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탐식마(貪食魔)
-아니, 왜?! 오늘 온다면서!
이렇게 만든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류 현은 땡깡 부리는 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왜 안 오냐, 오기로 하지 않았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보고 썼는데. 라며 쨍알거리는 승하를 보고 있자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못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 또한.
류 현이 그리 생각하거나 말거나 화면 너머의 승하는 할 말이 아주 많은 얼굴로 아까 했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
사실 그렇게만 해도 류 현은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복귀 할 건데 현장 보고서를 보내달라고 잘 못 말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혼자서 출국 전에 사냥 준비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더니 정신이 없어서 한 실수였다.
희란이 도와주려고 하긴 했지만, 그녀는 화련의 간호 때문에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그 도움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한 달 내내 류 현과 함께 밤을 밥 먹듯이 새면서 화련 안에서 날뛰는 냉기를 억누른 백혜라는 말할 것도 없었고.
출국 일자에 치이는 것처럼 준비를 하고, 워싱턴까지 날아왔더니, 육체적 피로보단 정신적인 피로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화련의 상태 때문이 아니었어도 뉴욕에 못 들어갔거나, 들어가자마자 드러누웠을 것이다.
“제가 처음부터 말을 잘 못 전달한 거였습니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나는 어쩌라는 거야?
“저기요, 언니. 미안한데, 마스터도 혼자서 고생하다가 말이 잘 못 나간 거거든요? 언니 혼자서 고생한 줄은 아는데...”
-야, 누가 고생한 줄 모른데? 그냥 차라리 처음부터 천천히 들어온다고 했으면 괜한 기대도 안 했을 거 아냐. 에이씨, 괜히 기다렸네.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앙탈이래. 아무튼 미안하게 됐어요. 나 때문에 뉴욕 진입까지는 좀 걸리겠네요.”
-너 전혀 미안해하는 투가 아닌데.
“그거야 제 의지가 아니라 마스터가 고집 부려서 그런 거니까? 나흘 동안 좀비처럼 뛰어다니는 거 못 봤으면 이렇게 편들어주지도 않았을 거에요. 마스터 잘 못은 맞으니까. 갈구려면 사람 좀 쉬고 나서 갈궈라. 뭐 그런 거죠.”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바뀐다는데 넌 어째 안 변한 거 같다?
“변할 걸 기대했어요? 그것 참 유감스럽네요.”
-됐다. 됐어. 말을 말아야지. 류 현. 너, 나 이거 기억해 둘 거야.
“예, 죄송합니다.”
-에휴...그래서, 잔뜩 기합 들어간 장관님들한테도 내가 대신 전해줘?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러기 싫다는 기색이 뚝뚝 묻어났다. 류 현과 화련은 그녀를 이해했다.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 6주간 별 잡음내지 않고 지낸 것만으로도 그녀는 칭찬 받아야 마땅했다.
“아뇨, 그건 제가 웨인 씨를 통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쪽도 이런 식으로 전해주는 게 편하겠죠.”
-그건 마음대로 해. 그럼, 언제쯤 넘어올 거야?
“화련 씨 상태를 봐가면서 정해야겠지만...아마 교대로 라도 사흘 안에 넘어갈 겁니다. 상태 체크를 위해서라도 가긴 가야하니까요.”
-엥? 련이랑 같이? 사흘? 너무 급하게 오는 거 아냐?
“방금 전까지 빨리 오라고 성화 부리셨잖습니까.”
-야, 그거야 련이 거기 두고 오는 줄 알았을 때 얘기지. 내가 무슨 환자 상대로 땡깡 부리는 개년인 줄 알아? 내가 봐도 여긴 내상 입은 환자가 올 곳이 아닌데.
그럼 땡깡 부리는 줄 알고 그랬단 말인가. 류 현의 표정이 대번 떨떠름하게 바뀌었다.
“저도 그렇고 싶은데 본인이 고집을 부리는 걸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상황이 이렇지만 않으면 어디 요양 병원에 밀어 넣고 싶은 심정입니다. 일반인 상대로는 땡깡은 안 부리실테니.”
“저기요, 아저씨. 다 들리거든요?”
-그거 다 너 보고 배운 것 같은데. 에휴, 그래. 련이 때문에 라는 데 내가 참아야지. 차라리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어때? 여기 구덩이 장난 아니게 커져서 그쪽까지 여파가 갈지도 몰라.
“이미 그만한 구멍이 났는데 별 다른 영향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죠. 이쯤 되면 몇 백 킬로미터 더 떨어진다고 바뀔 건 없습니다. 화련 씨를 아예 서부로 보낼 게 아니라면.”
뒤로 빠져서 대화를 듣고 있던, 화련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게 흠칫 떨었다. 반쯤 농담하는 건 줄 알았는데 류 현은 진심으로 그녀를 서부 주에 쳐 박을 생각도 해본 모양이었다.
화련은 무리할 시점의 기준을 조금 더 높이기로 했다.
-그래? 뭐,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여기 온 지질 전문가? 그런 애들은 막 이런 구멍이 뚫렸는데 이 형태를 유지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막 난리치더라고.
“제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흙을 퍼 올릴 때 작용한 힘이 그 구덩이에도 계속 작용하는 중이라는 의미겠지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지 의미가 감이 안 잡힌다는 게 문제지.’
괴수가 현실의 흙이나 금속 가공물을 가져다쓰는 경우는 존재했다.
리치가 가장 대표적인 예로, 성을 짓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정도로 겁이 많은 개체가 오래 생존해서 조금이나마 지능을 되찾으면 던전에서 가지고 나온 마력이 가득한 소재가 아닌, 현실의 흙과 금속으로 성 주변에 외벽을 세우는 행동을 보이곤 했다.
이번 생에서는 엘더 리치의 부하 중 하나인 7성리치가 그 비슷한 행동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쉬운 대로 가져다 쓰는 인상이 강했지, 뉴욕의 천공성처럼 저렇게 닥치는 대로 끌어 모으진 않았다.
뉴욕에 급파된 이 분야 전문가들에 의하면, 벌써 천공성 두 채는 짓고도 남을 양의 흙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했다. 그럼에도 흙을 빨아올리는 행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승하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떠있는 것과 방어막으로 이미 지물(地物)을 구축해서 방비를 더하는 건 의미도 없는 수준인데 대체 뭐하러 마력을 낭비하면서 그 정도 양의 흙을 퍼올리고 있는 거지?’
뉴욕을 박살낼 생각이라면 전투기들을 격추시킨 불꽃을 쏘아내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아직 도시 내에 남아있는 인화성 물질이나 가스들이 효과를 두 배, 세 배로 늘려줄 테니까.
아무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승하는 흙을 퍼올리는 행위가 시작된 이후부터 ‘구멍’ 주변의 마나가 굉장히 빠르게 안정되는 중이라고 했었다. ‘구멍’이 내뿜던 기분 나쁜 마나의 유입이 중단되고, 용종 괴수 웨이브의 기미도 사라졌다고 했다.
흙을 퍼올리는 행위가 대가 없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
“흙 말고는 다 토해냅니까?”
-그렇진 않은데 기준이 애매해. 아스팔트는 최초 목격자들이 빨아들이는 걸 봤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고, 관 몇 개는 빨아들여놓고도 지금까지 나오는 족족 빨아들이거든. 수도관이나 통신선도 그렇고.
“근처로 가면 염동력이 작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신다고 하셨죠?”
-엉, 완전히 그쪽은 아니고 련이 마법이랑 반반 섞인 느낌? 말로는 설명하기가 애매하네.
호지슨 버넷과 웨인에게 다 보고 받아본 내용이었지만 류 현은 승하에게 그들에게도 한 질문을 던졌다.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비슷했다.
다른 때라면 그녀가 자기 감을 믿으라고 하면서 뭔가를 권하면 슬쩍 도망갔겠지만, 괴수와 던전이 관련되면 그녀의 감은 없는 시간을 짜내서 듣고 참고 삼을 가치가 있었다. 적어도 류 현은 그리 생각했다.‘셋 다 조금씩 표현이 다르긴 하지만, 결론은 똑같다. 저 짓에 꽤 큰 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거지. 괴수 웨이브가 멈출 정도였으면 좋겠는데.’
-근데 진짜 거기 있을 생각이야? 내 생각에는 기왕 사흘 그러고 있을 거 좀 더 멀리 떨어져있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너도 들었겠지만, 당장 이 짓 멈추면 구멍 뚫린 여파로 주변이 난리날 거라던데.
“걱정은 그 현장에 있는 승하 씨가 받아야 하죠. 그리고 뜨고 싶어도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한 달 사이에 여기 대통령이 노이로제가 제대로 걸린 모양이더군요. 어차피 멀리 가지도 못할 거, 여기 머물면서 달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던컨 대통령은 숨긴다고 열심히 숨긴 듯 했지만, 그 어딘가 찌든 얼굴은 화장이나 억지 표정으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속이 편하면 이상한 상황이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아, 알 것 같다. 웨인이 신문기사 같은 거 못 보게 하려고 한동안 알짱거리던데 그것 때문인가? 흠, 그래? 그럼 고생해. 난 한 번 더 돌아보고 자야겠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이죠. 구덩이에 뭔가 변화가 생기면 들여다보려고 뛰어가지 말고 일단 냅다 튀세요. 사태 파악은 좀 늦어도 됩니다.”
-어휴, 잔소리 마왕. 알았어. 뭔 일 터지면 냅다 튈 테니까 그 때 뒷감당 잘 하게 좀 쉬어. 련이 말대로 너 좀 멍해 보인다. 진짜 끊는다. 쉬어.
그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화련은 통화를 끊었다. 시작을 땡깡으로 시작한 이답지 않은 쿨한 마무리였다. 류 현은 태블릿 PC를 갈무리하다가 자신을 빤히 보는 화련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시선으로 대치하던 두 사람 중 화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스터.”
“안 됩니다. 허락해드릴 수 없습니다.”
“와, 이젠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이에요?”
“양심이 아직 남으셨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그런 거 아니거든요?”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거 그냥 두고 보기만 하실 거에요?”
화련은 입국 직전에 그녀의 닦달에 못 이겨 류 현이 다시 가져다준 제 태블릿 화면을 쿡쿡 찔렀다. 화면에는 미국이 제공한 천공성의 사진이 떠있었다. ‘구멍’으로 흙이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그럼요?”
“이전에야 반은 실체화하고 반은 저어~쪽에 걸친 상태라서 공격해봐야 별 재미도 못 봤겠지만, 지금은 이미 실체화 한 상태잖아요. 그래도 먹힐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찔러보기는 충분한 난이도까지 내려온 거죠. 다른 곳이야 알려줘도 능력이 딸려서 못 그러겠지만. 우린 아니잖아요? 마스터가 열심히 뛰어서 모은 무기가 셋이나 있는데. 우리라고 그냥 이놈들이 만족할 만큼 모으고 다른 짓거리 시작할 때까지 보고 있으라는 법 있나요? 안 그래도 비아트릭스 그것도 오다 말고 멈춰서 켕기는데.”
캐나다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던 비아트릭스는 대서양 공해 상에 멈춰선 상태였다. 정확히 천공성 위의 ‘구멍’이 흙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류 현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왜 자신이 이 단순한 생각을 못 떠올렸나 싶어서였다.
화련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걸 보고 정신이 나갔나? 아니면 저 작업을 중도에 중단시키고 나서 돌아올 보복이 두려워서?
‘저놈들이 인간한테 이로운 짓을 한 적이 없는데 하기도 전에 보복을 생각하는 건 바보짓이지. 어차피 뭐가 올지 모를 건 보복이나 저 작업이 끝난 뒤 결과물이나 똑같아.’
경험한 적 없는 이상현상에 겁을 먹었던 것인지, 당황했었던 것인지는 지금 당장 판단이 안 섰지만 류 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반성은 일이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내일 일찍 희란 씨와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 그걸 확인하고 오면 좀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아마 분명히 저녁 때는 지나서 돌아올 거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혜라 꽉 붙들고 씻는 것도 같이 할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