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화 〉탐식마(貪食魔)
“언제 움직일 생각이에요?”
류 현과 백혜라에게 각각 오른 손과 왼손을 붙들린 화련이 물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던 두 사람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백혜라는 류 현을 한 번 슬쩍 보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류 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에게 공을 떠넘긴 것이다.
그 모습에 류 현은 원래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임에도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일단 검사가 끝나고 말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 번도 이상이 발견된 적 없잖아요. 제가 정신 차리고 나서 무슨 이상 증세를 보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 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겁니다. 입은 부상에 비해서 회복이 너무 깔끔했으니...”
“그 냉기가 아직 제 몸에 남아있었으면 심장이든 간이든 터져서 죽었거나 죽는다고 소리 치고 있겠죠.”
“아무리 그래도...”
류 현이 들어줄 기미가 안 보이자 화련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팔이 붙잡힌 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녀는 더 궁시렁거리는 대신, 제 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두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류 현과 백혜라가 각각 붙잡고 있는 팔을 통해서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온 기운들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백혜라가 붙잡은 왼쪽에서 기분 좋은 서늘함을 주는 기운이 이곳저곳 쓰다듬는 느낌이라면, 류 현이 붙잡은 오른쪽은 스스로 생각해도 비유가 좀 이상했지만 목줄 찬 맹수가 으르렁거리면서 이리저리 훑는 그런 느낌이었다.
본래라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화련은 저항은커녕 기본적인 항마력마저 억누른 채로 두 사람이 하는 일을 그냥 받아들였다. 두 사람 다 극도의 집중 상태에서 화련의 내부에 강한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기에, 그녀가 느끼는 감각은 간질간질함 정도가 다였다.
“냉기 쪽은 문제없네요. 내상을 살폈는데도 깨끗해요.”
“제가 본 것도 같습니다. 내상 아무는 속도가 좀 걸리긴 합니다만...”
“아 진짜, 저 죽다 살아난 거거든요? 이 정도면 엄청 빠른 거지. 뭘 그거 가지고 유난이에요?”
죽다 살아난 환자가 자신의 회복이 빠르다고 화를 내는 이상한 광경이 연출되긴 했지만, 어쨌든 검사는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집중하느라 안색이 파리해진 혜라는 인사말을 남긴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혜라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화련이 검사 때문에 막혔던 말을 다시 내뱉었다.
“언제 움직이실 거에요? 마스터. 계속 이러고 있을 건 아니죠?”
“...지금 당장은 힘듭니다.”
“저 때문에요? 괜찮다니까요. 마스터 기준에서나 그렇지 이 정도면 엄청 빨리 낫고 있는 건데.”
“안 됩니다. 당분간은 절대 안정입니다.”
“누가 복귀해서 싸우겠데요? 비행기 타는 것 정도는 문제없다니까요. 풀 컨디션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렇지, 이 상태로도 여기 경비원들 정도는 다 잡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용잡이 팀 내에서 육체능력이 가장 약한 화련조차 정도가 중요하긴 하지만, 내상을 품은 상태로 개인화기로 무장한 일반인의 제압이 가능할 정도로 강건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마력을 운용하거나, 격한 움직임을 연속해서 했다간 여지없이 피를 토하고 격통에 시달릴 테지만, 일상생활 수준의 행동을 취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를테면 장거리 비행 같이 조금 몸에 부담을 주는 행위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류 현이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화련이 깨어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물어온 이틀 째 되던 날부터.
“순조롭게 회복하는 중인데 굳이 회복을 더디게 하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요.”
“아우, 진짜. 대체 왜 그래요? 첫날에 운 거 때문에 그래요? 그건 그러니까...이상한 꿈을 꿔서 그렇다고 설명했잖아요.”
정신을 차린 첫날에 기절할 때까지 울어버린 바람에 화련은 그 후로 나흘 동안 강보 안의 갓난아기의 심정을 체험하게 되었다.
24시간 교대로 붙어있던 희란과 류 현이 그녀가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것도 그냥 두고 보질 못했다.
처음에는 저가 첫 날에 한 짓이 있다 보니 그냥 받아주었다. 하루면 안정을 되찾고 그만두겠거니 싶었다. 말이야 쉽지, 이런 식으로 수발드는 게 보기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지간해선 지치지 않는 플레이어의 몸뚱이를 그녀를 신생아처럼 돌보는데 아주 열정적으로 써먹었다.
정신적인 피로감? 엿이라도 바꿔먹었는지, 그녀가 귀찮을 정도로 이거 해드릴까요? 저거 해드릴까요? 물어왔다.
결국 참다못해, 내상이 터져서 각혈할 정도로 소리친 후에야 그녀는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봐야 하루에 두 번씩은 양 팔을 붙들린 채로 몸 안을 샅샅이 검사받는 처지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류 현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화련 씨는 거의 죽다 살아나셨습니다. 사실 회복보다는 그대로 눈을 못 뜰 가능성이 더 높았었죠.”
“...그건 몇 번이나 들었어요.”
퉁명스럽게 대꾸하긴 했지만 화련은 강하게 받아칠 수가 없었다. 희란이 서럽게 엉엉 울면서 몇 번이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내부가 완전히 박살나서 마력이 구멍 난 유조선에서 기름 새는 것보다 더 절제 없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그걸 커버하느라 류 현의 마력통이 거의 다 비어버렸다고 했으니, 당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상태였는지 알만 했다.
자신의 이야기였는데도 듣고 있으면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들어보면 정말 죽었어야 마땅하다는 말이 나올 만한 상태였으니까.
“아뇨, 모르시니까. 이리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 큰 부상은 위기를 넘기는 것과 겉보기 회복이 끝내는 것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후유증이 없을 수가 없는 부상에서 막 회복하신 겁니다. 별 무리가 안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한 일이 끔찍한 후유증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류 현을 화련은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 내뱉은 말은 전부 그가 했던 행동들을 공격하는 말이기도 했다.
류 현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미 후유증으로 병신이 되었거나, 관 속에 누워있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내상이 다 아물기도 전에 내상을 찢어가며 싸운 게 몇 번이요, 플레이어라도 병신이 되었어야할 치명상에서 회복하자마자 일을 쫓아다닌 게 일상이었으니까.
반박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릴 지경이었지만 화련은 참았다. 저리 걱정해주는데 그런 소리를 할 정도로 그녀는 모질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요양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도 되는 상황이라면 저도 얼마든지 그러고 싶죠. 지금도 그 악몽을 떠올리면 하루종일 식욕이 없는데.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가 않잖아요.”
어르고, 화도 내고, 최후의 수단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척을 한 끝에 화련은 어제 대략적인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뉴욕은 진척이 더뎠지만 용잡이 팀이 승하를 빼고 다 빠져버리는 바람에, 부족해진 저지력만큼 빠르게 폐허로 변하는 중이고,
“그게...아니, 비아트릭스가 북미로 갈지도 모른다면서요.”
한 번의 공격으로 그녀를 빈사상태로 몰아넣은, 브라질에 출현했던 네임드 몹 해왕 비아트릭스는 대서양에 얼음길을 깔아놓고 거니는 기행을 며칠 전까지 계속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변경한 상태였다.
직선상에는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주의 주도인 핼리팩스가 있었다. 캐나다 정부는 지금 대피령을 내리고 시민들을 대피 시키느라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현재까진 비아트릭스와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타국에서는 너무 과한 조치 아니냐며 놀라는 눈치였지만, 미국 동부가 전시나 다름없는 상태에 돌입한 걸 모를 수가 없는 캐나다 정부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당연히 캐나다 정부는 정식으로 용잡이 팀의 출진을 요청한 상태였다.
그것을 받아야할 대장인 류 현이 칩거나 다름없는 상태라, 협회가 그것을 받아들고 한 다리 건너서 부탁해오는 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소동을 일으킨 비아트릭스가 방향을 튼 것이 벌써 열흘 전. 아무리 오래 걸려도 앞으로 열흘 후면 북미 대륙에 상륙할 것이라는 예측이 이미 나온 상태.
어제 이 소식을 알게 된 화련이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고 물었지만, 류 현은 회복에만 집중해 달라며 말을 돌렸었다.
“그건...지금의 화련 씨가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회복만 생각해주세요.”
어조가 꽤 누그러졌지만 말을 돌리는 것은 똑같았다. 화련은 차마 가슴은 치지 못하고, 그 앞의 허공을 툭툭 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한 달 사이에 대체 뭘 봤길래 태도가 이리 변한 것일까. 마음 같아서는 멱살잡이라도 해서 털어놓으라고 하고 싶었다.
“아우, 아우! 진짜! 제가 싸우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은 싸워달라고 해도 못 싸워요. 마스터도 몇 번이고 들여다 봐서 아시잖아요? 지금은 무리를 해도 마법이 중간에 깨져서 아무것도 못해요. 그래도 최소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거리에는 가 있어야 하잖아요. 아니면 마스터가 혜라랑 희란이 데리고 거기에 먼저 가 계실래요?”
류 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만일을 대비해서 혜라 씨와 저 둘 중 하나는 무조건 붙어있어야 합니다. 희란 씨도 어지간하면 같이 있는 게 맞고요.”
“그러니까요. 마스터 말 대로면 최소 우리 팀 인원의 40프로, 전력으로 치면 80프로 이상이 환자 병간호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소리잖아요. 이게 말이 되요?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된다고 할 걸요?”
“사정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는 신경 안 씁니다. 화련 씨도 신경 끄시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화련 씨가 복귀하기 전에는 기동성이 너무 떨어져서 가봐야 별 성과도 내기 힘들 겁니다. 이번에는 도망치기도 힘들 테니, 성과를 못 내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다행일 수도 있겠죠.”
대체 뭣 때문에 한 달 사이에 이리 고집불통이 된 것일까. 화련은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라고 하든 간에 류 현은 회복이 끝나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말하는 걸 보면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일단 안 된다는 결론에 맞춰서 이유를 만드는 것 같았다. 화련은 확신했다.
‘진짜 돌겠네. 이대로 있으면 여태 쌓은 이미지 다 까먹는다고. 공포 이미지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류 현이 말한 것처럼 화련도 사정을 모르는 인간들이 제 좋을 대로 저에게 지껄이는 소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가는 소리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런 얘기들을 찾아보지 않는 그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큰 소리가 되질 않길 바랐다. 그는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가 아니었으니까. 전생, 현생을 통틀어서.
그녀의 속이 타들어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 지 류 현은 태연하게 이런 소리를 했다.
“사냥하는데 실패하면 그게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화련 씨, 지금은 회복에만 힘써주시는 게 이런 저런 소리를 가장 빠르게 진화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승하 씨도 그걸 위해서 고생을 자처하고 계신 겁니다.”
‘...오늘도 텄네. 아, 진짜...정보가 없으니까 뭐라고 반격할 수도 없네. 어디서 태블릿 하나만 구하면...’
그 때였다. 류 현의 휴대전화가 울리며 다시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려던 그의 입을 막았다. 화련이 어서 받으라는 듯 손짓하자, 류 현은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가, 우거지상이 되었다.
화련은 그 극적인 변화에 그의 휴대전화 화면을 슬쩍 들여다봤다.
‘웨인 크로이츠...? 어, 설마?’
전화를 하면 할수록 화련 안에서는 비호감력이 상승중인 불쌍한 남자의 이름이었다. 평소라면 재수 없는 소식만 물고 온다고 짜증을 냈겠지만, 이번만큼은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류 현이 전화를 받았다.
“예, 류 현입니다. 예, 예. 네?...영상이 있습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확인 후에 바로...네. 되도록 빨리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조만간.”
전화를 끊은 류 현은 우거지상으로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화련은 기대하는 빛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뭐래요? 뉴욕에 무슨 일 있데요?”
“...일단 영상을 보내주셨다니 그것부터 봐야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뭐라고 말씀하시긴 했는데 썩 와 닿지가...”
“음, 희란이랑 혜라 부를까요?”
“아뇨, 두 분 다 막 쉬러 들어가셨으니 보고나서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곤 류 현은 웨인이 보내온 영상을 켰다.
그리고 곧, 예전에 화련이 웨인의 전화가 재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연락담당을 웨인이 아니라 다른 이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아주 진지한 생각 또한.