다. 경호랍시고 대동한 호지슨 버넷과 그의 부하 넷은 소파 뒤에 시립해 있을 뿐이었다.
지벡 건터라는 인간이 어떻게 미국에서 탈출해서 유럽으로 갔는지 모를 리가 없는데, 의례적인 경계조차 없었다.

‘이 인간을 믿고 이러는 건가?’

지벡은 살짝 눈알을 굴려 오른편에 앉아있는 류 현을 바라봤다. 그는 말을 걸기 어려운 심각한 표정이었다. 온전히 화면에 집중한 게 보이는 그 모습은 그런 근거가 되기 힘들어보였다.
아무리 자신이 이 팀에 묶인 사람처럼 행동했다지만, 사람이란 제 안위에 관련된 일에는 이성적이기 힘든  아닌가.

‘쯧,  코가 석자다. 집중하자.’

지벡은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화면에 비치는 흐릿한 광경이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의 전경이 시야에 가득 찼다.
가득 찼다곤 해도 시커먼 어둠이 대부분이라, 볼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저 멀리서부터 폭발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퍼엉! 퍼엉! 츠츠츠- 노이즈가 잔뜩 끼긴 했지만 폭발음은 그것을 삼킬 정도로 컸다. 갑자기 불이 나간 건물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듯하다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지는 기현상이 반복되었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이었으나, 방안의 누구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벡은 천천히 시야를 전진시켰다. 폭발음이 터져 나오는 현장 방향으로.
그러자 노이즈도 점점 커져갔다. 지벡은 손을 내저으며 노이즈를 천천히 줄여갔다. 현장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노이즈도 점점 늘었기 때문에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어버렸지만.

순조롭게 전진하던 화면  시야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시야를 멈춘 지벡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네 댓 번 그것을 반복하고는 전진을 재개했다.

그러나,


파츳! 그런 노력이 허망하게도  걸음을 더 접근시키자 화면이 꺼질 것처럼, 화면이 꺼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판이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모두가 지벡을 돌아봤다.


“염...병...!”

지벡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마구 내저었다. 발작이라도 온 것처럼 마구 떨리는 두  때문에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 모습과는 반대로 화면은  안정을 되찾았다.

“후...”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지벡이 한 숨을 돌렸다. 그는 땀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하고 천천히 전진을 재개했다.
화면이 눈에 띄게 출렁거리고, 노이즈가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커지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지벡은 처음보다는 의연하게 대응했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전진속도였지만, 끊임없이 전진을 거듭한 끝에 결국 도달하고 말았다.
하얀 드레스차림의 여인이 천공성과 대면하고 있는 그곳에.


“저게...”
“비아트릭스...”


주변에서 한 숨과 같은 말과  숨,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지벡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존재를 숨기는데 성공한 천리안 마법이 마구 흔들리는 중이었으니까. 삐끗하기만 해도  네임드 몹에게 발각되고, 매개체인 눈알이 파괴되기 전에 마법이 깨질 것만 같았다.

‘이런 미친...’


직접 보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 까마득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왼쪽에 앉은 미 부통령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놀란  했지만.


“정말로...저런 인간형 괴수가 있었군.”


리치의 뼈 밖에 없는 몸뚱이의 골격은 인간과 거의 판박이지만, 언데드 라는 점이 그 점을 가렸다.
류 현이 상대했던 ‘페릭스’는 그 존재 자체가 아는 이가 드문, 기밀 아닌 기밀이었다.
칼리프 클랜의 고위 관계자들은 영상을 통해서 다 한 번씩 봤겠지만, 그 영상이 밖으로 나도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기밀 아닌 기밀이 되었다.


그러니 저렇게 살점이 붙어있고, 살아 움직이는 인간형 괴수는 처음 공개된 것이 맞긴 했다. 부통령의 눈에는 머리 위에 박힌 ‘해왕 비아트릭스’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을 테니, 그 부분이 집중하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찬사를 내뱉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외형을 가지고 있으니, 충격은 배일 터.
류 현이 슬쩍 첨언했다.

“저렇게 보여도 하는 짓은 여느 괴수와 별 다를 게 없습니다.”

제프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은 더는 뭐라고 하지 않고 화면에 집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에서 미성이 터져 나왔다.

[언제 이곳으로 왔지?]


노이즈 속에서도 무서울 정도의 미성임을 알아챌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더 섬뜩했다.

[나와...하네. 거짓말은...이 정도는 이해...나는....네 존재...느끼지 못...진위...의심...]
[......성...통째로...상황이 좋은...아니라...이 상황...알고...]

불행히도 첫 문장을 온전히 전달하고 나서, 지벡의 마법은 비아트릭스가 입을 열 때마다 심하게 흔들렸다.
그에게 타박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정도의 지식들은 있기에 불평은 터져 나오진 않았지만, 답답한 건 답답한 것이었다.
특히  현은 아예 노이즈가 한 문장을 전부 집어삼킨 것 같을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젠장 제대로 들리는 게 없군.’

사전 준비도 없이, 근처 전자기기를 망가뜨리는 오러를 뿌리고 다니는 놈을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칭찬받아야할 위업이었지만, 아쉬운  아쉬운 것이었다.
전생의 화룡 때문에 천공성이 더 신경 쓰이는 류 현은 그것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말하는 텀이나 어조를 보면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맞는데...젠장, 한 쪽이 텔레파시를 쓸 줄이야. 정보가 필요한데...’

류 현이 아쉬움을 곱씹는 와중에도 화면 속의 비아트릭스는 끊임없이 입을 놀리고 있었다. 노이즈가  모든 말을 집어삼켰기에 그들은 전혀 듣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에 한 마디 해보려던 찰나였다.


심하게 떨리던 화면이 일순간 말끔해지더니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충동이 들진 않나?]
[이곳의 인간을 죽이라는 충동. 나야 일부러 인간들이 없는 곳으로  있었지만, 너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성만 움직이는 거라 상관없는 건가?]

그 말을 듣고 모두가 흠칫했다. 극도의 집중상태였던 지벡마저 놀라 마법이 거의 깨지기 직전까지  정도였다.
지벡은 허겁지겁 마법을 수습하고는  현의 눈치를 살폈지만,  현은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았다.

지벡은 수습을 끝내마자 요동치는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안 될  없지. 난 당분간 저 쪽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 정리 대충 끝나고 나면 찾아와.]

정리를 하자마자 노이즈도 거의 끼지 않은 상태로 이런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염병!’

지벡의 심리 상태를 대변해주는 것처럼 노이즈가 다시 잔뜩 끼기 시작했다. 화면마저 일그러졌고, 지벡이 복구를 끝마쳤을 때는 대화가 끝난 것인지 비아트릭스가 몸을 돌려 휘적휘적 떠나가는 장면이 잡혔다.
지벡은 비아트릭스의 모습이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잡고 있다가, 밖으로 사라지자 그대로 뻗어버렸다.
이젠 때려죽인다고 해도   할 기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기절해가는 와중 지벡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후견인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7함대 지금 움직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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