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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0화 〉탐식마(貪食魔) (320/429)



〈 320화 〉탐식마(貪食魔)

치지직! 퍼엉! 화르르! 비아트릭스의 갑작스럽게 강제로 작동이 정지된 기기들 때문에 도시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렇다고 스프링필드가 불바다가 된 것은 아니었다. 브라질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장으로 일어났던 불길들은,


츠츠츠- 그녀의 주변에 내려앉은 냉기로 인해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그라졌다. 비아트릭스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쩌저적- 그녀가 내딛는 걸음걸음 하얀 융단이 내려앉았다. 비아트릭스는 그 위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비아트릭스가 멈춰선 것은 천공성 바로 아래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용의 눈을 열어젖힌 채 말을 걸었다. 천공성을 향해서.


[언제 이곳으로 왔지?]
[나와 비슷하네. 거짓말은 아니겠지?  정도는 이해해줬으면 하는데. 나는 그 동안 네 존재를 느끼지 못했었어. 그러니  말의 진위부터 의심할 수밖에.]
[너도? 그래도 나보단 빠르군. 이렇게 성까지 통째로 들고 온 걸 보면 네가 나보단 상황이 좋은 것 같네. 그게 아니라면 네가 이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다거나.]


높낮이 없는 어조는 여전했지만, 그녀의 물음에는 서릿발 같은 살의가 어려 있었다. 그녀로서는 약간의 짜증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플레이어들 일어서지 못할 정도였다.

비아트릭스는 혼자서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공성을 매개로 어떤 존재와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화련이 예견한 ‘구멍’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비아트릭스가 아는 한 유일한 동향의 존재였다.


그녀의 대화 상대가 이 정도로 주눅 들지 않을 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육성의 형태가 아니라, 머릿속에 바로 대답하는 식으로.
굳이 육성으로 대화를 하는 비아트릭스가 동급의 존재들 중에서는 특이한 것이었고, 이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은 내 의지로 끌고  것이 아니다. 그대도 느꼈을 텐데. 우리의 육신으로도 이 세계가 가하는 압력을 온전히  버텨낼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아무리 원한다 한들, 또 일부라고 한들 내 의지만으로 이리 멀쩡하게 성을 가져올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무슨 차이지? 나는 아무것도 같이 넘어오지 못했어. 네가 온전한 용이기 때문인가?]
(그 반대는 성립할 수 있겠군. 비아트릭스. 그것이 그대의 이름이었나. 아직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존재감이 달라졌군.)

비아트릭스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통해 감정적인 동요를 내보였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오랜 시간 끝에 찾은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지만, 처음 불리는 상대가  때 서로 목숨을 주고받을 뻔한 존재이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상처가 깊기도 깊은 모양이로군. 그 정도로 격이 올랐음에도 내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할 줄이야.)

비아트릭스는  쪽 발을 뒤로 빼고는 말없이 천공성 위쪽을 노려봤다. 주변의 마나가 떨리며 으르렁거렸다. 주변 건물들의 유리창이 당장이라도 깨져나갈 것처럼 요란하게 흔들렸다.


[허튼 수작을 부릴 거면   더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감각이 대부분 닫혔다고 힘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오히려 불어났다.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감각이 대부분 닫혔다고 할 정도로 무뎌지게 만든 상처를 입었음에도, 내부에 자리 잡은 힘은 오히려  커진 상태였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상황이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 뭘 어쩌겠는가?
거기에 이름을 찾게 되어 자체적으로 전투력 상승까지 있었다.

(그래 보이는군. 만전의 내가 그대가 안은 약점을 후벼 파도 쉽사리 승리를 점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바다에 빠진 채로 싸우는 게 낫겠군.)


비아트릭스의 미간이 펴졌다. 그녀의 얼굴에 짜증 대신 의아함이 어렸다. 대화의 상대는 이런 소리를 할 이가 아니었다.
세상을 끝을 아는  마냥 오만하고, 그 오만함을 받쳐줄 강대함마저 가진 존재. 그녀에게 첫 패배와 함께 죽음이라는 끝을 선사할 뻔한 자였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만 두고 한 분석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패배를 점친 것을 머릿속 밖으로  이가 아니었다.

(놀란 표정도 나쁘진 않지만 순수하게 즐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아쉽군.)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겠군. 정신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  경우에는 치료됐다고 하는 게 맞나?]
(그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둘  아니야. 내 상태가 그대, 비아트릭스 보다 좋지 못할 뿐.)
[...얼마나?]
(지금의 나는 넘어오지 않는  아니라, 넘어오지 못하고 있지. 준비가  갖춰져, 이곳으로 완전히 넘어오더라도 글쎄...운이 나쁘면 5할. 운이 좋으면 최대 8할 정도겠군.  이상은 힘들어 보여. 실질적으로는 최대 7할 정도로 보고 있지.)
[성을 가지고 넘어온 대가인가?]
(글쎄, 그리 물어도 내가 행한 일이 아니라 대답해주기가 힘들군.  생각에는 앞뒤가 바뀐 것 같지만 말이지.)
[성을 매개체로 삼아서 너를 이곳으로 불려 들였다고? 그렇다면 나는 왜?]
(그 또한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가진 힘은 몰라도 용으로서 격은 이름을 찾지 못한 그대보다 내가 높았을 터인데, 차원이동 후 받는 패널티는 내가 더 크다니 이해할  없는 노릇이지.)

비아트릭스는 불쾌감을 표하지 않고 그 말을 곱씹었다. 틀린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비의 분노로 이름이 묶인 거나 다름없었던 그녀는, 강대함으로는 동족  최고 수준이었을 지라도 격은 그리 높지 못했다.

[결국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로군.]
(이곳으로 넘어오는 과정의 기억이 묶인 것만 봐도 당장 해결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 아니면, 그대는 기억하고 있나?)


비아트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넘어올 때 상황을 기억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곳으로 넘어오고 나서 한 일주일간은 기억이 흐릿해. 그 이전도 흐릿하고.]
(그 부분은 내가 조금 더 낫군. 하지만 그리 큰 의미는 없는 수준이다. 차라리 극단적으로 한 쪽은 기억, 한 쪽은 몸뚱이를 온존하는 게  나았겠군.)
[그랬다면 네가 이렇게 대화에 응하지도 않았겠지.]

부정 해봐야 별 의미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부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비아트릭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충동이 들진 않나?]
(충동?)
[이곳의 인간을 죽이라는 충동. 나야 일부러 인간들이 없는 곳으로  있었지만, 너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성만 움직이는 거라 상관없는 건가?]
(그 얘기였나. 든다. 인간들을 성의 시야로 포착할 때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충동이 일어나더군.)
[역시 그런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나쁠 것도 없지.)
[뭐?]


비아트릭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마음의 소리에서 꽤나 즐거워하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오만한 존재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을 즐거워하는 게 이상한 존재였다.

(아직 이곳의 인간을 죽이지 않은 것인가? 그냥 견딘다고 견딜 수 있는 충동이 아니었는데.)
[아니, 죽였지. 나도 처음에는 인간들이 사는 군락  가운데 떨어져서 참고 말고 할 게 없었어.]
(그럼 그 달성감도 느꼈겠군. 그렇지 않나?)
[...그래.]

인간을 죽이라는 충동이 느껴질 때보다는 약한 강도였지만, 무시하기 힘든 달성감을 느끼긴 했었다.
그래서 도망치듯이 인간들의 마을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정말 믿을 수는 없지만, 용인 자신의 정신을 주무를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으며, 그 초월자라고 불러도 부족함 없는 존재가 그녀가 인간을 죽이도록 정신에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으니까.

비아트릭스는 지금 자신과 대화하고 있는 존재의 정체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녀가 아는 이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지금 같은 상황에 경악한다면, 그는 화를 내어야할 이였다.
자신이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이 특유의 음색과 천공성에서 느껴지는 마력 파장이 그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나쁠  없지 않은가. 어차피 치워야할 인간이다.)
[그건...그렇지.]
(하긴 그대는 예전부터 인간들을 귀애하는 편이었지. 전혀 다른 세상에 와서도 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지만...영 내키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해  수도 있다.)
[대신?]
(고향에서 지낸 것처럼 지내자는 이야기다. 물론 인간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인 후에. 그대에게 바다의 반을 넘기지.)
[반?]
(전부 주기에는 이 곳은 육지가 너무 적어서 말이다. 심지어 토양에도 마나가 거의 섞여있지 않더군. 그대가 내 존재를 늦게 눈치   아마  탓도 있을 터.)
[정말 적긴 하더군. 공기 중에는 이상할 정도로 많이 퍼져있는데. 지력을 빌려서 마법을 쓰는 것도 힘들 정도였어.]
(그나마 인간의 혈육이 꽤 많이 함유하고 있더군. 일일이 잡아서 마력을 빼내기에는 효율이 너무 좋지 않아 포기해야 했지만 말이야.)
[네가 쓰기엔 좋은 방법이 아니긴 하지.]
(그래서 다 줄  없다는 거다. 이곳의 인간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위협거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이런 메마른 곳에서는 수급처가 필요한 법이니. 대기 중에 흩어진 것도 상당하긴 하지만, 건드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좋을 대로 해. 알아서 청소까지 해준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말하는 것과 다르게 비아트릭스는 저 계획에 반대하고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이 자리를 뜨고 싶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비아트릭스, 대신이라고 하진 않겠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주지 않겠나? 내 상태가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 그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오는데 조금 부담이 되는군. 적어도 내가 다 넘어올 때까지 만이라도.)
[안  건 없지. 난 당분간 저 쪽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 정리 대충 끝나고 나면 찾아와.]


말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꺼림칙한 의구심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지.)


비아트릭스는 대답을 듣자마자 몸을 돌려 이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칫하더니 슬쩍 뒤돌아 보며 말했다.

[아, 얼마 전에 인간 무리가 나를 추적해 온 적이 있어. 알아둬.]

그 잠깐이 거의 8주는 되어가는 일이라는 것은 그녀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만년을 살았으니, 8주나 8일이나 얼마전인건 마찬가지였다.

(추적? 그대를?)
[흔적을 지우지 않고 꽤 강한 연결을 남겨두었더니 그걸 더듬어서 찾아왔던데, 잡을까 말까 하는 새에 도망갔어.]
(어지간히도 정신없었나 보군.)
[그런 거면 굳이 언급도  했겠지.  중에 마신의 사도가 하나 있었어. 그래서 도망칠 수 있었지.]
(...놀랍군. 이런 낙후된 세계에 그의 사도가 있다고? 생텀을 보았나?)
[아니, 그놈을 직접 봤을 때도 그런 냄새는  났어. 너무 금방 도망쳐서 알아볼 새도 없었고. 그냥 좀 주의하라고  꺼낸 거다.]
(하핫, 그대도 이 세계에 떨어진 게 어지간히 충격인가보군. 생텀도 운영 못할 정도로 낙후된 세계에 그의 사도가 있다는  놀랍지만, 우리에게 위협이 될 리가 없잖은가? 이미 죽은 마신의 사도니 권능이나 유지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어쨌거나 나는 전달했다. 나중에 보지.]

비아트릭스는 더는 돌아보지 않고 스프링필드를 떠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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