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5화 〉탐식마(貪食魔) (315/429)



〈 315화 〉탐식마(貪食魔)

영상의 시작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완연하게 어둠에 잠긴 뉴욕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높이는 사람의 시선 정도에서 점점 높아지더니, 벌집 꼴이 된 빌딩들을 넘어 허공에 떠있는 성을 비추었다.

아무런 추진체도, 비행선처럼 부력을 형성할 부유체도 없었지만 그 성은 떠있었다. 물리법칙  먹으라는 것 마냥 떠있는 부유성은  모습에 걸 맞는 기괴한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천공성(穿孔城). 뉴욕 시를 포함한 미 동부를 전시 상태로 몰아넣은 이 성의 이름이었다.
천공성의 위에는  이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난 6주 동안 웨이브 카운트를 5로 늘린 ‘구멍’이.
화련과 류 현이 의구심을 느낄 때쯤,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영상의 사운드에 소음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끄그극- 우드득- 콰르르- 촬영자도 이런 상황은 예상 못했는지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다가 천공성 아래를 비추었다.
마치 이것보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천공성 바로 아래의 바닥을 비추며 표시를 하는 것처럼 카메라를 빙빙 돌렸다.

“저거 지금 땅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정확히는 그 아래에 있는 땅이 일어나고 있었다. 위를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뚫고, 시멘트를 뚫고 흙과 돌들이 중력을 잊은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천공성 위에 뚫린 ‘구멍’을 향해서.
그제야 영상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촬영자가 아닌  3자의 목소리들이 뒤섞여서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라 별 의미는 없었지만.
촬영자는 그 난리 통에도 무슨 생각인지 멀어질 생각은커녕, 슬금슬금 앞으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발견한 것인지  군인무리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꿍! 쿠르르르! 그 때, 천지가 뒤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달려오던 군인들이 나자빠졌다. 촬영자 또한 넘어진 듯 했지만, 그는 기우뚱한 상태로 포장이 뚫린 도로를 비추었다.

그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떨리는 손으로 촬영을 계속했다.
쿠우우우! 굉음과 함께 카메라가 위쪽으로 휙 돌아갔다. 비행흔을 길게 끌며 나타난 전투기 편대는 망설임 없이 실어온 불꽃을 내뿜었다.

쿠왁! 콰아앙! 콰앙! 소리는 요란했지만 결과는 별 볼일 없었다. 피어오르는 화염과 폭발음은 천지를 뒤흔들  같았지만, 천공성 주변에 드리워진 푸른막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화련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미사일 공격이 전부 막혔다는 것에 기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투기 편대가 등장할 때부터 생목숨이 날아가거나 생돈만 날아가겠구나 싶었으니까.

“실체화 했어...”

화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류 현은 영상에 더욱 집중했다. 그녀의 말대로 천공성은 이전처럼 공격을 그냥 흘리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방벽으로 막았다는 증거가 확실하게 보였다.
편대의 미사일 공격을 다 받아내고도 굳건한 푸른 에너지 막.
귀국하기 전과 다르게 이젠 공략의 최저 조건이 발생하긴 했지만,  현은 그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공략 난이도를 생각했다기보단,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이래선...더 이상 미적거릴 수도 없겠는데. 아직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데...’


같이 영상을 보고 있는 화련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될 수 있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미국의 멸망과 저울질 하라면 꽤 망설였겠지만, 지금까지는 뉴욕이 박살난 것과 동부 몇몇 도시가 피해를 입은 정도였다.
그의 생각에 반대 급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피해. 동부 사람들은 류 현의 그 판단에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건 그도 알바가 아니었다.
류 현의 속이 타들어가거나 말거나 영상은 계속되었다.

천공성은 그냥 얌전히 얻어맞고 있진 않았다. 전투기 잔탄을 모두 소모한 전투기 편대가 슬슬 빼려는 기색을 보이자, 주황색 빛이 뻗어 나오더니,

지잉- 콰아! 후르르! 그 선을 따라 눈부신 주황빛 불꽃이 터져 나오며 경로 상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삼켰다.
운 좋게 직격을 피한 기체도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날개가 녹아 추락하거나, 공중에서 터져버렸다. 30초도 안 되는 시간에 전투기 편대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깨끗하게 소멸했다. 학살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광경.
추락해서 불타고 있는 전투기를 비추다가 영상이 끝이 났다.

긴장이 풀린 화련은 세워놓은 침대에 등을 기대었고,  현은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감싸 쥔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화련이 불쑥 내뱉었다.


“마스터, 설마 지금도 안 된다고 하실 건 아니죠?”


약올리는 투가 아닌데도 왠지 약 오르는 기분이었다.  현은  몸 사릴 줄 모르는 환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침음성을 삼켰다.

그리고 차마 말로 허락을 하진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화련의 입가가 위로 휘어지는 것을 보고 류 현은 방금 전의 물음이 정말 약 올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의심을 확인해보는 대신에 시간을 달리 쓰기로 했다.


“절대로 단독 행동은  됩니다. 저와 희란 씨가 먼저 뉴욕으로 들어가서 마나의 흐름을 살 필거고요. 외곽에서부터 천천히 들어가면서 적응 추이를 지켜 볼 겁니다. 최소 이틀 정도요. 마법을 쓰려는 시도가 발각되면 그 날로 캘리포니아나 오리건으로 보내 버릴 겁니다. 그걸 항상 감안하고 움직이시길.”

드물게 강경한 발언을 내뱉었지만 화련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부모님 잔소리를 듣는   딸 같은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자기 의사는 표현하고 싶은데, 그러자니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근질근질함을 참고 있는 그런 얼굴.

하지만 주의사항을 내뱉으면서 새로운 주의사항을 머릿속에서 짜깁기에 바쁜 류 현은 그 표정의 뜻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아,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일단 떠날 준비부터 해야 하지 않아요?  달 동안 제 병간호만 하셨다면서요. 손도 모자랄 텐데. 돕겠다고 하면 받으실 거에요?”
“절대 안 됩니다.”
“이런 건 진짜 칼같이 대답하시네. 그럼 당장 준비 들어가야죠. 애들은 안 깨우실 거라면서요. 걔들 좀 쉬긴 쉬어야겠던데.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안 될 것도 없죠.”

류 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병실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화련이 혼자 남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젠 혼자서 환자식을 해먹어도 될 정도로 회복했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렇게 칼같이 잘라지는 게 아니었다.


화련은 픽 웃으면서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여기서 꼼짝도 안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다녀오셔도 되요. 제가 침대 밖으로 나가면 다 회복될 때까지 미국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할 게요. 이럼 됐죠?”

화련이 조건까지 걸었지만 바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는 신호를 주고 나서야  현은 병실을 나섰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두 번 반복되기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강 찬씨?  현입니다. 지금 급하게 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십니까?”

***

콰아아! 콰르르! 후두두둑 토사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산사태나 싱크홀과 다르게 이 토사의 강은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중이었다.
가로막는 통신선이나 가스관도 뜯겨져 같이 딸려 올라갔고,  썩어 문드러진 관 같은 것도 몇 개  섞여있기도 했다.
당연히 그것들이 퍼 올려진 땅은 텅빈 속을 그대로 드러낸 상태였다. 승하는 그 구덩이의 가장 자리에 서있었다.


승하는 그 기괴한 광경을 연출한 힘의 근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멍’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기분 나쁜 마나를 거의 내뿜지 않고 있었다. 반대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확실하지 않은, 느낌뿐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메모해 두었다.


벌써 나흘째 보고 있는 광경이었지만, 승하는 위로 솟구치는 토사의 강 가장 자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손에든 수첩을 끼적거렸다. 이런 걸 오는 처음 보는 것처럼 열심히 관찰하며 느낀 바를 모두 적었다.

멀찍이 떨어뜨려놓은 호지슨 버넷과 오늘도 그녀를 말리러 찾아온 여자 관료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이미 동부에서는 전쟁 영웅 취급 받고 있는 자신을 걱정해서 저런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성가신 건 성가신 거였다.

혼자서 용종 괴수 웨이브를 상대하겠다고 닥돌하는 것도 아니고, 곧 방문할 동료를 위해서 조금 근처에서 관찰하겠다는 데 뭐 저리 유난인지.
이럴 때마다 저런 인간들을 알아서 상대해준 류 현이 그리웠다. 이리 그리워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겠지만.


“음...저거 또 저러네. 왜 아스팔트 같은 건 빨아들이다 마는 거지? 뭔 규칙성이 있는 건가?...에이, 련이나  현이 알아서 찾아내겠지 뭐.”


이상한 점은 괜히 자의로 판단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기입했다.
더는 혼자서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한국으로 떠나갔던 이들이 돌아오는 날이니까. 관찰을 마친 승하는 히죽히죽 웃으며 구덩이에서 멀어졌다.
주변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도 그녀는 무시했다.


방금 전까지 얼쩡거린 구덩이의 직경이 킬로미터 단위로 표시해야 할 정도이며, 깊이는   배에 달할 것이라는 사실은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적어놓은 수첩 때문에  현의 복귀가 지연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리 무심하게 굴진 못했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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