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탐식마(貪食魔)
워싱턴 주, 백악관.
“대피 현황은 어떤가?”
“코네티컷, 메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 주는 주도를 제외한 도시 내의 대피가 72프로 진행된 상황입니다. 주도에 아직 남은 인원들 중에서는 도시와 함께 하겠다는 인원이 많아서 통제가 어렵다는 보고입니다.”
“정말 도시와 같이 죽으려는 이들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 내 욕심이겠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각하. 좀 이르게 흥을 낸 친구들이 제법 많이 잡혔습니다. 이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교도소 허가를 엄청 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태가 진정된다면 말이지.”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재난을 피하기 위한 대규모 피난은 필연적으로 범죄 발생률이 증가를 부른다. 특히 절도나 폭행, 강간 같은 성범죄는.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미합중국의 대통령, 제럴드 던컨은 넥타이를 끄르며 기나긴 날숨을 내쉬었다. 아직 국방부 장관과 던전부 장관, 그들의 참모들이 남아있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플레이어 소집 현황은?”
“62퍼센트 진행된 상태입니다.”
던컨의 왼쪽 자리에 앉아있던 던전부 장관, 대니얼 킴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항상 멀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다니던 그의 얼굴에는 거뭇거뭇한 수염자국과 숨길 길이 없는 초췌함으로 가득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이는 꼽기 어렵겠지만, 가장 심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이는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던컨은 항상 대면할 때마다 자신을 쥐잡듯이 잡던 이가 저리 망가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씁쓸해 하며 물었다.
“진행이 더딘 이유가 따로 있나?”
“서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꽤 공포에 질린 상태입니다. 아예 인접한 중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분위기인데, 애매한 소문만 전달된 탓인지 서부는 그냥 분위기가 끔찍한 정도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당장 서부에서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입니다. 주지사들 중에서 은근슬쩍 병력 파견을 원한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이들도 꽤 됩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국방부 장관이 슬쩍 거들었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정작 박살나고 있는 동부에서 제일 먼 곳이 난리니.”
“정보 통제가 너무 잘 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덕분에 뉴욕의 천공성을 언제부터 인지했는지는 국민들이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만, 그 때문에 천공성에 대한 공포가 대신 퍼지게 된 꼴이죠. 소집령을 받은 서부 플레이어들이 겁을 집어먹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한가롭게 말할 사안이 아닙니다. 부통령 각하. 제기랄,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플레이어들이 소집을 거부하면 우리 병사들의 동요도 억누르기 힘들어 질 겁니다.”
국방부 장관이 두 손으로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득한 피로감과 짜증이 가득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무리 애국심과 투지로 가득 차 있어도 일반 병사들 입장에서는 괴수는 불사신처럼 느껴질 테니. 플레이어들이 소집령을 거부하고 버티면 당연히 장병들 입장에서는 개죽음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법도 하지.”
부통령 제프 리어던은 한가롭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자포자기가 아닌, 현 상황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여유였다.
유감스럽게도 국방부 장관과 던전부 장관은 그런 여유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감싸 쥐는 두 장관을 바라보던 리어던은 던컨을 향해서 말했다.
“각하, 의회에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언질을 줘야할 것 같습니다.”
리어던의 말에 두 장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장관들이 데리고 있던 참모들마저 눈을 퉁방울만 하게 뜨고 부통령과 대통령을 번갈아 봤다.
“으으음...”
“지금이 아니면 기회조차 없을 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하지만 서부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네.”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이지요. 아예 처음부터 미적거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대놓고는 아니어도 소집령에 불응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들을 끌어 모은다고 상황이 급변하진 않겠지만, 지금 열심히 싸우고 있는 장병들과 동부와 중부 플레이어들의 사기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끄으응...”
던컨은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던전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은 앓던 이가 빠졌다는 얼굴로 부통령을 바라봤다. 도무지 쉽게 건드릴 수가 없어서, 혹은 그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속에 묻어둔 말이었다.
이게 다 전대 정권의 멍청한 짓 때문이라고 욕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겼는데, 대통령이 정치적 후계자로 낙점한 이답게 부통령이 그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것이다.
“의회에서도 크게 반발하진 않을 겁니다. 드류 그 친구야 거품을 물겠지만, 다른 하원의원들이 잘 달래줄 겁니다.”
“그 친구가 도끼를 들고 내 집무실로 쳐들어오기 전에 잡을 수 있다면 말이지.”
“드류의 도끼가 두려우십니까?”
“아니, 그럴 리가 있나. 그 친구는 용잡이 팀 얘기만 꺼내면 도끼를 내던지고 집으로 가 버릴 텐데.”
존 드류는 하원의 미친개로 불리며, 용잡이 팀에 의지하는 현 정권을 가장 강도 높게 성토하는 대표주자였다. 천공성이 ‘구멍’을 뚫고 용종 괴수 웨이브가 쏟아지자 그 입을 다물게 되었지만.
“그 용잡이 팀을 위해서라도 빠른 결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각하. 그 친구들은 우리를 배려하느라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던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부 장관은 아예 고개가 떨어질 것처럼 격하게 끄덕거렸다. 제프의 말처럼 용잡이 팀은 지난 닷새간, 움직이기 시작한 천공성의 이동루트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그 무식한 덩치를 한 번에 처리할 방도가 없어, 방어막을 깎아내서 이동을 지체시키고, 천공성이 쏟아낸 용종괴수를 상대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벌써 메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의 코앞에 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피해는 천공성이 흙 같은 것을 빨아들일 때 나오는 피해와 어쩌다 딱 두 마리 놓친 용종 괴수가 낸 피해가 전부.
던전부 장관이 괜히 다 죽어가는 얼굴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방부 장관과 함께 용잡이 팀의 이동 케어와, 그들이 남긴 전투 자료를 끌어 모아서 이후 싸움에 대비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의회 쪽은 천공성이 움직인 첫날에 비해서 굉장히 조용했는데, 가끔 나오는 소리가 왜 저 괴물들을 진작 귀화 못 시켰냐는 불평 정도였다.
일곱. 열 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 최신식 전투기도, 최신식 레일건을 탑재한 함대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으니 당연했다. 심지어 전투 피해마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방법보다 적었다.
지나치게 굽실거린다느니, 너무 자국의 저력을 낮잡아 본다느니 하는 소리는 이미 거의 들어간 상태였지만, 천공성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아주 사라진 상태.
고심을 끝낸 던컨은 쏘아붙이는 것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좋아. 준비를 하도록 하지. 킴, 뷰런. 준비해주게. 그리고 제프 자네는 용잡이 팀에게 가 있게. 킴에게서 플레이어 대대를 인계 받아서 데리고 가도록 하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계엄령 선포 이후에 좀 격한 반응이 나올 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가는 김에 백화련이라는 그 친구의 상태도 살피고 오지요.”
“그래,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군. 그 친구가 팀의 다리인 게 분명한데 그리 앓아 누워있으니...죽을 위기를 넘긴 게 천만 다행이긴 하지만...아쉽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구만.”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요.”
“몸 조심히 다녀오게.”
***
해안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먼 바다의 하늘에는 별이 흐드러지게 떠올라 있었다. 아무리 메마른 이라도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들 그런 광경이었다.
[......]
‘해왕 비아트릭스’는 그 하늘을 보고 벅참 보다는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 같은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별의 형태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바다의 지배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세계의 모든 별 자리를 알았다. 육지에도 돌아다닐 만큼 돌아다녀보았으니, 정말 모든 별자리를 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그녀의 눈으로 살펴도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는 밤하늘은 미미한 불쾌감이나마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이 곳이 원래 살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지 오래더라도, 원래 세계에서 가끔 즐기곤 했던 밤하늘이 다르다는 사실은 미지를 탐구하는 기쁨보다는 불쾌감이 컸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마음에 드는 게 있을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위쪽에 있는 눈도 그렇고.]
비아트릭스는 밤하늘의 별이 아닌, 하늘 위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무기질적인 시선을 느꼈다.
미국이 수많은 것을 포기하고, 캐나다와 함께 비아트릭스의 감시에 붙인 위성들. 그것들을 그녀는 조금 나른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때려 부수고 싶지만, 이 이상한 곳에 떨어지면서 입은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치명상은 아니니 무시하고 진체를 드러내어 부술 수도 있겠지만, 얼마 전에 보았던 인간 무리가 마음에 걸렸다.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공간 마법과 어울리지 않게 그 마법사를 거느린 괴물이.
[어찌 마신의 사도가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일 만년을 넘게 살면서 쌓여온 심원한 지혜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 쉽사리 진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이 이상한 세계에 온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이변이니 다른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녀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시간은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으니까.
상처가 회복되고, 이 이상한 세계에 대한 탐구가 대충 마무리되면 그 신경 쓰이는 괴물을 찢어죽이면 그만이었다.
비아트릭스는 불쾌감을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안정감도 선사하는 밤하늘을 다시 올려다 보려고 했다.
[......?]
그녀의 고개가 훽 돌아가며 시선이 항구 마을 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 보다 더 내륙의 스프링필드를 향했다.
천공성이 막 도착한 그 지점.
[어떻게...? 그가 이곳에 온 거지?]
비아트릭스는 말을 다 내뱉고는 제 몸 상태를 확인하고 흠칫했다. 하얀 백자 같은 피부 아래로 물빛 보석 같은 비늘이 비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전투태세에 들어갔던 것.
태세를 풀자, 부글부글 끓던 바닷물이 가라앉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그녀에게 최초로 패배를 선사할 뻔한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니까.
그것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는 것을.
[다 넘어오지 못한 건가?...설마 자신의 의지로 넘어 오는 거라고?]
비아트릭스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스프링필드 방향을 노려보았다. 물빛 눈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황금빛 용의 눈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비아트릭스는 미끄러지는 것처럼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느릿해 보이는 걸음은 겉보기와는 달리 한 번에 수 미터를 뛰어넘었다.
[그에게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
비아트릭스는 뭍으로 방향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